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읽어내는 그릇 – 『도자기』[기획회의 225호]

!@#… 이상하게 이 작품에 대해서는 자꾸 타이밍을 놓치다가, 이제서야 제대로 한 마디. 만화라는 표현 양식에 큰 고마움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 가운데 하나다.

 

마음을 읽어내는 그릇 – 『도자기』

김낙호(만화연구가)

대부분의 경우, 옛 도자기는 순수한 감상의 세계 그 자체를 제공한다(물론 어떤 이들은 도자기 자체보다 도자기의 가격을 감상하며 황홀경에 빠지곤 한다). 대부분의 옛 도자기는 누가 만들었는지에 대한 정보 없이, 오로지 그 물건 자체로서 우리를 만나게 된다. 어떤 장인들이 어떤 마음으로 만들었는지에 대한 맥락은 어렴풋할 뿐이며, 유물은 물건 그 자체로서 그곳에 있다. 그렇기에 억지로 모범답안을 달달 외운 것이 아니라면, 옛 도자기를 보고 어떤 느낌을 받는 것은 지금 현세에 보는 이들의 해석 혹은 느낌이 주는 현재성을 지닌다. 게다가 옛 도자기의 상당수가 장식을 위한 장식이 아니라 생활 속 도구로서의 맥락까지 있다. 그렇듯 도자기는 현재적 일상성의 영역이며, 여러 인간 사연들과 상상들이 만나는 느슨한 매개체가 되어준다. 교과서의 암기사항이나 박물관의 유리통 속에 머물지 않고, 상상 가득한 작품의 지면으로 놀러 나온다면 말이다.

만화『도자기』(호연 / 애니북스)가 바로 도자기를 인간사 상상력의 매개체로 끌고 나오는 그런 작품이다. 작가는 스스로 순진한 상상과 손발의 고생이 만나면 나오는 작품이라 평했는데, 그것이야말로 이 작품에서 도자기를 대하는 자세이기도 하다. 책에 수록된 각 에피소드의 구성은 어떤 사연이나 일상적 풍경의 단면이 펼쳐지고, 그 이야기가 전개되어 마지막에 도달할 때 그 이야기의 정서를 가장 효과적으로 함축하며 마무리하는 하나의 시각적 이미지가 펼쳐지는 식이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이내, 어떤 도자기의 모습이 된다. 이런 방식의 에피소드 수십 편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사이에 간간히 쉬어가듯 도자기 상식이나 미술사학도의 일상 생활에 대한 간단한 보너스 만화가 삽입되어 있다.

재미있게도, 『도자기』의 이야기들은 심지어 도자기에 관한 것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심도 있는 해설보다도 도자기를 풍부하게 감상하고 싶어지도록 만드는 힘이 크다. 백과사전은 조선조 백자달항아리에 대해서 “백자달항아리는 서양인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보기에도 가장 한국적 정서가 풍기는 도자기로, 둥근 몸체와 흰 태깔 등에서 친근감이 절로 우러나는 작품”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도자기』는 주인공이 같은 기숙사 룸메이트들과 벌인 재미있고 당황스러운 이야기를 펼친 후, 이렇게 이야기한다. “달항아리를 보면 그때 방순이에게 비춰졌을 내 첫인상이 떠오르는데… 한편으로 우리 방 방순이들의 얼굴들도 떠오른다… 이 그릇은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의 얼굴을 가진 그릇이거든.” 한국적 정서라는 추상적 개념어가, 지극히 한국적 생활의 맥락에서 사는 어떤 이들이 기억하는 에피소드들 속에 담긴 마음이라는 구체적 대상이 되어주는 셈이다. 도자기를 보고 느낀 감상을 멋스럽게 써넣은 식의 평론이 아니라, 그 감상 속에 담긴 이야기를 나눈다. 이야기들은 상상의 폭이 넓어서, 외계인에게 신호를 보내는 이야기나 자신의 반쪽의 죽음을 바라보는 어떤 지렁이의 이야기에서부터, 기숙사에서 포도를 먹으며 호들갑스럽게 기뻐하는 학생들의 소소한 이야기까지 펼쳐진다. 외계인에게 보내는 신호는 어떤 그릇 위의 미묘하게 알듯 말듯한 선무늬가 되고, 지렁이는 죽어서 구름의 모습이 되며, 포도에 호들갑떠는 오버쟁이들은 고려시대 청자 위에 흔적을 남긴다.

하지만 이 만화는 도자기를 열심히 감상하자는 예술 애호 캠페인 만화가 아니다. 도자기를 감상하고 싶어지는 충동은 하나의 부산물일 뿐이고, 핵심은 역시 이미지와 이야기가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에 동참하는 것 자체에 있다. 작품의 전개방식 그대로, 인간사의 여러 이야기와 감성들은 하나의 구체적 이미지가 되어 도자기의 모습으로 시대를 초월하여 남는다. 이야기 속에서 떠돌아다니던 감정은 이미지가 되고, 그 이미지는 현실 속에 존재하는 어떤 구체적인 물건 속에 순간 고정되어 긴 울림을 나누어준다. 그것이 나중에 원래의 의도대로 남는다는 보장은 물론 전혀 없지만, 항상 현재적인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읽히는 생명력을 얻게 된다. 그렇기에 특정한 사연이나 심상을 담아낸 어떤 대화나 물건이 시간이 흐른 뒤 어떻게 다시 읽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들이, 책에 포함된 여러 에피소드 가운데에서도 가장 정서적 울림이 강하다.

이런 작품이기에, 이미지들의 흐름으로 이야기를 표현해내는 만화라는 양식을 선택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다. 이야기와 이미지는 철저하게 혼합이 되어, 억지로 엮어 넣지 않고도 자연스러운 연결을 자랑한다. 심지어 만화로 진행된 각 에피소드의 끝에 박물관에서 찍은 실물 사진이 들어가서 만화의 세계가 갑자기 실사의 세계로 바뀌는 순간에도 말이다. 각 칸은 벽이 없이 열려 있고, 그림체 역시 부드러운 열린 선을 구사하는 카툰화법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당초 포털 사이트 네이버에서 웹 연재 당시 구사한 수직적 스크롤에서 오는 여백의 느낌은 책의 양면 편집으로 오면서 좀 더 빼곡하게 바뀌어 아쉬운 면도 있지만, 이만하면 매체이식도 꽤 충실하게 이루어졌다.

다소 이례적으로, 이 작품은 꽤 많은 에피소드를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꺼운 한 권의 책으로 묶여 나왔다. 한권으로 모든 것을 담아내는 자기완결성과 편의성은 확실히 장점이지만, 크고 번쩍거리는 책이 되어 버리는 바람에 작게 읽는 큰 울림의 이야기로서의 장점은 감소한 면이 있다. 화첩이나 일기수첩 같은 느낌이어도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 대신 도자기 빛을 닮은 유려한 색감의 시각 이미지들을 살려주는 품질 좋은 인쇄로 만족을 준다. 또한 연재 초기의 낙서체에 가까운 거친 선의 에피소드들은 물론, 각 에피소드 말미에 붙는 도자기 그림의 대부분을 완전히 재작업한 작가의 노력 역시 출판물로서의 이 책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들어준다. 2007년에 연재된 여러 웹만화 가운데 단연 최고 수준의 평가를 받을 만한 작품의 단행본에 걸맞은 성의다.

『도자기』의 부제에 의하면, 도자기는 마음을 담는 그릇이다. 어떤 마음은 실제로 도자기를 만들었던 이들이 넣었을 수도 있겠고, 어떤 마음은 작가가 상상한 여러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넣은 마음이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마음은, 독자들이 직접 넣고 언젠가 다시 꺼내보게 될 것들이다. 그리고 이 『도자기』라는 작품은 그 속에 담긴 마음을 읽어내기 위한 또 하나의 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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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도자기
호연 지음/애니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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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thoughts on “마음을 읽어내는 그릇 – 『도자기』[기획회의 225호]

Comments


  1. 이 작품에 대해 언제쯤 한마디 해주시나 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막상 책으로 출판된 것을 받아보니, 웹툰에서 느껴지는 여유와 고즈넉함이 다소 줄어든 듯해서 좀 아쉽습니다만…그래도 다시 볼때마다 울림을 주는 작품입니다.

    쫌만 더 일찍 쓰셨으면 구입할때 알라딘 Thanks to blogger를 캡콜드님께 해드렸을텐데…아깝네요~~ ^^

  2. 웹에서 보던 스크롤과는 좀 다른 느낌이기는 하지만, 책 자체는 정말로 고급스럽게 인쇄가 되었지요. 사서 보고 행복했습니다.^^

  3. 앗.. 책으로 나왔군요.
    청자삼강진사채 운학문 분합(..사실 검색해 봤음)에 관한
    에피소드가 가장 명작이라고 생각해요.
    구매목록에 추가해야겠네요.

  4. !@#… stefanet님/ 두루마리에 인쇄하지 않는 이상, 그 여유는 마음에서 보충을 하심이…(핫핫) 여튼 참, 그냥 옆에 두고 있다가 생각날 때 마다 아무 챕터나 한번 펼쳐보게 됩니다.

    기린아님/ 그렇다면 세 부 사셔서 보존용, 열람용, 포교용으로…;;;

    이런책은님/ 하지만 그러면, 그걸 입시용으로 달달 외우느라 재미를 잃어버릴 우려가…;;;

    itsia님/ 책버전에는 ‘청자삼강운학문매병’이라고 친절 설명과 소장처까지 섬세하게 들어가있습니다. 역시 지르셔야! :-)

  5. ‘도자기’ 안의 최고 작품에 대해서는 이견이 전혀 없군요! ^^
    빠진 화가 조금 아쉬워서 책 놓고 네이뇬 연재분이랑 비교해 보기까지 했던 독자인지라 캡콜님 소개가 너무 반갑습니다. 아, 명박산성같은 이야기 말고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즐겁게 살고 싶은데 말이에요. ;_;
    (여담이지만 빠질 수 밖에 없었던 화는 9화, 14화, 16화, 18화, 37화, 60화, 68화 입니다. 네이뇬 연재분 기준 : 자기류 도판 전재 문제와 초상권 보호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

  6. 도자기는 참 놀라웠지요. 만화를 전문으로 배우지 않은 사람이 이런 작품을 만들 줄이야…
    조금 과장해서 제가 인생을 살면서 숨겨진 재능을 가진 신인 작가의 연재물을 리얼타임으로 보게 된 것이 정말로 기뻣습니다.
    호연님의 다음작품이 나올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말 미래가 기대되고 있답니다.

  7. !@#… dcdc님/ 아니, 연재가 끝났을 뿐 작품으로서의 호소력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현재진행중입니다. 벌써 과거형으로 쓰시기에는… :-)

    기린아님/ 난데없이 ‘두부’로 읽고, 누가 최근에 출소했나… 라는 생각을 잠시 -_-;

    우유차님/ 유감스럽게도(?) 명박산성 정국은 이 블로그에서 결국 계속 다루지 않기에는 너무나 훌륭한(즉, 끔찍한) 떡밥이죠. 다만 역시 사람은 좋은 것도 보면서 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네이탐님/ 동인의 힘을 과소평가하시지 마시길! :-) 호연 작가의 다음 작품은 (많은 이들이 의외라고 생각하는 듯 한데) 호러물(?) ‘꿈의 주인’으로, 야후코리아에서 최근 재개장한 만화코너에서 연재중입니다. 아아, 정말로 야후는 한국에서 본격 마이너구나. (클릭)

    미고자라드님/ 코너 속성상 이미 몇 주 전에 쓴 것을, 종이잡지 나온 뒤 반감기 가량의 여유기간을 두고 난 뒤에야 여기 올리는 것이라서 더욱 아쉽…;;;

  8. 월요일에 알라딘으로 이 책 샀습니다. 보면서 찡할때도 있고 웃음이 날때도 있고.. 좋더군요. 그림으로 쓴 시는 이런 모습일까요.. 동양화집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요. 주변에 널리 널리 퍼뜨려야겠습니다. 생일 선물로 애용해야 할 듯 합니다. 캡콜님 알라딘 TTB도 해드리고 ^^;

    호연 님 새 작품이 연재되는 지는 몰랐네요. 알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9. !@#… Jens님/ 그러다가 혹시 특별 도자기 사은품 당첨되시면 인증샷 부탁합니다 :-)

  10. 이 만화에 대해 그래도 캡콜선생님께 설레발을 쳤던게 엊그제 같은데, 참 짧아서 아쉽죠.

  11. !@#… nomodem님/ 도자기의 종수는 아직 많으니, 때가 되면 팬들이 다시 소환을… (작품 속 명대사, “안 돼! 그딴거 발굴하지마!”가 생각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