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 위의 상상력 – 『빙하시대』[기획회의 070715]

!@#… 고옥탄가휘발성 시사정치 이야기만 하면 바보가 된다. 가끔은 다시 유희로 가득한 만화 소개 (다음 회는 다시 시니컬대마왕세상통찰 만화인 ‘고스트월드’로 갔지만).

백지 위의 상상력 – 『빙하시대』

김낙호(만화연구가)

아주 간혹, 모르는 것이 때로는 약인 경우가 있다. 알면 알수록 중요한 정치나 학문의 영역이 아니라, 바로 순수한 상상력의 영역이 그렇다. 물론 상상력 역시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기반으로 해서 기존의 것과 겹치지 않게 잘 끌고 나가는 것이 중요한 경우가 많지만, 때로는 모든 (의식적인) 지식과 고정관념의 틀에서 벗어나서 그저 떠오르는 대로, 완전히 기존 맥락과 관계없는 새로운 무언가를 꿈꿔보고 싶을 때가 있다. 문화예술을 즐기는 행위에 있어서 특히 이것은 중요하다. 이런 리뷰를 쓰는 필자야 물론 워낙 고답적이라서 가능한 한 원래의 맥락, 현재의 맥락을 자꾸 공부하며 쌓아놓는 쪽을 선호하지만, 그 정반대 지점에 있는 완전한 무지의 감상방법을 때로는 동경하곤 한다. 대상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순수하게 새로 찾아나가는 과정을, ‘정답’을 찾아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럴듯한 상상’을 함으로써 추구하는 것. 그 순수한 유희적 즐거움이 부럽다.

『빙하시대』(니콜라 드 크레시/김세리 역/열화당)는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이 출판사와 함께 기획한 야심찬 연작 프로젝트의 신호탄이다. 루브르 박물관이라는 소재를 던져주고, 만화가들에게 완전히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작품을 그려내도록 한 것. 이를 통해서 루브르 박물관으로 대표되는 문화예술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높이고 현재의 고풍스러운 이미지보다 보다 신선한 모습으로 다가가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목표를 가지고 가는 프로젝트인 만큼, 프랑스의 젊고 실력있는 만화가 가운데 가장 초현실적 상상력과 섬세한 필력으로 소문난 니콜라 드 크레시를 선두주자로 내세운 것은 대단히 상식적인 선택이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작가는 이 컨셉을 정확하게 이해했다. 그의 말을 인용하자면 “많은 지식과 독서에도 불구하고, 루브르에 전시된 무수한 컬렉션들 앞에서 나는 전적으로 무지함을 느꼈다. 그래서 수천 년 이후에 루브르를 발견하게 될, 나보다도 더 무지한 사람들을 창조해 보기로 했다. 나는 진정으로 모든 문화에 무지한 인물들이 전시된 작품들을 과연 어떻게 해석할까 상상해 보고 싶었다”고 한다. 백지상태에서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 박물관의 작품들에서 모든 맥락을 제거하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들이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를 이야기로서 풀어나가는 것이 바로 드 크레시의 접근법이다.

작품의 내용은 단순하면서도 기이하다. 온난화와 기상이변 후 완전히 빙하에 잠기고 수백 수천년이 지난 파리. 일련의 고고학 탐험단이 루브르 박물관을 눈 속에서 발견하고 그 속에 남아있는 소장품들을 보면서 ‘과거’문명에 대한 나름의 가설들을 설명한다. 한편 오랜 기간 속에 자체적인 혼이 깃들게 된 소장품 가운데 일부가 사람을 습격하고, 결국 여러 다른 소장품들의 도움에 힘입어 함께 탈출해 나온다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특별히 모험이나 서스펜스를 강조하는 것은 아니고, 심지어 빙하시대가 된 미래세계의 SF설정의 재미를 맹목적으로 강요하지도 않는다 (인간과 좀 더 가까워지고 언어능력을 습득시키기 위해 돼지 유전자를 주입시킨 개라든지, 재미있는 설정은 사실 넘쳐나지만). 작품의 핵심은 바로 루브르 박물관 소장품들 자체다. 완전히 다른 맥락에서, 그저 소장품들 자신이 뿜어내는 이미지의 힘으로 보았을 때 어떤 재미있는 상상들이 가능한가에 대한 순수한 유희. 하지만 동시에, 문화예술을 즐기는 것의 가장 근본적인 감상의 재미에 대한 자극이기도 하다. 정작 루브르의 톱스타 취급을 받는 모나리자가, 너무 많이 전시되는 바람에 이 시대에는 이미 색이 바래서 새하얗게 되었다는 설정부터가 정말 ‘깨지’ 않는가.

그림과 글을 결합하며 내용을 전하는 만화라는 매체답게, 내용 중에는 그림과 글, 문명의 관계에 대한 내용이 농담처럼 하지만 꽤 심오하게 던져져있기도 하다. 루브르 박물관의 그림들을 보며 ‘과거’의 조상들은 문자가 아닌 그림으로 모든 것을 전했던 미개인들이었다고 단언하는 편견 어린 고고학자에 대한 비웃음은 이미지의 힘에 대한 강변이다. 혹은 수많은 소장품 그림들이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면서 순서를 맞추어가면서 억지로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내는 다른 고고학자는 또 어떤가. 그림을 연결하여 이야기를 만드는 만화라는 매체의 속성에 대한 숨겨진 자기 참조임과 동시에, 느낌과 감상보다 숨겨진 메시지부터 찾으려고 억지를 부리곤 하는 자세에 대한 패러디다.

인간 고고학자들과는 달리, 박물관의 다른 곳에 떨어진 돼지-개 ‘헐크’는 처음부터 소장품들의 혼과 대화를 나눈다. 애초에 문명이나 고고학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는 쉽게 수많은 조각품과 그림들과 그들의 사연을 들어줄 수 있다. 어떻게 20세기에만 하더라도 그나마 예술적 영감을 신경 쓰는 신사숙녀들이 드나들던 루브르가 21세기에는 뚱뚱한 관광객들 천지가 되었는지에 대한 자조라든지 말이다. 루브르의 기원, 예술품들이 축적된 목적이나 사연 등의 메시지들이 이 기이한 대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선보인다. 사실 따지고 보면 교양학습만화의 일종인 셈이기는 한데,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그것을 소화해내는 것이다. 들라크루아, 렘브란트 같은 대가들의 작품은 물론 수많은 원형적 형태의 고대 조각상들까지 다양한 작품들이 박물관에 걸려있는 어떤 대단한 보물이 아니라, 예술작품 자체로서 독자들에게 소개된다. 물론 작품 속에 등장한 소장품들에 대한 자료목록은 책 말미에 따로 첨부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여기에 미술을 전공한 역자의 꼼꼼한 역주까지 살짝 참조한다면 더욱 금상첨화다.

유머러스함과 교육성, 기이한 상상력과 실제 예술 작품들이 주는 경이에 대한 존경 등 다양한 가치들이 효과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은 드 크레시 특유의 화풍의 몫이 크다. 대담한 크로키와 서로 겹치는 얇은 선들 덕분에 그의 세계는 밝고 난잡하지 않으면서도 유쾌한 과장이 있다. 여기에 특유의 다채롭지만 탁한 붉은 흙색 위주의 색감 역시 험한 세계의 설정 속에서도 묘한 따듯함을 준다. 때로는 이야기 전개상 관찰의 대상일 때는 작품들을 실사로 합성하고, 직접 소장품들과 대화를 나누며 무언가를 향할 때는 캐릭터로서 작품 내로 끌어들이는 유연한 화법 역시 이 특이한 시도에 빛을 더해준다.

물론 고풍스러운 이미지가 강한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소장품이 프랑스의 보통 젊은이들은 물론 하물며 한국의 독자에게 그렇게 쉽게 정신적 자극을 줄 수 있을 리는 없다. 연출이나 상상력 면에서도 솔직히 드 크레시 최고의 작품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빙하시대』는 그저 백지상태에서 순수하고 즐거운 눈으로 예술을 다시 감상하도록 발판을 깔아주는 우수한 교양만화다. 소장품들에 대한 최고의 해설서가 아니라, 박물관에 가는 것의 즐거움에 대한 이야기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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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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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시대
니콜라 드 크레시 지음, 김세리 옮김/열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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