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로 이어오는 향수 – 달빛구두 [기획회의 061015]

현재로 이어오는 향수 – 달빛구두

김낙호 (만화연구가)

인간의 기억력이란 오늘을 살아가기에 가장 편리하게 만들어져있기 마련이다. 좋은 기억은 좋게, 그리고 아프고 힘든 기억들도 나름대로 긍정적인 의미를 덧붙여서 끄집어낸다. 그런 자연스러운 과정이 작동하지 못하면 기억은 트라우마로 남아서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는 악귀로 남지만, 대체로는 이런 식으로 과거의 경험들이 현재 삶의 토양이 되어주곤 한다. 그 기억은 때로는 개인의 좁은 삶의 범위가 아닌 그 사람이 살았던 ‘세상’의 방식에 대한 기억이고, 그 사람의 세상을 만들어냈던 그 이전의 다른 사람들의 방식에 대한 나름의 기억이다. 과거에 대한 ‘향수’는 그런 세상에 한번쯤 돌아가 보고 싶은 마음이다. 다만 정말로 단순히 옛날로 퇴행하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생각과 정신을 가진 상태에서 과거의 모습들을 보고 그 당시에는 충분히 느끼지 못하고 지나갔는데 나중에서야 아쉬움이 남았던 것들을 제대로 경험해보고 싶은 것이다. 그렇기에 과거에 대한 향수는 복고이면서도 지극히 ‘현재’ 중심적이다.

『달빛구두』 (정연식 / 전3권 / 휴머니스트)는 이런 의미에서 과거 향수의 모범과도 같은 작품이다. 향수 정서를 내세운 많은 크고 작은 작품들이 그냥 과거의 모습을 제시하고 공감을 강요하며 끝나는 것과 달리, 이 작품은 처음부터 여러 시대의 모습 사이에 흐르는 다르면서도 같은 느낌에 집중한다. 작품은 광고회사 기획자 이봄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갑작스런 모친상으로 고향에 내려가서 그간 소원했던 어릴 적 아저씨에게 과거 부모 세대의 사연을 듣는 식으로 전개된다. 크게 3개의 시대가 펼쳐지는데, 현재의 이봄이 살고 있는 세계, 6살 당시의 이봄이 살던 부모들의 80년대 세계, 그리고 그 부모들이 젊어 서로의 사랑과 사연을 만들어나가던 70년대 세계가 그것이다. 어머니가 돈을 벌기 위해 집에서 키우던 개를 잡아 팔아서 어린 가슴에 상처를 받았던 딸내미는 다시 자라나 같은 일로 또 그녀의 딸에 상처를 주고, 그때 어머니가 그 어머니를 이해 못했듯 지금 자라난 현대의 이봄도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한다. 자기가 좋아하지만 딱히 고백하지 못하는,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너무나 애잔해서 열병이 되는 그런 것도 아닌 애매하지만 현실적인 짝사랑과 자신에게 구애를 해온 또 다른 좋은 남자 사이에서의 선택이라는 모습 역시 지극히 현대적인 세상의 이봄의 모습이자, 한 세대 거슬러 올라가 어머니의 모습이기도 했다. 속절없이 속 좋지만 과거 운동권 경력 때문에 항상 일이 안 풀리시던 아버지, 억척스런 어머니, 동네에서 가장 친한 아저씨와의 80년대 골목길 생활의 기억은 70년대 그 부모 세대들이 젊었을 때 겪었던 70년대의 허름하지만 서로를 아껴주던 친구 생활과 비슷한 대구를 이루고 있다. 그렇기에, 어떤 시대이든지 간에 결국 사람 사는 세상의 냄새가 나며 현재 세상을 살고 있는 독자들에게까지 이어지는 힘을 지니는 것이다.

물론, 효과적인 과거 향수를 위해서 필요한 가장 중요한 재료는 바로 디테일이다. 어떤 좋은 의도도, 구체적인 기억들을 속속들이 새로 불러낼 수 있는 구체성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달빛구두』의 이야기적 매력은 새로움이 아니다. 모범생과 깡패의 우정이든, 그 사이에 삼각관계가 발생하는 것이든, 기본 인물구도나 큰 이야기의 뼈대는 지극히 고전적이고 익숙하다. 하지만 향수에 있어서는 새로운 요소보다는 익숙함을 얼마나 근본적으로 깊숙하게 자극해서 결국 그 속에서 독자들이 새로운 의미와 정서를 읽어내도록 만드는지가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대, 그 세상의 가장 핵심적인 무언가를 연상시켜주는 세부적 에피소드와 소재들을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것, 바로 디테일이 핵심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 수년간 스포츠신문에서 생활 개그만화 『또디』(이상하게도 많은 이들이 ‘또띠’라고 잘못 알고 있다)에서 잡다한 세속성을 묘사해 온 작가의 재능은 큰 장점이 된다. 세 가지 세상 모두, 각각의 현실감과 디테일로 대단히 효과적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위 ‘전문소재 만화’들 마냥 전문 지식 자체를 오락거리로 삼는 식이 아니라, 서정적 감수성을 펼치기 위한 인간 세상의 모습이 제대로 압축되어 있다는 말이다.

현재의 세상은 바쁘고 도시적인 경쟁 관계, 하지만 그 속에서 나름대로 구식으로 또는 쿨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간으로, 주인공 이봄이 근무하는 광고 기획사의 구체적인 업무과정 속에서 트렌디하게 담겨있다. 80년대의 세상, 즉 6살 소녀가 바라본 부모님의 생활고와 친구같은 옆집 아저씨의 공간은 골목길이다. 가계가 기울면서 골목길의 끝 쪽까지 이사 가는 모습, 에나멜 구두에 꿈을 담고 아이들끼리 나름의 사회관계를 만들어가는 모습은 80년대의 삶을 효과적으로 재구성한다. 그리고 작품 초반의 명장면이자 현실보다는 낭만적 꿈에 가깝게 그려진 어머니의 바이올린 연주 일화 역시도, 아줌마스러운 억척 엄마가 사실 멋지고 세련된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세밀한 울림을 준다. 봄이의 아버지 어머니와 동네 아저씨, 즉 작품의 진짜 주인공들이 젊은 시절을 보내온 70년대의 세상은 계급과 권력의 세상이고 억압에 짓눌린 저항의 시대다. 고등학교나 동네의 일상의 세밀함도 대단하지만, 특히 주인공들의 평범함이야말로 최고의 디테일을 자랑한다. 운동권에 뛰어든 주인공은 투철한 의지로 불타는 민주 투사가 아니며, 조폭에 뛰어든 다른 주인공은 출세를 위하여 아득바득 기회만 엿보는 대물이 아니다. 역설적이지만, 극적인 이야기일수록 오히려 세밀한 디테일에 신경을 써야 등장인물들이 대단한 상징물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온라인 연재 당시 칸 간 연출에 다양한 실험을 넣지 않아서 다소 심심했던 부분은, 책 형태로 재편집하는 것에는 오히려 편리함으로 다가온 듯하다. 물론 시각적 세부묘사보다는 둥그런 그림체로 감성적인 형상들을 구사하는 것에 더 장점을 지니고 있는 작가의 스타일에 비해서는 지나치게 칸 들이 큼지막하게 들어간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은 들지만, 거꾸로 보면 그런 느슨한 여백의 느낌이 좀 더 편한 독법이 가능했던 7-80년대의 만화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향수의 아름다움은 아름다운 지난날에 대한 회고가 아니라, 지나간 것을 기억하며 그 속에서 자신의 현재를 반추하고 과거와 화해하는 것에 있다. 각자 삶의 경험 속 어딘가에 있는 그 달빛구두를 발견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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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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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구두 – 전3권 세트
정연식 지음/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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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thoughts on “현재로 이어오는 향수 – 달빛구두 [기획회의 061015]

Comments


  1. 참 정말 오랜 시간에 걸쳐 숙성된 이야기를 보는 맛이 있는 만화입니다.

    바이올린 시퀀스는 딱 보는 순간. 아 이 분은 이런 걸 그리기 위해 만화가가 되신거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작가 본인은 연출하고나서 얼마나 흡족해했을까요.

    근래에 보기드문 ‘이야기만화’

  2. 그런데… 다 안풀어놓고 좀 빨리 종료시킨 감이 있더군요. 그런면에서 완성도가 정말 정말 정말 조금 아쉬운 만화.

  3. 업계인 뽐뿌질용 글이 어째서 수험생까지 자극한답니까..

    정말 결말 부분이 약—간 아쉽지만

    오랜만에 느끼는 ‘만화보는 재미’.

  4. !@#… 수험을 빨리 끝내고 만화책을 읽자는 결연한 의지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