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에서 정착하기 – 표류교실 [기획회의 338호]

!@#… 쇼크 가치에 머무는 것이 아닌, 다음 세대에 대한 책임의 이야기.

 

지옥에서 정착하기 – [표류교실]

김낙호(만화연구가)

한 줌의 사람들이 고립된 상황에 처할 때, 어떻게 될 것인가. 이야기 속에서 이런 소재로 그려낼 수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사람들이 협력하며 외부의 위협에 맞서는 생존기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새로운 사회관계가 형성되는 과정이다. 전자를 강조할수록 이야기는 활기찬 모험극이 되고, 후자를 강조할수록 권력 관계에 대한 우화가 되어 다소 비관적인 방향으로 흐른다. 그런데 어쩌다가 창작자의 솜씨가 좋아 두 가지를 함께 강조할 때는 어떨까. 외부의 위협에도 내부의 분열에도 동시에 맞서야하는 지옥도가 되면서도, 그 안에서 다시금 삶에 대한 희망도 찾고 하는 특이하게 종합적인 작품이 될 가능성이 열린다.

70년대에 일본에서 인기리에 연재된 후, 여러 방식의 해적판을 제외하면 40여년 후에 비로소 한국에 정식 출간된 고전만화 [표류교실](우메즈 가즈오 / 세미콜론)은 한 초등학교가 통째로 어딘지 모를 허허벌판 사막 한복판으로 순식간에 옮겨진다는 설정위에 펼쳐지는 이야기다. 그저 평범하게 학생들과 선생들이 학교에 나온 어느 날, 지나가는 지진인 줄 알았던 진동이 끝난 후 창문을 열어보니 학교 교정 바깥은 전부 황폐한 죽음의 땅이 되어있다. 반면 학교를 제외한 나머지 세상의 입장에서는, 갑자기 학교가 거대하고 철저한 폭발에 휘말린 듯 밑바닥까지 사라져버려서 망연자실해 하고 있다. 학교가 표류하여 떨어진 그 죽음의 땅은 도대체 무엇인가. 학교를 제외한 온 세상이 멸망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절망감 앞에, 학교에 있는 이들 가운데 가장 먼저 제정신을 잃는 것은 바로 어른인 교사들이다. 삽시간에 이들부터 자살과 살인으로 목숨을 잃고, 많지 않은 식량과 바깥 세상에서 들이닥칠지 모르는 위협, 학생사회 내부의 통솔 등을 놓고 여러 가지 일들이 벌어진다. 광기라기보다는 생존본능에 가까운 행동들이 표면화되며 집단들이 만들어지고 서로 반목하며, 그 안에서도 주인공인 6학년생 쇼를 중심으로 아이들은 조금씩 이쪽 세계의 비밀을 캐내간다.

위기로부터 탈출을 해야 하는 종류의 세계멸망 소재 작품들과 달리, 표류교실은 어느 정도는 바깥을 탐험하는 과제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정착에 관한 이야기다. 제한된 조건 안에서, 다수 성원들이 생존이 가능하도록 정착을 해야 한다. 원래 학교에서 리더십 역할을 맡게 되어 있는 선생들은, 아는 것도 많고 절망할 것도 많아서 일찍 죽어 없어져버렸다. 급식 아저씨는 이것이 전쟁이고 결국 미군이 구출해줄 것이라 믿으며 혼자 살아남고자 할 뿐, 정착할 생각이 없다. 그렇기에 자신의 신체적 우위(상대는 여하튼 초등학생들이다)를 이용하여 식량을 강탈할 따름이다. 하지만 주인공과 그 동료들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는가를 꾸준히 고민하며, 남은 식량을 분배하고 풀장 물을 식수로 보존하고는, 학교 텃밭에서 어떻게든 식물을 키워 식량을 조달하고자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부를 만든다. 민주적 선거로 대통령을 뽑고 국방장관을 임명하여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함께 조직적 방어를 해내고자 노력한다. 윗 학급들이 아래 학급들을 챙겨주며 함께 이 난관 속에서도 가족, 사회의 모습을 복원하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당연하게도, 그런 노력이 손쉽게 성공할 리는 없다. 외부의 위협은 괴물 지네가 되었든 그저 독으로 가득한 광활한 바깥 생태계가 되었든 지나치게 강하고, 내부는 새 정부의 방침에 반대하는 이들, 이기적인 생존을 위해 폭주하는 개인들 등으로 계속 흔들린다. 이들은 상상을 초월한 악마성으로 정신을 잃는다기보다, 크고 작은 이기심으로 상대를 당연하다는 듯이 깔아뭉개고자 한다. 초등학교라는 설정이 이런 점에서 대단히 효과적인 것이, 폭력과 패거리 구성에 의한 권력구도 찾기, 그리고 교육 받은 사회 도덕 규범에 대한 아직 나름대로 고지식한 믿음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솔직히 무대를 고등학교로만 바꿔도, 설득력 있는 이야기라면 전자로 크게 기울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그냥 막나가는 광기보다, 이런 식으로 점점 자신과 서로에게 잔인해지는 방식이 훨씬 공포스럽다. 이 작품에서 가장 무서운 순간은 괴물이 습격할 때보다,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옥상에서 뛰어내릴 때다. 느닷없이 착해 보이던 사람이 연쇄살인마로 둔갑할 때가 아니라, 허기에 굶주리던 아이들이 결국 시체를 식량으로 보기 시작할 때다. 급전환의 충격효과보다는, 그렇게 될 법하다는 느낌이 들 때 가장 무서운 것이다. 음침한 기운이나 그로테스크한 상상력보다는, 처절한 선택이 가장 묵직한 공포다.

비교적 이야기의 초입 부분에서 밝혀지는 비밀은, 학교가 떨어진 세계가 공간이 아닌 시간상의 이동, 즉 미래라는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의 과오로 인하여 멸망했고, 죽음의 땅 위에 다른 종류의 생물들이 돌아다닌다. 인간이 더 이상 그 모습대로 살 수 있는 생태계가 아니기에, 하나의 큰 난관을 겨우 극복할 때마다 처음에 수백명이었던 전교 학생들의 숫자는 크게 줄어나간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아니 정착하여 살아나갈 수 있는 희망은 무엇인가. 이런 암울한 설정의 공포 대하드라마로서는 무척 의외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약자를 보호하며 더 나은 세상에서 살 수 있게 해주고 싶다는 소망이다. 자신을 따라서 학교에 왔다가 말려들어온 미취학 동네 꼬마에게 쇼와 동료들은 늘 책임감을 보인다. 이쪽에 온 이들 가운데 가장 어리고 약한 자를 데리고 보호함으로써 인간 사회의 도리를 지켜나간다. 이런 행동은 인류가 그간 멸망한 과정, 즉 뒷세대를 생각하지 않고 인류의 환경을 자멸시킨 모습과 대비를 이룬다.

[표류교실]은 동서냉전이 최고조에 달하고 오컬트가 유행하며, 과학과 산업의 발전이 환경 파괴로 이어지는 모습에 대한 비판이 표면화되던 70년대의 문제의식 위에 서 있는 작품이다. 주류 소년만화의 오락성, 연재만화로서의 극적 긴장감 지속 위에 묵직한 주제들과 섬세한 공포를 심은 것이다. 여러 장르에 손을 뻗었지만 유독 공포물에서 대가로 인정받은 작가의 명성 그대로, 특유의 잔뜩 경악한 표정묘사나 한없이 암울하게 몰아가는 상황 연출이 일품이다. 물론 요즈음의 신작 기준으로 보자면 충분한 복선 없이 지나치게 갑작스러운 반전이나 기술적 고증에 대한 순박한 부족함 등이 눈에 들어오기도 하지만, 유려하게 비극의 끝까지 흘러가는 전개의 몰입감은 이 작품을 그저 옛날작품이 아니라 여전히 의미 넘치는 ‘고전’으로 불러야할 자격을 준다.

그리고 그런 품격을 존중하듯이, 한국어판 책 또한 최상의 품질로 출간되었다. 두껍게 묶인 책을 펼쳐보아도 쉽게 제본이 두 동강이 되지 않는다거나 하는 기술적 요인도 그렇지만, 가장 무삭제 완전판 내지 복원판에 가까운 판본을 선택하여 꼼꼼한 번역과 성의 있는 편집으로 완성한 것이다. 별 망설임 없이, 고급스러운 두꺼운 책등을 진열해 자랑하고 싶은 서가마다 한 세트씩 비치해놓을 만한 모양새다.

표류교실 1
우메즈 카즈오 글 그림, 장성주 옮김/세미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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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그러니까 지금 발간호): 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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