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의 오락성을 집대성하다 – 시도니아의 기사 [기획회의 337호]

!@#… 한 두 챕터 정도의 진입장벽만 넘으면, 뒤로 갈수록 물건이다. 특히 러브코미디 측면에서…;;

 

SF의 오락성을 집대성하다 – [시도니아의 기사]

김낙호(만화연구가)

일군의 사람들이 하나의 거대 우주선에 탑승하여 어디론가 우주를 항해하며 인류의 생존을 이루려는 이야기는 많이 활용된 공식이다. ‘배틀스타 갈락티카’든 ‘마크로스’든 명작도 적지 않아 무엇을 더 우려낼 수 있을까 의심스럽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압도적인 미지의 존재가 다양한 방식으로 현신하여 공격해오며 점점 더 인간의 싸움에 대해 진화하는 패턴 또한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포함, 많은 선례들이 있다. 인류의 존망을 건 혈투의 줄거리를 표방하면서, 그 안에 주인공을 중심으로 로맨틱 코미디 요소를 넣는 것이라면, 아예 00년대 일본 장르 애니메이션의 가장 안일하게 식상한 클리셰가 되어버린지 오래다. 그런데 그런 소재들을 가득 모아, 이미 고전으로 꼽히는 그런 작품들을 다시 한 번 보는 것과 다른 새로운 매력을 줄 방도가 있을까.

[시도니아의 기사](츠토무 니헤이 / 애니북스 / 2권 발매중)를 펼쳐보면, 대답이 보인다. 그 방법은, 소재 이전에 장르의 기본을 아주 충실하게 다지는 것이다. 공상과학물(SF)의 본령인 (나름대로의) 과학 법칙으로 움직이는 매혹적이며 세부적인 세계의 창조가 먼저다. 디스토피아, 특히 코스믹 호러 계열의 본령인 암울한 전망은 정말 심각하게 압도적으로 암울한 위협으로 만들어내야 한다. 로맨틱 코미디나 성장물로서의 요소는 적당한 임의적 코드의 기계적 차용이 아니라, 세계관 안에서 기묘할 정도로 절묘하게 녹아들어가야 의미가 있다. 그리고 자기 머릿속 세계 복잡한 설정들의 풍경과 대중적 호소력 사이에서 이 모든 것을 균형 잡아내야 한다. 대표작 [BLAME!] 등에서 그런 균형을 일찌감치 포기하고 그냥 기이한 세계관을 마구 던지는 것으로 소수의 열성적 지지를 이끌어냈던 작가이기에 사전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이 작품은 확연히 다르다. 매혹적인 것에 머무르지 않고, 그 위에 확실한 재미를 쌓았다.

먼 미래, 지구는 정체불명의 외계 존재인 ‘가우나’들에게 두 동강이 나고, 살아남은 인류는 항성간 이동 우주선 몇 척에 나누어 탑승하여 새로운 고향을 찾는 최소한 수 백년도 넘게 진행해온 오랜 여정에 나선 상태다. 시도니아는 그런 거대 함선 가운데 하나로, 그 안에는 생태계와 도시가 구축되어 있으며 우주 암석 등을 통해서 자원을 보충하기도 한다. 그리고 가우나와의 오랜 싸움을 겪으며 개발하고 계속 발전시키고 있는 보호 로봇인 ‘모리토’들로 편성된 군대가 있다. 이야기는 시도니아의 일반 거주구와 분리된 지하층에서 자라났다가 보호자인 할아버지 사후 거주구로 올라나왔다가 일련의 사건 속에 정식 조종사가 되어 가우나와 싸우게 되는 주인공 타니카제 나가테가 겪어나가는 일들을 다뤄낸다. 시도니아의 인류가 어떤 식으로 우주에 적응했는지, 가우나와 어떻게 싸워가는지, 가우나는 어떤 존재인지 등이 타니카제와 동료들, 시도니아의 지휘관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촘촘하게 한 꺼풀씩 펼져져 나간다.

이 작품의 첫 번째 장점은 앞서 꼽았듯 SF로서의 기본 매력인 분방하지만 과학적 상상력의 세계관을 치밀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시도니아의 인류는 몇 세대의 경험을 거치며, 지구에서 살던 이들보다 훨씬 이쪽 생활의 경험을 반영하여 인위적 진화를 거쳤다. 최고 선원들은 지식과 기억을 계속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노화를 방지하는 특수 처치를 받아 수 백년째 살고 있다. 다만 인류 일반에게 알려지면 욕심으로 인한 여러 문제가 발생하기에, 불로는 비밀이며 최고 선원들은 대외적으로는 계속 새로 바뀐다고 해놓고는 사실은 가면을 쓴 채로 업무를 본다. 유전자 조작을 통해서, 이야기의 무대가 되는 시점의 현생 인류는 광합성을 한다. 즉 식량의 취식과 배출을 극소화하는 것이다. 나아가 중성(교배를 위해 선택한 상대에 따라서 자신의 성별을 선택할 수 있다)이라는 성별이 존재하고, 열 명 단위의 클론 형제 자매들도 흔하다. 이런 식으로 인류의 번식을 챙기는 것은 바로 유전자의 안정성을 위해 최소한 50만의 개체가 필요하다는 선내 과학자들의 판단에 따른 것이다.

비단 기본 설정 뿐만 아니라 이야기의 진행에서도 우주 과학의 룰이 세계의 일부로 확실하게 작용한다. 여느 대충 넘어가는 장르 작품들과는 달리 중력과 관성이 매우 중요한 요소라서, 가우나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우주선이 어쩔 수 없이 긴급 회피 기동을 하는 순간에는 내부 인공중력 발생 한계치 이상의 관성이 작용하여 수많은 민간인들이 허공을 날다가 벽에 부딪혀 죽는 식이다. 이동중인 시도니아 우주선에서 지나치게 멀리 떨어져 전투를 벌이는 모리토 로봇은 자칫하면 모선으로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다든지 하는 전개도 그렇다.

그리고 그 다음 장점이, 확실하게 암울하고 절망적인 위협이다. 가우나는 비교적 작은 본체와 거대한 외피로 이루어져 있는데, 외피로 상대를 삼켜 먹어버리고는 그 상대의 특질을 학습해버린다. 즉 인간이 타고 있는 모리토를 삼킨 가우나는 모리토의 전투 방법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설정 이상으로 진짜 빛을 발하는 것은 바로 작가의 시각적 표현력이다. 전작들에서 기계와 생체가 기이하게 뒤섞인 괴생명체를 즐겨 묘사한 작가가 이번에는 한층 강력한 스케일감을 구현하여, 압도적으로 크고 강력한 위협의 광경을 보여준다. 인간의 힘이란 정말 미미하구나, 하는 것을 단순한 숫자설정이나 잔인한 모습 한두개 주고 생략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압박한다.

그런데 그런 강력한 세계의 절망적 이야기를 하면서 마냥 암울해지는 것이 아니라, 로맨스 코미디로서의 재미까지도 은근히 집요하게 추구한다는 것이 묘하게 매력적이다. 아예 선남선녀 캐릭터들의 삼각 사각 연애에 열광하도록 고안된 흔한 작품들과 달리, 하드SF 성향에 사람들도 마구 죽어나가는 작품인데 뜬금없이 그런 요소들이 들어가는 것이 매력이다. 주인공 나가테는 현 세대의 여타 인류처럼 광합성을 못하고 매 끼니 밥을 먹어야 하기에, 그냥 당연하게도 식충이 캐릭터로서 개그 요소가 된다. 연애감정의 구도 또한 뻔한 남녀관계가 아니라 중성, 나중에는 다른 종까지 번지는데, 그것 역시 그 엄혹한 세계관에서 충분히 발생하는 상황이 그 자체로 개그 요소가 생기는 식이다.

가끔 이야기 전환이 갑작스럽다거나 얼굴 표정이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다거나(이마저도 작가의 전작들에 비하면 대단한 변화이다)하는 결점 정도는 몇십 페이지만 몰두해 읽으면 날아갈 것이다. 매력적이고 세부적 SF 세계, 큰 스케일, 암울하고 비장한 전개, 그 속에 동시에 전개되는 로맨스 코미디인데 따로 놀지 않고 균형을 잡아내다니, 이쪽 장르의 오락성을 집대성한 느낌의 작품이다.

시도니아의 騎士 1
니헤이 츠토무 지음, 김동욱 옮김/애니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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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그러니까 지금 호 게재중): 표류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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