라이벌과 최종보스라는 코드 [네남자만화방 / 한겨레21 9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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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벌과 최종보스라는 코드

김낙호(만화연구가)

주인공을 방해하는 매력적인 대적자라는 요소는 서사물의 시초부터(‘안타고니스트’) 내려오는 유구한 전통이지만, 장편 장르만화의 ‘라이벌’ 만큼 그 개념을 매력적으로 소화해낸 부문이 또 있을까. 베지터가 없는 손오공, 서태웅이 없는 강백호, 마동탁이 없는 오혜성, 레이 없는 아스카는 얼마나 싱겁겠는가(마지막 사례는 조금 이상하지만, 관대하게 넘어가자).

장르만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라이벌이라는 코드가 큰 재미를 주는 것은 단순한 방해자 또는 물리쳐야할 적이라기보다는, 동반자이기도 한 양가적 면모를 지니기 때문이다. 라이벌은 서로의 대단함을 인정하고, 서로 대적해 나가면서 그 과정에서 각자 성장을 이룬다. 심지어 마치 변증법의 정반합처럼 그 대결과정 속에서 새로운 무언가가 만들어지는 경우도 생긴다. 한마디로, 라이벌 관계는 캐릭터 중심의 서사극을 흥미롭게 이끌어가는 자연스러운 동력을 제공한다. 특히 짧은 작품보다 장기 연재작에서 라이벌은 더욱 요긴하게 활용될 수밖에 없는 것이, 라이벌을 통한 성장은 반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하나 만큼 성장해서 승기를 잡으면, 라이벌은 그것을 따라잡고 또 둘 만큼 더 성장하여 반격한다. 주인공은 그 상태를 뒤집기 위해 새롭게 ‘수련’에 들어가서 초사이야인쓰리든 풋내기슛이든 나선환이든 츤데레든 필살기를 장착하고 나오고, 덕분에 독자들은 한층 더 강화된 매력에 한동안 더 열광할 수 있다.

좋은 라이벌을 만드는 것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주인공과 비슷한 수준의 매력을 지녀야 하기 때문에, 캐릭터로서도 주인공과 맞먹는 섬세한 설정이 필요하다. 자신의 목적 및 뚜렷하게 추구하는 바가 있어야하며 그 안에서 주인공과 반대되는 입장과 공통되는 목표가 살짝 모호하게 교차해야 한다. 출중한 실력은 물론 기본이다. 명탐정 코난의 라이벌인 괴도 키드라면, 도둑질을 하면서도 나름의 사회적 정의감으로 움직여야 한다. 스포츠물의 라이벌이라면 주인공과 격하게 다투면서도, 더 나은 선수가 되고자 하기에 스포츠맨십의 자존심이나 경기 규칙은 지켜야 한다. 서로 인정할 만한 무언가를 지녀야만 라이벌로서 성립되고 양쪽 다 이야기 전개 과정에서 성장을 하는 것이 납득과 만족을 줄 수 있다. 또한 자칫하면 이분법적 구도로 단순화되기 쉬운 대중 오락물의 흐름 속에서, 적대적 공생 같은 양면성을 이야기 내내 끝없이 유지하는 것 자체가 기본적으로 어렵다.

그런 섬세한 라이벌 관계의 매력을 유지하기 버거울 때, 편의적으로 흔히 도입하는 또 다른 장치가 바로 ‘최종보스’다. 최종보스가 있으면 결국 그쪽을 물리쳐야함을 구실 삼아, 주인공과 라이벌은 아예 동료가 되며 의기투합할 수 있다. 즉 갈등의 중심축을 살짝 옮겨놓음으로써 이쪽은 원래 꽤 비슷한 계열이었다며 과시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라이벌 구도를 통한 성장이라는 원래의 동력은 잃고 그냥 나쁜 놈 쓰러트리자가 되기도 쉽다는 폐단도 있기에, 도저히 반복해서 쓸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그럼에도 다시 쓰려면 최종보스 이후 또 보스가 나오는 식으로 억지 확장을 할 수 밖에 없고, 팬들은 갈수록 떨어져 나간다.

이상적인 경우라면, 필요하면 한 번씩 힘을 합쳐 위기를 극복할 수도 있겠지만 금새 다시 라이벌로 돌아가는 것이다. 혹은 라이벌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다른 방향에서 함께 최종보스를 쓰러트리든지 말이다. 다음 페이지에서 결말이 아닌, 계속되는 시리즈라면 더욱 그럴 필요가 있다. 갈등에 기반한 성장과 협력의 패턴을 정착시키는 것은 가장 많은 섬세한 에피소드들과 함의를 만들어낸다.

아, 혹시 모 사회의 대형 선거철마다 부는 ‘닥치고 단일화, 거역하면 역적’ 구도가 연상되었다면 어디까지나 우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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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의 격주 칼럼 ‘네남자의 만화방’. 4명의 필자들이 만화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나가는 코너인데, c모의 경우는 만화의 어떤 코드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은근슬쩍 세상이야기로 유도하는 것이 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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