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랜만에 만나는, ‘학습’에 정말로 신경을 쓰고 있는 어린이 대상 학습만화. 교육교육 말로는 떠들고 천문학적 돈을 쑤셔넣지만 정작 공부라는 것이 도대체 뭐고 뭘 어떻게 배우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놀랄만큼 무관심한 한국사회에서, 이런 책이 얼마나 부모들의 호응을 얻어낼지는 미지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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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모험담의 학습만화 – 『지구대진화』
김낙호(만화연구가)
개인적으로, 소위 “책을 읽자” 류의 캠페인을 싫어하는 편이다. 다양한 종류의 지식을 습득하고 간접경험을 쌓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자는 것이어야 하는데, 종종 단순히 월 평균 독서량이 어쩌니 하면서 단지 얇게 썰린 죽은 나무토막에 대한 페티시즘적 열정을 발휘하는 선에서 그치곤 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 중 특히 지식의 전달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잘 정리된 풍부한 지식이 들어있고 그것이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편리한 방식으로 전달된다면 그것이 책이든 인터넷 홈페이지든 비디오든 동네 아저씨의 연설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리고 이러한 논리는 책이라는 매체 안에서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만약 제대로 된 풍부한 지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면 그것이 교과서든 소설이든 만화책이든 모양새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사실 교양/학습만화라는 장르는 이러한 발상에서 시작한다. 분명히 만화는 표현력과 전달력에 있어서 큰 장점을 지니고 있고, 그러한 능력을 그냥 썩혀둔다면 정말 아쉬운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정작, 최근 몇 년 사이 여러 베스트셀러의 등장에 힘입어 큰 호황을 누리고 있는 교양학습만화의 경우 이러한 근본적 취지를 사정없이 배반하는 경우들이 다수였다. 말은 교양학습만화를 표방했지만, 실상은 연성화된 가벼운 지식들을 양념으로 살짝 뿌린 아동 취향 모험 오락만화인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장르 오락 만화라는 사실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왕 교양과 학습을 위해서 교양학습만화를 선택했다면 완성도 높은 지식을 축적하도록 도움이 될 만한 작품을 골라잡는 것이 원래의 취지에 맞을 것이라는 의미다. 만약 어떤 분야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고 싶다면 처음부터 교양지식 입문서를 읽는 것이 효과적이지, 그 분야를 소재로 삼았을 뿐인 오락 작품으로 만족하는 것은 좀 곤란하지 않은가. 아무리 시대의 대세가 속칭 ‘에듀테인먼트’라고 해도, 오락과 교육의 경계가 완전히 없어져버렸다거나 하는 과장은 금물이다.
『지구대진화』(NHK 기획, 고바야시 타츠요시 그림 / 삼성출판사, 전6권)은 정통파 ‘학습’만화다. 내용은 NHK의 유명한 동명 다큐멘터리 시리즈의 내용을 만화로 이식한 것으로, 문자 그대로 지구의 탄생부터 현재까지의 여정을 그려내고 있다. 내용 전개방식은 실제 NHK 제작자들이, 방송국에 견학 나온 두 중학생에게 다큐의 내용을 순서대로 소개해주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년소녀 주인공들을 모험길로 보내고 억지로 상황을 체험하게 만들어서 지식을 끼워 맞추는 식이 아닌, 순수하게 ‘강의식’ 학습만화인 셈이다. 등장인물들 사이의 막간 에피소드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평온하게 연속적으로 흘러가며, 부차적으로 취급되고 있을 뿐이다. 한 개 에피소드에서 배운 지식을 써먹으며 소동을 벌이는 전형적인 학습만화 구도를 보기 좋게 배반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그냥 설명문 같은 딱딱한 내용이라서, 이야기로서의 재미가 없다는 말인가? 놀랍게도,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작품은 분명히 재미있는 줄거리를 가지고 있는, 하나의 성장 스토리다. 단지 하필이면 그것이 등장 캐릭터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지구’가 주인공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갖은 역경을 이겨내고 결국 성장과 성장을 하여 오늘날의 이곳까지 도달한 지구라는 주인공의 파란만장한 모험담 말이다. 실로 장쾌한 스케일의 영웅전설이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지구와 그 지구에 달라붙어있는 생명이 펼치는 생명의 서사시는 몇몇 미미한 인간들의 성장담과는 전혀 다른 규모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중고등학교의 지구과학이나 생물학 시간에 배우는 파편적인 자연 이야기가 아니라, 46억년의 역사를 하나의 이야기로서 순차적으로, 상당히 드라마틱하게 서술해 나아간다. ‘지식’이 바로 모험담이 되며, 그 결과 방대한 양의 귀중한 자연과학 지식을 문자 그대로 재미있게 학습시켜준다.
이러한 스케일 큰 이야기를 표현하기 위해서 동원하는 연출방식은 과연 이름난 다큐멘터리를 바탕으로 하는 작품답게, 다큐와 동일한 순서로 다큐의 핵심 내용들을 별다른 각색 없이 그대로 전달해준다. 지구의 46억년 역사를 전집도 아닌 6권짜리 시리즈에 압축한다는 것은 일견 빡빡하게 들릴 수 있지만, 핵심을 짚는 절묘한 비유로 표현한다(지구의 역사를 하루의 시간에 비유하는 등). 또한 시각적으로도 명쾌한 도해와 구체적인 CG를 사용하는데, 휘황찬란한 원색 컬러로 포장하기보다 오히려 만화로서 부담 없이 읽기 편한 흑백으로 표현하는 배려를 보여주고 있다. 분명히 『지구대진화』은 훌륭한 교양 지식을 잘 담아내고 있는 작품이다. 필독서까지는 아니라도, 추천 교양서로서 오르내릴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하지만 이러한 식의 시도가 독자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결정적인 조건이 필요하다. 바로, 독자층을 제대로 만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주류 교양학습만화의 주요 소비층은 하필이면 초등학생인데, 초등학생 대상으로는 지식수준이 너무 높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래의 독자층이 되어주어야 할 중학생 이상의 경우는 입시과정에서 벗어난 지식에 대해서 스스로 재미를 느끼고 달려들기가 결코 쉽지 않다 (전적으로 입시 제도에 맞춰져 있는 정규 교육과정 속에서, 지구과학은 학생들에게 유감스럽게도 찬밥신세 아니던가). 깨달음을 위한 지식이 아닌 입시 성적을 위한 지식으로 움직이는 패러다임 속에서, 대자연이 움직여온 이치 같은 큼지막한 이야기는 관심의 대상에 들어오기 어렵다는 말이다. 나아가 성인들은 학습만화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동용으로 치부하며 거리를 두기 십상이다.
설명 방식에 있어서 정공법 그 자체인 이 작품은, 유감스럽게도 독자 소구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강력한 단점을 지니고 있다. 이 간극을 채울 수 있는 것은 결국 작품을 포장하는 마케팅이다. 진지한 교양지식을 얻게 해주는 본격 학습만화라는 점을 강조하는 작업에 실패하면, 그냥 ‘미소녀도 안 나오고 화려한 원색의 모험 액션도 없는 심심한 아동만화’ 정도로 취급받으며 서가 한쪽에서 먼지만 쌓이는 운명에 처할 수도 있다. 부디 여러 노력들이 지속되어, 이런 고품격 지식이 가득 담긴 만화가 정당한 지위를 차지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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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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