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망의 2회…라고는 하지만 계간이다보니 지난 회가 언제적이었더라. 게다가 마감과 발간 사이의 텀도 좀 되고, 발간 후 여기 공개 사이의 지연도 길어서 따끈한 시사적 이야기는 애초에 곤란한 연재. 여튼 지난달 나왔던 자모R 여름호 글.
[온라인 진상열전] 방패가 민폐: ‘실드’의 허망함
김낙호(미디어연구가)
자신의 클론들로 온 세상의 인구를 대체하지 않는 한(아니 설사 그렇게 하더라도), 온라인상에서 오가는 각종 의견 표명과 토론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마주치게 되는 상황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자신이 지지하는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에게 비판을 당하는 것이다. 더욱 열렬하게 지지하는 대상일수록, 그에 대한 비판은 내 선호가 잘못되었음을 알리는 수준을 넘어 아예 나에 대한 비판처럼 인지되기 쉽다. 그런데 자신에 대한 비판을 달게 받아들이는 것은 많은 훈련을 필요로 하는, 전혀 자연스럽지 못한 행동이다. 따라서 그런 비판이 잘못되었다고 변호를 나서는 경우가 일상에서 흔하게 나타난다. 특히 이치로 볼 때는 전혀 변호할 만한 내용이 아닌, 즉 비판받을 만한 내용에 대한 비판임에도 불구하고 변호가 이뤄지기도 한다.
그런 변호 행위가 내면적으로 이루어지면 그냥 고집불통이라는 성격으로 규정될 뿐이다. 하지만 외적으로 적극적으로 변호를 나설 때, 그리고 그런 변호의 내용에 결점이 적지 않을 때 폄하하여 부르는 온라인 속어가 바로 ‘실드 치기’다. 게임 등에서 유용한 특정 유닛을 보호하기 위해, 방어에 특화된 다른 유닛이 붙어서 자신의 에너지를 소모시키며 공격 피해를 막아내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말이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지극히 소모적인 공방을 연상시키는데, 아니나 다를까 토론의 흐름 속에서 실드 치기는 역기능적 결과가 많다. 변호의 과정에서 오히려 자신이 변호하려는 대상의 결점을 더 선명하게 강조하게 된다든지, 진영논리에 휩싸여 사회적 인식력의 밑바닥을 드러내든지, 아예 비판자와 실드객 사이에서 진흙탕 인신공격 다툼이 벌어진다든지 말이다. 물론 이런 패턴은 온라인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온라인에서 더 많은 이들이 쉽게 솔직한 의견을 내밀며 앞장설 수 있고, 그 결과 실드치기를 하다가 망가지는 광경 또한 더 빠르게 이루어지며, 널리 퍼지고 자료로 축적된다.
건설적인 담론 전개가 좌절되고 당사자들도 체면을 구기는(그들이 그렇게 인지하고 있는가는 별도의 문제다) 실드 치기 패턴을 몇 가지 유형으로 묶어 살펴보고, 조금이나마 그런 함정을 피해가기 위한 제안을 하고자 한다.
피장파장 실드
이치에 의한 반론이 아닌 실드 치기 수준인 변호의 가장 직관적인 패턴 가운데 하나는 바로 피장파장이다. “비판하는 너도 잘못했잖아”라는 접근법인데, 손쉽게 동원하고 싶어지는 장점이 여럿 있다. 첫째는 바로 비판 내용에 대해서 세부적으로 반박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너네 엄마 못생겼어!”에 대해서 “너네 엄마도 못생겼어!”라고 응답하는 것에는 못생김을 딱히 반증할 필요가 없다. 비판의 타당한 부분 부당한 부분 등을 분석하고 각각에 대해서 이치로서 대처하지 않아도, 그냥 상대방도 마찬가지라고 함께 먹칠하면 충분하다. 둘째는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싸움의 논리에 적합하다. 방어를 한 후 다시 공격을 하는 두 단계를 거치며 논리와 순발력을 소모할 필요 없이, 상대가 자신의 공격을 날리고 따로 다음을 대비할 겨를도 없이 곧바로 상대에게 화살을 되돌릴 수 있다. 프리스타일 랩 대결이든 백분토론이든, 공격적 환경에서 유용하다. 셋째는 바로 네거티브의 편리함이다. 이쪽이 당신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훌륭하다고 증명하는 과정보다, 상대 또한 같은 비판의 잣대에서 완벽하지 않다는 것만 보여주는 것이 훨씬 간단하다.
피장파장 실드의 기본형은, 결점의 정도 차이는 무시하고 단지 결점의 여부만을 공략하는 것이다. “불법 정치자금을 썼다” “너도 썼잖아”라는 과정에서는, 각자 얼마씩 썼다는 부분은 관심의 후순위로 밀려난다. 하지만 좀 더 근거로 삼을 만한 것이 있을 때는, 응용형으로 “네놈들이 더 심하다” 방식을 쓰기도 한다. 대체로 중고등학교 논술에서 배우듯 피장파장 논법의 문제는 상대의 오류를 발견한다고 해서 애초의 내 오류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인데, 진영으로 가르고 승부를 생각하는 마음은 그런 논리적 장치로 움직이지 않는다. 저쪽을 거꾸러트리면 어쨌든 이쪽의 승리다.
19대 총선 직전에 KBS 새노조의 대량 문건 폭로와 함께 부각된 불법사찰 정국(‘사찰게이트’)는 첫 등장 당시에는 여당 세력에 절대적으로 불리한 소재였으나, 그 후 공개된 문건 가운데 80% 가량이 노무현 정권 당시 작성된 것임이 드러났다. 물론 내막은 공개한 대량의 문건 가운데 이전 정권의 합법적 내부 감사 문건들이 있었고 현 정권의 민간인 불법사찰 등의 증거가 한꺼번에 섞여 있었던 것이었지만, 폭로 당시 그런 내용 분류 없이 급하게 “사찰문건 수 만건 공개”라고 발표를 해서 상황이 그렇게 흘러간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일보 기사 등을 소재로 하여 온라인 곳곳의 보수-수구성향 사용자들이 “노무현 정권도 사찰했다”라는 피장파장 실드를 펼쳤고, 온라인 공간의 토론 분위기를 과거 정권이 사찰을 얼마나 했는가라는 공허한 공방전으로 분산시켰다.
당장의 대처를 위해 피장파장 실드는 유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결점을 막아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과 결점의 상대적 격차를 줄이는 행위에 불과한 만큼, 자기 진영에 쏟아지는 상대적 비난의 강도는 줄일 수 있어도 결국 전체 판에 대한 혐오를 부르고 만다. 피장파장으로 얼룩진 진흙탕 싸움의 다음 단계는,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 계속 해봤자 뭐하나’일 뿐이다. 관심과 참여로 판 전반이 더 비옥해지는 것은 물 건너가고, 좀 더 극단화된 내부자들만의 결투만 지속된다. 그 속에서는 불법사찰의 책임과 해결방안에 대한 논의는 사라지고 없으며, 그렇게 열띠지만 얄팍한 분위기에서는 불법사찰 금지법 같은 괴상한 논지가 실제 정계에서 나온다한들 진지한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잠시의 비웃음거리로 전락한다.
다만 얄궂게도, 이런 것은 판 전체에 대한 혐오에서 이득을 얻을 수 있는 이들에게만큼은 별반 문제가 되지 않는다. 혐오와 관계없이 높은 고정참여 지지율을 지녔다든지(예: 특정 대형정당), 혐오를 통해서 참여를 낮춰 아예 결정을 무화시키는 쪽이 더 유리하다든지 말이다(예: 수많은 개혁 입법).
프레임에 말려들지 말자 실드
실드 치기에 있어서 가장 야심찬 접근법이라면, 제기된 비판을 계속 논하는 것 자체를 터부시하기다. 공격을 막아내는 것이 아니라 아예 공격을 못하게 하는 것보다 더 완벽한 방패막이가 어디 있겠는가. 이 접근법은 기본적으로 진영논리와 궁합이 매우 좋은데, 우리 편이 이기는 것이 지상 과제이기 때문에 괜히 힘 빠지게 비판을 논하지 말자는 논리가 된다. 비판이 우리 편(정확히는, 논의를 막아버리고자 하는 이가 우리 편이라고 임의로 설정한)에서 나온 것인 경우는 “눈 앞에 거악이 있는데 우리끼리 분열하면 되겠는가” 정도의 비논리적이면서도 정서적 호소력이 있는 메시지로 적당히 떼울 수 있다. 하지만 비판의 근거를 만들고 논의에 불을 붙인 것이, 아무리 해도 우리편 운운하며 무마할 수 없는 상대 진영이라면 어떻게 막아낼까. 편리하게도, ‘프레임’이라는 개념을 끌어다 쓰는 것이 유행을 타게 되었다.
프레임이란 원래 심리학 용어인데, 문자 그대로 인식의 ‘틀’을 지칭한다. 사람은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상황들에 대한 인식을 좀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해내기 위해서 좀 더 단순화된 공식화를 하곤 한다. 그리고 그 공식이 잣대가 되어, 관련된 사례를 만나거나 유사한 일을 당했을 때 상황을 해석하는 기준이 된다. “물의 수위가 컵의 절반에 있으면, 컵은 반쯤 찬 것이다”라는 긍정프레임을 장착한 사람이라면, 컵에 물이 담긴 여러 사례를 볼 때마다 웬만하면 차있는 쪽으로 보는 인식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논하는 프레임은 그 개념을 커뮤니케이션학에서 이어받아 사용하는 것에 가까운데, 바로 누군가의 특정한 소통전략을 통해서 유도된 사고틀을 말한다. 즉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 대해 인식하는 사고틀은 그 상황을 알려주는 말들의 수사법이나 제시 형태 등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고, 그렇게 사고틀 형성에 개입하는 행위를 프레이밍이라고 부른다. 원래는 거의 학계에서만 통용되곤 하던 개념이었지만, 지난 대선에서 큰 주목을 받았던 책 [코끼리는 생각하지마](조지 레이코프 저) 덕택에 한국의 주류 정치담론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당장의 생활 정책 입안 여부보다 거창한 정치세력 구도 대결을 논하기 좋아하는 ‘포장마차 책사’들이 넘치는 한국의 정치담론 환경 속에서, 프레임은 금새 일상용어로 거듭나게 되었다.
레이코프의 프레임론 가운데 가장 명백하게 히트를 친 개념은 바로 적들이 만들어놓은 프레임 안에서 경쟁하면 이미 진 것이라는 부분이다. 예를 들어 세금감면을 ‘세금구제’라는 수사법으로 포장해서 보편화하면, 세금은 자동적으로 악한 것으로 위치지어지고 증세를 논하는 이들은 이유의 정당성과 관계없이 기본적으로 악의 편에서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 사례의 구체성과 관계 없이, 일상 대화에 남는 교훈은 여하튼 남의 술수에 말려들지 말라는 정도다. 그런 단순화된 논지가 바로 “너희가 그런 비판을 하는 것 자체가 적들의 프레임에 놀아나는 것”이라는 인식이다. 이것이 바로 ‘프레임에 말려들지 말자 실드’다.
19대 총선 직전의 혼란 속에서 소위 김용민 막말 파문이 터지면서, 이 실드는 특히 기승을 부렸다. 인터넷방송 ‘나는 꼼수다’를 통해서 모은 인기를 바탕으로 지역구에 출마한 김용민 후보가 비교적 무명이었던 과거 시절에 인터넷 성인방송에서 뱉은 지극히 양식 없는 발언들이 선거운동 막바지에 재발견되어 화제를 모은 사건이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보수 언론들은 질타를 했는데, 상황 수습에 있어서 여러 주체들이 방향이 엇갈렸다. 우선 후보자 본인은 명백한 결점임을 인식하고, 곧바로 공식사과를 했다. 반면 정작 그를 공천한 민주당은 대처능력의 부재를 드러내고 우왕좌왕하며 이슈장악력을 잃었다. 그런데 또 하나의 흐름은 그의 지지자들 가운데 생겨났는데, 바로 실드치기에 들어간 것이다. 정치 발언이 비교적 쉽게 널리 알려지곤 하는 김용민 지지 인사들인 서영석, 탁현민이 남긴 트윗이 좋은 사례다.
“경향신문이 또 김용민 후보 사퇴하라고 초를 치고 있네요. 조중동 프레임에 가장 약한쪽이 조중동 이외의 신문과 기성정치인들이죠! 사퇴불가!” – 서영석 (전 서프라이즈 대표) 트윗
“가장 당연한 건, 잘못이 아니라는 것. 요 몇일 조중동과 새대가리당은 김용민 발언을 여성폭력, 성폭행(?)의 프레임으로 끌고 가려합니다. 그러나 이 발언은 전쟁광들에 대한 천박한욕설이었습니다” – 탁현민 (공연기획자) 트윗
서영석의 발언은 프레임에 대한 가장 두루뭉술한 동원으로, 원래의 의미인 사고틀보다는 그냥 주장 일반을 이야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조중동이 주장하면 신문들과 기성 정치인은 그냥 넘어가니까 그들의 오염된 이야기는 전부 무시하라는 논지다. 즉 김용민 사퇴라는 논의를 하는 즉시 이미 그들에게 굴복하는 것이니 아예 생각하면 안된다는 단호한 주장이다. 반면 탁현민의 발언은 좀 더 프레임의 원래 의미에 가까운 부분이 있다. 김용민의 발언은 사실은 전쟁광들에 대한 욕설인데, 그것을 적들이 성폭력이라는 사고틀로 보도록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김용민 후보 발언의 실제 문제 여부를 차치하고서라도 양쪽 모두 쓸 만한 변론이 아니라 실드치기 수준에 머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미 발동한 프레임은 그것에 말려들지 말라고 지적해봤자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그것이 바로 [코끼리는 생각하지마]라는 제목의 의미이기도 하다). 사안이 주어지는 한, 사람들은 그것을 인식할 사고틀을 사용하여 그 안에서 긍정이든 부정이든 판단을 한다. 그렇기에 새 프레임으로 덮거나, 화제 자체를 누그러트릴 수 밖에 없다. 엄밀하게 말해서 탁현민의 발언은 당초 김용민의 발언에 전쟁광들에 대한 욕설이라는 새 프레임을 씌우려는 시도이기는 하다. 하지만 발언에서 직접적 용어로 강간살해를 운운하여 언어적 성폭력을 가하고 있는 만큼, 단순한 재해석만으로 말 자체의 임팩트를 도저히 덮을 수 없다. 그렇다고 위 발언들이 화제 자체를 덮는 것에 효과를 발휘하는가 하면, 오히려 역효과다. 어차피 매일 새로운 커다란 이슈가 터질 수 밖에 없는 선거 막판 정국이라면, 빠르고 철저한 대처로 완전한 결말을 맺는 것이 그 화제를 잊히게 만드는 가장 편리한 방법이다. 후보자 본인은 그 방법을 택했는데, 실드를 치는 지지자들이 오히려 화제의 생명력을 늘렸다. 실제로 당시 뉴스 보도들을 검색하면 물의를 빚은 발언내용 자체의 반복보다는 계속되는 논란에 대해 쓰는 뉴스기사와 게시판 포스팅들이 훨씬 많고 오래 지속되었다.
이 즈음에서 일상용어에서 프레임이라고 부르며 마구 혼용하는 세 가지 세부 개념들을 살짝 분리해서 살필 필요가 있는데, 사고틀 유도로서의 프레이밍(framing), 어떤 소재를 논의할지 걸러내는 의제설정(agenda-setting), 그리고 어떤 소재를 떠오르게 만들지에 대한 프라이밍(priming)이다. 보수-수구 진영은 공격하기 위해, 지지자들은 실드치기를 위해서 계속 막말 파문을 의제로 설정한다. 그 과정에서 김용민이라는 후보는 자동적으로 막말파문을 떠올리게 하는 프라이밍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사고틀인 프레임 자체는 비단 성폭력이냐 아니냐 틀이 아니라도, 최소한 ‘막말의 부덕함/괜찮음’이라는 프레임에 묶여 있다. 그런데 그간 강용석 의원, 그리고 그 전에 여러 정치인들 – 예를 들어 유인촌 전 문화부장관 – 사례에 있어서, 막말은 필요에 따라서 어느 진영에서든 못난 정치인의 상징으로 강조되어왔던 방식이다. 다시 말해, 프레임에 말려들지 말라는 실드치기가 불리한 프레임에 말려들게 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것이다.
프레임에 말려들지 말자 실드는, 만약 성공할 수만 있다면 논쟁 자체를 악으로 치부하는 강력한 방어력을 지닌다. 하지만 정말로 말려들지 않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그냥 일갈을 하는 것보다는 훨씬 강력한 담론전략을 필요로 한다. 아니면 정말로 우리 편 내부의 지지적 목소리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을 적들의 계략으로 치부하고 귀를 닫는 자멸적 아집에 그냥 만족하며 살거나.
다른 미덕이 있다 실드
다른 미덕 실드는, 비판을 받은 문제 지점은 받아들이지만 다른 긍정적 가치가 있으니 비판을 상쇄하겠다는 시도다. 미덕 실드를 위해서는 우선 정말로 미덕이라고 내세울만한 어떤 가치가 있어야 하는 만큼 적용할 수 있는 대상이 한정되어 있지만, 만약 성공할 수 있으면 상당한 감동을 주기도 한다. 깎아내리려던 비난꾼들이 몰랐던 훌륭한 일면을 보여주면 박해받는 선인의 이미지도 강조되고 얼마나 좋은가. 게다가 남을 공격해서 깎아내리는 부정적 이미지도 적은 기법이다. 그런데도 그럴듯한 변론이 아니라 실드치기로 꼽는 것은 사실은 제시한 미덕이 비판을 상쇄할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내세운 미덕의 가치 문제 가운데 가장 난감한 것은, 비판 상쇄를 위해 발굴한 다른 미덕이 자기들에게나 미덕일 때다. 지역구 후보 경선 과정에서 이정희 선거본부가 조직적 부정행위를 했음이 드러나자, 여러 지지자들이 많은 아쉬움을 표시했다. 블로거 산하가 정리했듯(클릭) 이정희를 믿는다거나, 그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아야한다는 식의 미덕 제시가 많았다. 그런 정서를 뚜렷하게 압축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한겨레신문 허재현 기자의 발언이다.
“이정희 재경선 발표. 이유 불문하고 사과. 관련자 문책. 통 큰 정치인 같네요. 마치 노무현 전 대통령을 연상시키는군요.” – 허재현 (한겨레신문 기자) 트윗
통 큰 정치인이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연상시키는 것을 미덕으로 제시했는데, 과연 이것이 노무현 향수에 젖어있는 이들 말고 다른 이들에게도 가치가 있는 미덕일 것인가. 그것도 심지어 결국 후보를 사퇴하기 이전, 재경선을 하자는 당혹스러운 제안(시험 부정을 하다가 걸렸으니 재시험을 치루게 해달라는 논리다)을 했을 때 남긴 칭송이다. 부정에 대한 책임을 지고 후보 사퇴와 재발 방지를 강구하는 것이 문제에 대한 대처인데, 엉뚱한 정서적 미덕을 제시하고 있다.
혹은 장점으로 내세운 미덕이 그 앞의 것을 전제로 할 때에나 성립될 수 있을 때 더욱 난감해진다. 같은 사건에 대해 높은 호응 속에 널리 퍼진 @mindgood(백찬홍)의 트윗이 좋은 예다.
“박지원, 썩어빠진 민주계 의원 하나 지키려고 이정희를 희생양으로 삼나. 김희철 같은 인간들로 꽉 찬 민주당이 4년내내 헤맬 때 이정희는 온몸으로 저항하며 MB정권에 맞섰다. 이정희의 눈물을 기억한다면 아무 소리나 내뱉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온몸으로 저항하며 MB정권에 맞서는 것은, 사회 진보의 목표인 더 나은 민주제를 가꾸어 나가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대의제를 지탱할 후보 선출과정의 공정성은 민주제의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다. 바로 그 전제를 왜곡했다면, 실드를 위해 동원한 미덕 자체가 애초에 성립하지 않는다.
이보다도 한층 민감한 것은, 미덕은 미덕이지만 상쇄할 수 없는 별개 영역의 문제인 경우다. 이미 많은 논의가 이루어진,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이 선거 과정에서 후보 단일화를 했던 인사에게 사후에 비밀리에 거액의 자금을 전달하여 기소된 사건이다. 비판을 받는 지점은 물론 돈을 주었다는 것 자체고, 이것이 사후 매수로 간주되어 법정에서도 유죄가 인정되었다. 반면 이것과 관련해서 발굴된 미덕이란, 이전의 다른 사례들로 미루어 보건데 정말로 누군가를 돕기 위해 선의로 거액을 내밀 수 있는 인격의 소유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지지자들이 그런 인격을 바탕으로 무죄를 주장하고자 했다.
하지만 후자의 미덕으로 전자의 문제를 상쇄하고자 하는 것은 실드치기의 수준을 벗어날 수 없는데, 인품이 뛰어나다는 개인적 미덕은 선거 경쟁자에게 비밀리에 돈을 증여했다는 공적 문제 소지와 전혀 별개의 차원이기 때문이다. 공직 유지 여부와 관련된 유무죄 판단은 오로지 후자의 차원에서만 이루어지며, 이 사건이 만들어낼 판례를 생각할 때 매수의 의도성을 더 중시하느냐 매수라는 결과를 더 중시하느냐가 기준이다. 인격의 미덕은 유무죄가 아니라 “좋은 사람이다”라는 평가를 하고자 할 때나 유효하다.
잘못이 아니다 실드
이런 저런 머리 회전이 다 귀찮다면 그냥 직구 승부를 할 수도 있는데, 바로 비판에 대해서 “그것은 잘못이 아니다”라고 우기는 것이다. 여기에는 다시금 두 가지가 가능한데, 하나는 잘못의 기준은 인지하되 거기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예 문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사람 이름을 복사기 브랜드와 합친 ‘문도리코’라는 별명으로 통칭되기에 이른 문대성 새누리당 의원 당선자의 박사논문 표절 사건에 관하여 이런 실드질이 여럿 등장했다. 문대성의 논문 지도교수였던 윤상화 교수의 변론이 전자에 해당되고,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이 후자에 해당된다.
먼저 윤상화는 언론 보도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고 한다.
(…) 별도의 입장 자료를 통해 “문 교수의 논문과 김 박사 논문 사이에 비슷한 부분이 일부 있으나 이는 이론적 배경 부분이고, 이마저도 일반적 이론, 즉 논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사용된 상식 수준의 내용”이라며 “연구대상과 방법, 결과, 결론이 모두 상이한 논문을 표절이라고 주장하는 건 정치공세에 불과하다” (문대성 반박 “논문 표절 의혹, 야당의 추악한 정치공세”. 뉴스1. 2012.03.27)
즉 논문의 표절이라는 행위는 문제지만, 문대성의 논문은 표절 수준은 아니라는 실드치기다. 하지만 이론적 배경 부분도 비슷한 수준이 아니라 문장 단위로 복사했고, 연구대상과 방법, 결론 등에 있어서도 충분히 유사함을 학위를 수여한 대학의 심의기구 재심 결과 드러났다. 잘못의 기준은 있지만 그 정도는 아니라는 변론은 종종 전문성의 영역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문외한들이 그것이 정당한 변론인지 무리한 실드치기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은 경우가 발생한다. 그 지점을 효과적으로 공략할 경우 실드치기의 성공 가능성이 생기는데, 만약 사안이 많은 사회적 주목을 받거나 기타 이유에 의해서 다른 분야 전문가들의 관심과 참여를 끌게 될 경우 돌이킬 방법 없이 망가진다. 실드치기를 행한 사람의 주장이 부정될 뿐만 아니라, 그의 전문성 자체가 부서지기 때문이다.
좀 더 안면이 두껍다면, 아예 잘못이 아니라고 좀 더 질러볼 수도 있다. 보수-수구성향의 김대중 조선일보 논설위원의 발언이 좋은 예다.
“논문 표절의 경우는 그가 학자가 아니고 체육인 출신이라는 점 등이 확인되고 고려돼야 한다. 그런데도 당 차원의 조사도 없이 일개 비대위원의 주장에 의해 정당인의 사형(死刑) 격인 출당을 먼저 거론하는 것은 지극히 경솔하거나 경박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김대중, 기사회생에 기고만장한 새누리당. 조선일보. 2012.04.17)
체육인 출신이니 잘못이 논문표절은 출당을 거론할만한 큰 문제가 아니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무슨 출신이든지간에 학술논문을 쓸 때는 표절이 가장 큰 죄악 가운데 하나고, 교수라는 직종의 기준에서는 학술논문에 있어서 부정이 발생하는 것이 가장 큰 결격 가운데 하나다. 즉 체육인 출신이라는 점은 드러난 잘못에 대해서 아무런 영향을 발휘하지 않는다. 그저 엉뚱한 맥락을 동원하여 별 잘못이 아닐 수 있다는 실드치기를 시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 확신에 찬 문체로 주장을 펼치고 있다. 논란의 시기, 이런 체육인 논리는 우익 편향 의견이 강한 편인 온라인 게시판 공간에서 한국식 엘리트 체육인 양성 방식에 관한 현실론과 결합하며 흔히 재생산되었다.
‘잘못이 아니다’ 실드는 당당함이 생명이다. 너무나 당당하게 우기면, 다른 사람들도 그런가보다 하고 헷갈려할 수 있다. 전문성을 내세우며 당당하거나, 그냥 마구 당당하거나 말이다. 잘하면 억울해 보이는 이미지도 만들 수 있다. 다만, 당당함이 부족해지는 순간 끝나는 만큼 점점 선명한 거짓말에 자신의 신념을 걸게 되는 곤란한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실드보다 필요한 것
지지하는 상대를 변론해주는 애정은 당연히 나쁠 것 없다. 하지만 실드 치기의 가장 명백한 폐해는, 실드를 치느라고 정작 잘못된 부분을 고치지 못하는 것이다. 실드를 치는 사람도, 실드를 통해 보호받은 대상도 말이다. 이왕 비판을 통해서 잘못된 부분이 드러났는데, 그 소중한 계기를 낭비하고 심지어 고치지 않는 쪽으로 더 굳어버린다.
부작용의 함정을 피하는 것은, 자신이 비판에 대한 정당한 반론을 하고 있는지, 실드치기를 하고 있는지 구분해내는 것이 시작점이다. 당연히 칼로 무 자르듯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만큼, 언제라도 자신이 어떤 대상을 지지하는 이유를 한 발짝 뒤로 물러나서 돌아볼 수 있는 준비가 필요하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애초에 돌아볼 수 있는 방식의 지지여야 하는데, 정서적 유대로 치환할수록 그것이 힘들다. 즉 평소부터 자신의 마음에 드는 대상에 대해서, ‘공감’이 아닌 ‘동의’의 생활화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부분은, 정말로 자신이 지지하는 대상을 돕고 싶다면 필요한 것은 변호가 아니라 연착륙 유도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 대상이 문제가 있는 행동이나 발언을 했다면, 비판을 막아낼 것이 아니라 잘못된 부분을 인정하고 수정해가며 더 나은 방향으로 새로운 대처를 해낼 수 있도록 건설적인 논의를 유도하는 것이다. 문제 사안의 원만한 수습과 함께, 그 너머에 대한 대안들을 누구나 제안할 수 있도록 대화의 장을 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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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교양지 자음과모음R 연재. 합리적 담론 형성을 가로막는 찌질한 진상질 패턴을 계열화, 반면교사 삼는 일종의 서바이벌 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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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ngback by 박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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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다시 읽어 볼 만한 글. 추천! | 방패가 민폐: ‘실드’의 허망함 [ 온라인진상열전 / 자음과모음R 2012 여름호] http://t.co/oZzdW3QF @capcold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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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ngback by 미드라인의 필멸자 조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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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패가 민폐: ‘실드’의 허망함 | capcold님의 블로그님]
"부작용의 함정을 피하는 것은, 자신이 비판에 대한 정당한 반론을 하고 있는지, 실드치기를 하고 있는지 구분해내는 것이 시작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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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ngback by 배트맨 코스프레중인 고어군
방패가 민폐: ‘실드’의 허망함 http://t.co/rPJjNeq1 by @capcold 온라인에서 볼 수 있는 실드의 네 가지 패턴: 1. 피장파장 실드 2. 프레임에 말려들지 말자 실드 3. 다른 미덕이 있다 실드 4. 걍 우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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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쯤 되새겨 보는 @capcold 님의 명문 「방패가 민폐: ‘실드’의 허망함」 http://t.co/IraXOyUv
Pingback by 임현수
방패가 민폐: ‘실드’의 허망함 http://t.co/RWNoM1x7 via @capcold "평소부터 자신의 마음에 드는 대상에 대해서, ‘공감’이 아닌 ‘동의’의 생활화가 필요하다." 역시 명문! 바쁘면 '실드보다 필요한 것' 부분만 읽으셔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