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평등의 지향, 최저사양의 평등 [온라인진상열전 / 자음과모음R 2012 겨울호]

!@#… 어쩌다보니 ‘반지성주의’에 대해. 여느 글들과 마찬가지로 별로 많은 이들이 읽는 것 같지만 않지만, 은근히 소재가 떨어질 조짐이 없는 연재물(…)

 

[온라인 진상열전(4)] 지적 평등의 지향, 최저사양의 평등

김낙호(미디어연구가)

온라인상에서 각종 설전이 벌어질 때 식자들이 흔히 터트리는 불만 가운데 한 가지가 바로 ‘반지성주의의 만연’이다. 한국사회 전반의 반지성, 반엘리트주의를 지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특히 온라인이라는 공간이 그런 걱정의 소재를 공급해주기 쉽다. 누구나 글을 남기고 설전을 주고받으며 그것이 기록으로 축적되고 불특정다수에게 널리 퍼지는 속성 덕분이다.

먼저 반지성주의라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짚고 넘어가자. “지성과 이성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거나 지력으로 사물의 본성을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철학적 태도를 뜻하는 한편으로, 지식인에 대한 직접적인 반감과 불신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설명이 꽤 유용한데(이택광, ‘반지성주의에 대해’, 2007), 당연한 이야기지만 인터넷 따위보다도 훨씬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전자의 의미라면 합리성을 내세운 계몽주의 만능론을 경계하는 모든 종류의 사조들이 느슨하게 포함될테고, 후자의 경우라면 당대 사회에서 어떤 담론권력층에 대한 거부 일반이 엮여 들어가기 때문이다(엉터리 계시를 읊는 부패한 신관에 대해 몰래 험담을 하는 고대 이집트의 노예들을 상상해보라).

하지만 현실은 좀 더 회색이다. 온라인에서 미네르바라는 필명의 포럼 사용자가 경제 관련 전망을 내놨다가 오랜 법정싸움으로 곤욕을 치루며 오늘날 한국의 표현의 자유 보호가 얼마나 엉망인지를 여실하게 드러냈던 사건의 와중에 만들어진 ‘우리편 전문가’라는 키워드(자세한 함의는 http://weirdhat.net/xe/ahriman/35246 참조)가 담아내듯 말이다. 정말로 모든 종류의 지성과 지식인을 반대하며 때려 부수는 심오하고 근본적인(?) 무정부주의가 판친다기보다는, 그냥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이야기를 하는 당신을 반대하는데 당신이 하필이면 지성을 내세우고 있으며 ‘지식인’으로 간주되고 있을 뿐이다.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사람들은 어쨌든 좀 더 믿을만한 정보를 선별해서 수용해야 하는데, 그 기준이 깔끔하게 지성에 입각한 합리성인 것도 아니고 그 대상이 제도적으로 지식인이라 불리는 직업군에 속한 이가 아닐 수 있다는 정도다. 특히 직업군으로서의 지식인 부류들이 흔히 보여주는 문제인, 의미 전달을 희생하면서까지 분야 전문성에 대한 배타적 과시를 일삼는 언술행위(이를 블로거 저련은 ‘반일상언어주의’로 명명했다)가 만연하다보니 대중들에게 종종 외면받는데, 그것을 다시금 반지성주의로 섣불리 낙인찍는 악순환도 발생하곤 한다.

각종 온라인 토론에서 이성적 논쟁을 폄하하고 분야 전문가의 의견을 조롱하는 행위들을 손쉽게 ‘반지성주의’로 규정하기 힘들다면, 무엇이라고 봐야 하는가. 여러 해답이 있겠지만, 거시적 철학적 층위보다 한 단계 내려와서 파악해 보는 것이 가장 실용적인 접근법일 것이다. 필자는 그런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지적 평등에 대한 지향’이라고 본다. 지성의 화려한 정교함이 판단에 있어서 반드시 우월한 것이 아니고 지식인 직업군이 반드시 더 옳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발상을 반영하되, 많은 이들이 어떤 지향점으로 삼을만한 긍정적 가치를 변용하여 합쳐 넣은 규범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평등 지향이 다른 가치들, 예컨데 실제 이성적인 평가 기준에 의한 판단을 넘어설 정도로 강력하게 발현될 때다. 한층 전문적인 층위의 논의와 접점을 잃어버리고, 가장 말초적인 수준의 논의만을 거듭하게 만드는 최저사양의 평등이다. 혹은 온라인 하위문화에서 흔히 거론되는 ‘병림픽’, 즉 토론의 과정에서 흙탕물 싸움으로 번지며 자신의 옳음에 대한 증명은 포기하고 서로의 결점과 구차함을 경쟁적으로 과시하여 결국 이기든 지든 어차피 사람들에게 평등하게 조롱받게 되는 상태에 처하게 된다. 이런 진상질이 일상화되고 더욱 많은 토픽들을 잡아먹을수록, 건설적 토론 따위는 영영 안녕이다.

단순화에 대한 요구

최저사양 평등 지향이 발현되는 패턴으로 가장 쉽게 떠올릴 법한 것은 어려운 말에 대한 혐오다. 하지만 이것조차 그저 남의 말을 못 알아듣으니 싫어한다는 무지의 발로 또는 지식에 대한 반감이라기보다는, 내용에 대한 반론보다 말의 방식에 대한 환멸이 앞서는 것에 가깝다. 발언의 내용이 적합하지 않다는 분석이 아니라 그런 식으로 발언하는 것에 대해 먼저 조롱하고 들어가는 방식으로, “당신이 뭔데 그렇게 잘난 척 말을 풀어가고 있는가”라는 반감을 표시한다. 이것은 엇나간 엘리트주의에서 종종 보이곤 하는 “엘리트가 하는 말이니까 옳다”에 대한 반대급부라고 볼 수도 있는데, 주로 전문용어와 분야 내부의 룰을 가득 동원한 발언에 대한 반응으로 등장한다. 평등이란 대등한 판에서 대화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이 온라인 담화공간의 독자들을 – 즉, 나를 – 내려다보는 투로 뭔가 가르치겠다는 식으로 던지는가. 당신은 뭐가 그리 잘났기에 그러는가. 그리고는 당신이 잘나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한 여정이 시작된다.

내용보다 방식에 대한 환멸을 품기 위해 필요한 가장 기본적 전제는, 그 내용이 사실 별 볼 일 없다는 인식이다. 즉 사실은 간단한 이야기를, 일부러 권위를 챙기기 위해서 복잡한 척 수식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내가 내용을 못 알아듣는 것은 내용을 못 알아듣도록 쓴 사람의 잘못이 된다. 이런 패턴은 ‘반지성주의’를 개탄하는 사람들에게 손쉬운 대표적 사례처럼 받아들여지곤 한다.

물론 이것은 실제로 별반 대단할 것 없는 내용에 대단한 개념들을 동원해온 이들이 적지 않았기에 만들어진 패턴으로, 앞서 언급했던 반일상언어주의가 그런 폐단을 잘 표현하고 있다. 특히 그런 괴리는 대중문화 비평 영역에서 쉽게 지목되곤 했는데, 대중들이 아예 모르는 분야가 아니라 체감적으로 느끼는 부분과 식자의 담론 사이에서 쉽게 비교가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문화산업론과 포스트모더니즘 문화연구 접근법이 유행하던 90년대 후반에 넘쳐나던 ‘시뮬라크르’ 운운부터, 축제니 탈주니 욕망이니 하는 개념들로 지나치게 많은 개별 현상들을 환원하고자 했던 한일 월드컵 무렵의 시기를 넘어, 툭하면 ‘욕망과 쾌락’을 논하는 오늘날까지 계속 등장하는 모습들이다. 대중문화에 대해 체감하는 모습들을 고도의 추상성으로 환원한 후 그것으로 연역적 논리 조합을 해보고는, 정작 다시 체감의 층위로 재변환하는 훨씬 어려운 후반 작업은 방치하거나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이다. 자연과학의 논의가 필요한 영역에서는, 과학적 메커니즘과 세부 성분 등이 앞의 내용에서 추상성의 자리를 대신하곤 한다.

반일상언어주의, 그리고 그것에 기댄 딱히 별반 알맹이 없는데 권위만 가득했던 논의들에 대한 저항으로서 더 단순하고 명확한 말을 요구하는 것은 토론에 있어서 발전적인 방향이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의 절대적 지향처럼 요구될 때, 문제의 지점은 명확하다. 바로 논의에서 디테일이 날아가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안은 종종 전문적 영역의 디테일에서 판단되어야할 부분이 많고, 단순화시킨 결론보다는 세밀한 제한조건들과 뉘앙스가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런데 그런 세밀함을 위한 전문적 표현법들마저 배격의 대상이 되고 그런 표현을 한 이들에 대한 반감이 표출된다면, 논의의 단순화가 결론의 단순화, 즉 틀린 결론으로 이어질 뿐이다.

2008년 ‘광우병 파동’ 정국을 상기해보자. 과학 커뮤니티는 물론이고, 포털 게시판, 언론기사 댓글, 웬만한 취미 동호회 공간 곳곳에서 미국소가 위험하다는 호소가 즐비했던 시기인데, 간혹 반대 의견을 지닌 이들이 등장하곤 했다. 각국의 검역 기준이 어떻고, 발생 확률이 실제 어떻고, 감염 조건이 어떻고 하는 디테일을 어디선가 업어온 그들을 맞이하는 반응은, “그러니까 위험하지 않다는 것이냐? 각하의 알바냐?” 정도로 요약될만한 것들이 즐비했다. 특히 흔히 등장한 단순화의 백미는, “확률이라면, 걸리거나 안 걸리거나 50%다”라는 주장, 그리고 그것의 변형인 “걸리고 나면 확률은 100%”라는 내용이었다. 검역주권 논의와 과장된 공포가 분리되지 않고 섞이며, 결국 진지한 진전보다는 구호의 차원으로 퇴화하여 서로에 대한 소소한 말꼬리 잡기로 쉽게 귀결되었다. 결국 논의의 진전 없이 원래의 패닉 상태만 지속되었는데, 비슷한 수준의 패닉 속에서 지적 평등을 이룬 셈이다. 다른 질병이든 방사능 누출이든, 인지된 위험성은 높은데 위험의 평가에는 과학적 디테일이 필요한 사안이라면 언제라도 발견되는 패턴이다.

단순화에 대한 요구는 반일상언어주의를 통해 생겨나는 대화의 벽을 깨고 일상적 토론 참여를 하기 위한 중요한 요소다. 하지만 필요한 디테일을 날려가면서까지 단순화할 것을 요구한다면, 그저 가장 낮은 수준에서의 평등을 지향하는 꼴이 된다. 단순화하라고 윽박지르거나 조롱할 것이 아니라, 못 알아먹게 쓰여 있으니 논의에 포함시키지 못하겠다고 무시해버리면 만약 논의에 대한 참여 의지가 있는 발화자라면 어련히 알아서 더 쉽게 풀어줄텐데 말이다. 혹은 풀어줄만한 실제 내용이 없기에 그냥 그렇게 조용히 입을 닫거나.

‘솔직함’에 대한 숭배

최저사양의 담론 평등을 향해가는, 겉으로 보면 긍정적인 듯한 또 다른 가치는 바로 솔직함이다. 솔직함은 정직함, 위선 없음 등의 의미를 연상시키며 긍정적 가치의 뉘앙스를 획득한다. 솔직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신뢰를 사고, 설득력을 얻는다. 마치 걸친 옷을 벗고 목욕탕에서 대등한 사람 대 사람으로 서로를 털어놓는다는 주장처럼, 솔직함을 통해 대등한 기반에서 소통을 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이것 또한, 과도하게 숭배할수록 현실에서는 난감해지는 경우가 생겨난다.

솔직함에 대한 요구의 첫 번째 문제는, 가장 원초적인 것을 가장 솔직한 것으로 여기기 쉽다는 점이다. “평소에 식사를 하는 시간이 다가오는군요”보다는 “배고파”가 더 솔직하고, 그보다는 “밥 내놔”를 솔직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솔직하지 않은 표현법도 말의 의미의 일부라는 점을 놓치게 되는데, 앞의 예로 보자면 상대에게 강요나 부탁을 하지 않고 넌지시 알린다는 의미,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사람들 사이의 관계설정과 역할의 맥락들이 소실되고 그저 가장 기본적인 욕구의 전달만 남게 된다.

이런 요소의 연장선상에서 적절한 조심성을 가지고 받아들여야할 부분이 바로 지난 수년간의 막말 코드 히트다. 막말코드는 온라인으로만 보더라도 PC통신 시절부터 이미 오랜 전통이고, 멀리 마당극 전통까지 올라간다. 종종 유머와 궁합을 이루는데, 나우누리 유머게시판이든, 90년대 말엽의 딴지일보와 수세미일보 등 유머를 가미한 풍자신문들이든, 오늘날의 웃대, 오유, 일베 등의 웹 커뮤니티 게시판들까지 계속 이어져왔고, 한 해동안 시사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의 일대 붐으로 개가를 이뤘다. 물론, 근엄해야할 것 같은 미디어통로에서 저열한 어휘들을 터트림으로써 전복적 해방감을 느끼게 해주는 측면을 과소평가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막말은 원초적 솔직함을 과시하고 또 모두에게 그런 것을 요구하는 방식이기에, 강렬할수록 뉘앙스가 상실된다.

솔직함의 문제를 증폭시키는 것은, 사람들은 무언가를 주장 단위로 파악하기보다는 그것을 이야기한 사람 내지 사람들의 집합이라는 맥락 단위로 파악하기 좋아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인지 축약과정이며, 모든 발언에는 그래도 나름의 맥락이 있기에 옳은 방향이기도 하다. 그런데 갈수록 다양한 미디어 채널을 통해서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이 공개되는 세상이기에, 그 중 분명히 사람들이 더 ‘사적’이라고 믿으며 ‘솔직하게’ 발언하는 통로가 있다. 그럴싸한 대기업 중견간부고 예의바른 신사 취급 받지만, 포털에 익명 내지 무의미 필명으로 악플을 달 때는 더 솔직하게 변할 수도 있다. 혹은 누군가는 트위터라는 거대한 공개 대자보를, 사적 매체라고 착각하며 생각 없는 푸념을 늘어놓기도 한다.

이런 세상에서 발언 단위가 아니라 사람 단위로 평가하다보면 문제가 생긴다. 어떤 찌질한 일면이 있으면, 사람 자체가 찌질한 사람이 되어버리는데, 문제는 누구나 그런 일면 한 개 이상씩은 있다는 점이다. 이런 세상에서 무조건 솔직함을 요구하는 것은, 누구나 사실은 찌질하다고 인정하라는 것이 된다. 내가 찌질한 만큼 너도 찌질하며, 결국 솔직함을 요구하는 것이 곧 그 확신의 증명 시도로 건너 뛰어버린다. 말 안의 함의를 찾는 것이 아니라, 사실 이 사람은 이런 식으로 저급한 발언을 한 적이 있고 그렇기에 너도 나도 평등하게 저급하다는 최종결론을 향해 달려 나간다.

솔직함에 대한 숭배가 가져오는 문제는 앞서 꼽은 세부 뉘앙스의 소멸 말고도, 솔직하지 않더라도 이성적으로 옳은 것에 대한 배격에 있다. 예를 들어 사회 윤리적 규범에 대한 준수 같은 것들 말이다. 온라인에서 남성을 옹호하고 여성을 무시하는 과격한 언사로 크고 작은 화제를 불러온 단체 ‘남성연대’의 넘쳐나는 솔직함이 좋은 예다. 남성연대의 수장격인 성재기라는 필자가 트위터상에서 남겨온 발언들은 “생리통이 그렇게 힘들어? 운동하고 병원가면 괜찮다. 그리고 결혼해라. 유부녀에게 생리통은 현저히 줄어든다” 류의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이 정도의 자기 편의적인 차별적 생각을 품어본 남성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을 솔직하게 발언해버리는 순간 사회적 규범으로 지켜야할 최소한의 상호존중이 무너진다.

드러내지 않고 잘못된 인식을 간직하는 것보다는 드러내서 부딪히고 수정하는 것이 낫다는 인식도 있겠지만, 현실은 좀 더 난감하다. 우선 많은 경우, 드러내지 않은 상태에서 수정해 나갈 수도 있다. 또한 드러냄으로서 수정을 하기보다는, 마찬가지로 생각이 잘못 되어먹은 자기편을 결집해서 자기 확신만 강화할 위험도 있다. 특히 대결의 과정에서 승리를 위해 그냥 자기 입장을 강화하게 되는, 숙의의 역설이 발생할 수 있다(숙의와 의견 양극화라는 토픽에 좀 더 관심 있는 사람들은 선스틴의 양극화 주장, 그리고 피쉬킨이 반론으로 제기한 제한조건들을 찾아보시길 추천한다). 솔직함은 평등을 부르는 멋진 가치일 것 같지만, 그것을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요구할 경우 단순화와 이성적 옳음에 대한 경시로 이어지며 결국 논의의 질을 떨어트린다. 그래서 결국 평등을 부르기는 하지만, 그것은 최저사양에서의 평등이다.

무학의 통찰 대 데이터 만능

최저사양 평등을 부르는 길에는 논거에 대한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두 방향의 왜곡된 인식이 있다. 하나는 통찰에 대한 과신이고, 다른 하나는 자료의 존재가 곧 증명의 완료라는 인식이다. 통찰에 대한 과신은 딴지일보 총수로 유명세를 얻은 김어준의 표어 ‘무학의 통찰’이 뚜렷하게 드러내준다. 유용한 통찰은, 단지 직관적으로 이렇다고 생각하면 그게 옳다는 것이 아니다. 한 분야에 대해 전문적 식견을 쌓다보면 인지처리의 일부가 자동화되어, 그 분야의 어떤 과제에 대해서 몇 가지 변인과 조건들만 보고도 비교적 빠르게 그것들이 작동하는 방식을 파악해내는 가설을 구축하는 것이다. 통찰은 모든 것에 대해 옳은 방향으로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때까지 쌓아온 전문성에 입각했을 때 가장 그럴듯한 가설인 것일 뿐이고 진리가 아니다. 결정적으로 통찰이란 언제나 그럴듯한데, 현실은 별로 그럴듯하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 반대편에는 자료의 존재를 증명의 완료로 생각하는 오류가 있다. 내가 주장하는 바와 합치하는 자료가 있다면 곧 주장이 증명된 것이라는 인식이다. 이것이 오류인 것은, 언뜻 볼 때는 그럴듯하지만 하나의 중요한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 바로 그 자료의 타당성과 신뢰성 말이다. 타당성은 “자료가 원래 대답을 찾고자 하는 질문에 대한 것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가”, 즉 엉뚱한 내용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닌지에 대한 가치다. 신뢰성은 “자료가 충실하게 잘 측정 및 기록된 것인가”, 즉 믿을만한 품질의 자료인가에 대한 가치다. 문헌을 찾는 것 자체는 이런 부분을 자동으로 해결해주지 않기 때문에, 자료 작성의 맥락 및 상충하는 자료들 사이에서의 비교 평가 등이 필요한 것이다. 그럼에도 맥락에 대한 탐색 없이 그저 특정한 사실의 기록을 찾아서 제시하는 것만으로 상대를 무너트릴 논증을 해냈다고 착각하는 것이 각종 온라인 토론에서 흔하디 흔하다. 특정 사료가 더 많은 데이터 속의 어떤 편향된 일부일 수 있고, 데이터 형성과정에 개입할 수 있는 문제를 무심결에 혹은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말이다. 특히 사료의 발굴이 중요한 역사 관련 토픽이 이런 문제에 빠지기 쉬운데, 디씨인사이드 역사갤러리 등에서 현대사의 논쟁적 사안들에 대해 공과를 가리며 발생하곤 한다(예를 들어 몇 년 전, 북한의 국공내전 참전 방식에 관해 유명 극우 블로거가 논쟁을 제기했다가 차분한 반론 속에 자의적 자료 인용이 드러나며 얼렁뚱땅 마무리지어진 사건이 있었다).

통찰에 대한 과신은, 여느 전문분야의 성곽을 쌓은 이들이 아니라도 훨씬 쉽고 직관적으로 진리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이기에 지적 평등의 꿈을 희망하게 해준다(실제 유용한 통찰에는 정작 상당한 분야 전문성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쉽게 무시당하거나, 통찰으로 보이는 것을 내는 행위 자체를 전문성의 증거로 착각한다). 반면 자료의 존재로 증명을 완료한다는 생각은, 결정적 자료 하나만 찾아내면 누구나 논증을 해낼 수 있다는 희망으로 지적 평등을 꿈꾸게 한다. 최악의 결합은 음모론인데, ‘통찰’로 먼저 그럴듯한 시나리오를 제시하고, 그것을 증명하겠다면서 유리한 내용이라면 아무 데이터나 긁어모으며, 설득력을 올리겠다면서 시나리오의 오류를 수정하거나 정교화하기보다는 그저 던져놓는 데이터의 양만 무작정 늘리는 것이다. 다문화와 관용이 싫다는 자신의 미숙한 극우인종주의를 변론하기 위해, 노르웨이의 청년 브레이빅은 유럽의 역사를 운운하는 1500페이지짜리 책을 써냈다. 그리고는 청소년 캠핑장에 가서 총기 난사 살인을 저질렀다.

통찰이 나쁘다거나 데이터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마구 던져놓고는 진리를 가장하는 통찰, 맥락이 제거된 데이터가 문제다. 통찰을 통해서 그 다음으로 증명할 가설을 찾는 것을 포기하면 안 되고, 논증에서 팩트 자료의 중요성을 폄하하는 우를 범하면 안 된다. 한쪽에 푹 빠지면서 평등한 논의의 장을 꿈꾸는 것은, 쉽고 그럴듯한 가설 수준에서 함께 만족하는 최저사양 평등이고 자료의 두터운 검토 없이 대충 떡밥에 만족하는 최저사양의 평등이다.

평등은 차이를 인정함을 명심하기

이 연재에서 항상 강조하는 바는, 이런 문제점들은 특정인들의 종 특성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 모두에게 잠재되어 있고 부적절한 소통환경에 처하면 언제든 발현될 수 있으니 발병을 통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특히 일면 긍정적 가치가 있다면 더욱 스스로 경계해야 한다. 최저사양 평등지향 역시, 평등한 소통이라는 미덕을 위해 논의를 최저사양으로 굳혀버리는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

우선 단순화에 대한 요구는, 쓸데없이 어렵게 만든 것으로 보이는 내용을 단순화시켜달라고 할 것이 아니라, 좀 더 단순한 설명도 더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으로 방향을 살짝 바꿔보는 것이 어떨까 한다. 복잡한 풀버전을 폄하하지 않고, 쓸만한 이야기면 더 노력해서 그쪽도 볼테니 우선 중간버전을 만들어주면 고맙겠다는 제안 말이다. 사실 그런 기법이 어떤 형태로 발현될지, 이미 흔히들 알고 있을 것이다. 바로 ‘3줄 요약’이 그런 것이다.

솔직함에 대한 숭배는, 그냥 버리면 된다. 아니 제발 버리라고 호소하고 싶다. 솔직함은 별로 대단한 가치가 아니다. 진정성과 진심만큼이나 대단할 것 없는 가치다. 솔직함의 유머 효과를 오락 차원에서 즐기는 것은 나쁠 것 없고 정서적 흡입력을 부정할 이유도 없지만, 건설적 토론 내용에 있어서 솔직함이 기여할 부분은 많지 않다. 그 대신 일관성이라든지 반응성 같은 가치들을 요구하는 것이 낫다.

통찰의 문제는 간단한 어림기준법을 하나 기억하면 된다: “통찰은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지다. 하지만 통찰이 가장 중요하다고 외치면, 틀렸다.

결국 논의에서의 평등 역시 여느 평등과 다를 바 없이, 모두 똑같아야 한다는 강요가 아니라 다양성과 차이를 인정해야 성립된다. 논의의 전문성 수위라는 차이도 말이다. 어떤 짜증나는 멍청이라 할지라도, 정말 잘 아는 전문분야가 하나쯤은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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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교양지 자음과모음R 연재. 합리적 담론 형성을 가로막는 찌질한 진상질 패턴을 계열화, 반면교사 삼는 일종의 서바이벌 가이드.)

Copyleft 2012 by capcold. 이동/수정/영리 자유 — [부디 이것까지 같이 퍼가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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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thoughts on “지적 평등의 지향, 최저사양의 평등 [온라인진상열전 / 자음과모음R 2012 겨울호]

Comments


  1. 많이 공감하고 갑니다. 최저사양의 평등을 추구하기 위해 상대방을 부정하려 하는 반지성주의가 횡행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자신의 위치가 ‘최저사양’에 있지 않다고 주장할 수 있는 ‘지성’을 개개인이 갖추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전 파시스트일까요? 사람들이 좀 더 멍청했으몀 좋겠다는 생각을 가끔합니다.

    • !@#… 손님/ 말씀의 취지는 저도 공감하지만, 지금보다 사람들이 더 멍청해지면 인류의 생존이 어려워집니다(핫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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