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섭리가 아닌 인간의 선택 – 우리는 혼자다 [기획회의 332호]

신의 섭리가 아닌 인간의 선택 – [우리는 혼자다]

김낙호(만화연구가)

한 사회에서 특정 그룹에 미움을 투영하고 살인을 한다는 인류문명의 오랜 악습, 그리고 근대사회의 극대화된 산업적 효율성이 최악의 방식으로 결합했던 사건이 바로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다. 십자군 시대의 유태인이든 1990년대 보스니아의 여러 민족들이든 박해받고 목숨을 빼앗긴 것은 매한가지지만, 하나의 안정된 사회체제가 지극히 효율적이고 체계적으로 그들을 색출하여 공장제로 살인을 한 것이 바로 홀로코스트의 특이점이다. 광기의 정서가 아닌 근대적 이성으로 저질러진 악행이기에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의 무한한 재료가 되어준다(홀로코스트 와중에 살해당한 여러 부류 가운데 가장 두드러졌던 것이 유태인이었고 이들이 전쟁 이후 많은 글과 영화 등 문화예술 작품들을 생산해온 것도 물론 큰 기여를 했다). 홀로코스트를 다루는 피상적인 작품들은 표면적인 나쁜 나치, 불쌍한 유태인의 대립을 놓으며 순박한 휴머니즘을 설파한다. 하지만 좀 더 깊숙하게 들어가는 작품들은 인간의 조건, 살기 위해 필요한 사회의 근간, 나아가 믿음의 본질을 논한다.

[우리는 혼자였다](미리암 케이틴 / 해바라기 프로젝트 역 / 이숲)는 작가가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살다가 나치에게 쫒겨 도망다니던 자신의 유년시절을 그려낸 작품이다. 작가가 디테일을 다 기억하기에는 당시에 너무 어렸기에 주로 어머니에 대한 취재를 통해 얻은 사실들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만들었고, 따라서 자전적 이야기임에도 흔한 1인칭 회고보다는 일반적 전지적 3인칭의 극만화로 흘러간다. 군인인 남편이 전쟁에 나가고 어린 딸 리사와 부다페스트에 살아가고 있는 에스텔이, 그동안 나치에게 넘어간 부다페스트에서 탈출하고 러시아에서 도망자 생활을 하다가 결국 살아남는 줄거리다.

체계적 행정시스템으로 유태인을 색출하던 사회 환경이었기에, 도망치기 위해서 업자에게 돈을 주고 러시아 식모와 사생아 딸로 신분 서류를 위조해야했으며, 그간 그곳에 살았던 기록이 있는 유태인 모녀 역시 없어졌어야할만한 알리바이를 만들어놔야 했다. 그렇다고 해서 국외로 가는 과정이나 머물기로 했던 집안이 잘 풀리는 것도 아니다. 나치와 대립하던 러시아의 군대라고 해서 딱히 천사들인 것도 아니다. 그 과정에는 탐욕 어린 사람들도, 어쨌든 여력 있는 한도 내에서는 도우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에게 치이기도 하고, 눈보라치는 엄혹한 자연에게 치이기도 한다.

이야기는 아이의 시점으로 전개되지 않지만, 아이에게 들이닥치는 상황을 세부적으로 묘사해낸다. 중상류층 도시생활을 하던 부다페스트에서, 처음에는 아이가 개를 빼앗겨 마음이 상한다. 유태인들이 애완동물을 키우는 것이 금지된 것이다. 그 뒤에는 아빠도 돌아오지 않았는데 엄마가 어디론가 이사를 가자며 집안의 신원과 관련된 모든 것을 불태운다. 사진, 편지, 그리고 늘 신이 여기에 있다고 들려주시던 성경까지도 말이다. 도망가서 정착한 농장에서는 엄마가 어느새 한 독일 장교와 가깝게 지내고 산다. 현실은 유태인을 색출하는 독일 장교가, 가족을 살인수용소로 보내지 않는 댓가로 에스텔을 정부로 삼은 것이다. 독일인들이 가고 그들을 해방시켜주었다는 러시아 병사들이 들이닥쳤는데, 이 아저씨들은 숫제 야만인들 같이 눌러앉아 식량과 술을 거덜내며 무서운 분위기를 만든다. 그러자 엄마는 딸을 데리고 눈밭으로 나와 다시 정처 없이 걸어간다. 그 후 운 좋게도 정착하여 살 수 있게 되었고 새 가족 같은 사람들이 생길 무렵, 기적적이게도 아버지와 상봉한다. 그런데 여전히 너무 어린 딸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역시 가물가물하다. 이런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도 아직 그런 것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 나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큰 행운이었다. 다만, 이해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 속에 생기는 상처들이 딱히 옅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 마지막에 드러나면서 서늘하게 만들 따름이다.

상처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으로 잊혀질 뿐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 흑백으로 묘사된 과거의 이야기 사이에, 컬러로 그려진 오늘날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어 있는 리사의 이야기가 삽입되곤 한다. 리사는 유태인 전통에 따라서 아이들을 (일반 공립학교가 아닌) 유태인학교에 보낼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전통적 유태인인 듯한 남편은 “동류들과 함께 있도록” 그곳으로 진학시키자고 하지만, 그녀에게는 나머지 유태인이라는 명찰을 달고 사회와 구분해버리는 행위다. 신에 대한 믿음은 불행을 겪는 과정에서 무신론으로 돌아선 아버지의 영향, 어머니가 태운 성경의 기억 속에 평생 회의에 빠져버렸을 따름이다. 사실 어머니 에스텔의 입장에서도 힘든 생활을 견뎌내게 해준 것은 종교적 믿음 그 자체라기보다는, 현실적 고난들을 겪으며 겪은 믿음에 대한 애증의 부침이다. 인간의 현세적이고 효율적인 권력지배 앞에, 신의 의지는 가설에 다름 아니다. 무난하게 지내던 이웃이 나치가 만들어낸 새 사회 권력 앞에 탐욕스러운 지배자가 된다. 신의 우아한 섭리보다는 인간의 힘으로 무언가를 강탈하는 세상임을, 이해하지 않더라도 학습한다. 신이 굽어살피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혼자인 것이다. 돕는 사람도 있고 착취하려는 사람도 있지만, 도시적 생활에서든 눈밭에서든 우리가 살아남도록 노력하는 우리는 혼자다.

[우리는 혼자였다]는 연필과 파스텔을 사용한 부드러운 스케치풍의 그림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언뜻 보기보다 훨씬 정밀한 공간묘사와 풍부한 표정, 다양한 회색조를 통해서 효과적으로 살벌하고 황량한 정서의 세상을 전달한다. 면을 표현하기 위해 중첩되는 잔선들 속에 형상들이 뭉개지기 쉬울 듯하면서도, 은근히 이야기의 전달에 방해되는 바 없이 자연스러운 읽기가 가능하다. 그리고 이런 시각 표현은 눈보라 속을 정처 없이 걷는 대목에서 가장 확실하게 장점을 발휘하여, 정말로 “아, 우리는 혼자구나”하는 느낌을 극대화한다. 다만 그것은 흑백이라는 속성에서 효과적이고, 컬러로 묘사된 현재 시점의 이야기에서는 다소 시선이 흐트러지는 감이 있다.

[우리는 혼자였다]는 아트 스피글먼의 [쥐] 만큼 서늘한 건조함으로 중층적 성찰을 던져주는 경지에는 도달하지 않지만, 신파에 가까울 정도로 선악 선긋기와 비극의 정서를 극대화하는 수많은 여타 홀로코스트 소재 작품들보다는 훨씬 높은 경지에 있다. 섣부른 인본주의나 종교적 숙명으로 귀의하지 않고, 안정된 사회 환경이 비틀리며 도망가서 또 다른 사회 환경에 적응하고, 또 비틀리며 도망가는 연속과정에서 어떻게든 선택을 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애초에 그들을 박해한 사회 변화도,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하는 에스텔의 노력도, 신의 섭리가 아닌 인간의 선택이다.

우리는 혼자였다
미리암 케이틴 지음, 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 이상빈 추천/이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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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그러니까 지금 호): 워킹 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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