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돈된 자료와 효과적 소통 – 『9/11 테러 리포트』
김낙호(만화연구가)
세상 살아가는 것은 어차피 항상 경쟁자, 적대자들과 마주치는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고도로 발달한 사회일수록 때때로 불안은 활용할지언정 충격과 공포만큼은 최소한으로 줄이고자 노력을 한다. 그래야 사람들에게 사회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안도감을 주고 세금도 고분고분 내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런 방식이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는 순간이 있으니, 막강한 폭력으로 삶의 터전이 직접적인 공격을 받을 때다. 직접적인 파괴의 현장에서는, 승패니 이권이니 하는 나름대로 세련된 이해관계와 논리가 아니라 순수한 적의와 공포가 지배한다. 특히 적의 정체, 공격의 방법, 그 모든 것들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는 동안에는 더욱 더 공포가 공포를 먹고 성장한다. 사회를 위협할 정도의 적의와 공포를 해소하는 방법은? 쉬운 길과 어려운 길이 있다. 쉬운 길은, 대충 외부의 적을 하나 만들어서 사회에 팽배한 공포와 적의를 죄다 그쪽으로 돌리는 것이다. 선악구도 같은 단순명쾌한 것도 도입하면 더욱 호응이 좋고, 얼떨결에 적의를 뒤집어쓴 자들이 실제로도 뒤가 구린 것이 많고 또 일반인들이 사실 별로 자세히 알거나 가깝게 여기지 않는 존재라면 안성맞춤이다. 반면에, 어려운 길을 선택하는 것이 필요한 때가 있다. 사건이 일어난 과정을 밝히고, 그것을 둘러싼 이해관계를 기술하며, 어떤 식으로 이런 일이 방지될 수 있는가 복잡하게 경우의 수와 가능성, 대안들을 타진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 것을 심지어 공포와 적의에 사로잡힌 사회 성원들에게 이해시키기 까지 해야 한다!
『그래픽으로 보는 9/11 테러 리포트』(시드 제이콥슨, 어니 콜론 / 박인균 옮김 / 추수밭)은 9/11 테러사건에 관한 만화다. 2001년 9월 11일, WTC 빌딩에 초유의 민간 항공기 충돌 테러를 당한 미국이 아무 거리낌 없이 쉬운 길을 선택하여 중동의 나라들을 무작정 폭격하기 시작한 일이 있었다(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미국이 그 수반에 앉아 있는 전쟁광들의 정복욕을 채우기에 바쁜 동안, 정부의 다른 한쪽에서는 공식적인 9/11 조사위원회가 꾸려졌다. 그리고 위원회는 앞서 이야기한 어려운 길, 즉 당시의 모든 사실관계와 정황, 이해관계들을 포괄하는 종합 보고서를 만들어냈다. 어떻게 정부가 반복된 사전 위험신호를 과감하게 무시해버렸는지, 어떻게 정치적 이해관계, 외교적 실수들이 축적되어 일촉즉발 갈등이 되었는지, 당시 사건은 시간대별로 그리고 각 공간 별로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는지, 그 이후 대처는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는지 등 대단히 포괄적인 범주의 세밀한 내용이 담겨 있는 내용이었다. 음모론가들이 만족할 만한 방향으로 정부의 배후 개입이 밝혀졌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당대의 공식 발표 자료로 모을 수 있는 가장 객관적인 (즉 미국정부의 오류도 많은 부분 냉정하게 지적하는) 자료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문제는 600페이지의 두께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내용서술 방식이랄까. 충격과 공포는 일반 대중들 누구나에게 다가오지만, 사건의 진실을 묘사하는 보고서는 그래서야 너무 접근하기 힘들다. 그런 점에 착안, 대단히 명료하고 쉽게 이해가 가도록 구성되어있으면서도 보고서의 핵심 줄거리는 문제없이 압축되어있는 형식이 발표되었다. 바로, 학습만화로 말이다.
『9/11 테러 리포트』는 2004년에 발표되었던 미국 정부 조사위원회의 보고서를 바탕으로 만화화한 작품이다. 이전에도 9/11에 대한 만화책은 여럿 발표되었으나, 종종 인명구조의 숭고함을 이야기하거나 미국인의 애국심을 부르짖는 모음집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정부 보고서를 별다른 픽션 드라마 각색 없이 그대로 옮겨낸 것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물론 원본 보고서도 출간 당시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 바 있으나, 150페이지짜리 만화 개론서를 읽는 것의 대중적 흡수력은 큰 매력이다. 글을 담당한 제이콥슨은 고전 만화 『리치 리치』시리즈를 창조하고 마블에서 오랫동안 책임편집을 맡았던 경력이 있는 미국 주류만화의 원로이며, 그림을 담당한 콜론은 『꼬마유령 캐스퍼』와 『원더우먼『 등의 시리즈에 참여했던 사람이다. 이런 류의 작업이라면 쉽게 떠올릴 만한 다소 인디적인 젊은 작가 성향과 달리, 둘 다 70대의 주류 오락 만화계의 원로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픽 저널리즘이라는 창작영역에 과감하게 도전하여 결실을 내놓은 셈이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정부 보고서의 내용을 지나친 드라마화 없이, 하지만 생동감 넘치는 영상 다큐멘터리처럼 옮겨내고 있다는 점이다. 가장 백미인 부분은 약 18페이지에 걸쳐서 국방성, 각 비행기 내부, 백악관 등 다양한 공간에서 테러 발생 당시 이루어진 과정을 전부 병렬해서 묘사한 타임라인이다. 공간 속에 사건들을 병렬하는 것에 장점을 발휘하는 만화 특유의 형식적 장점을 극대화한 것으로, 당시 현장의 긴박감과 미국 정부의 믿기지 않는 무능한 대처, 그리고 결국 파국으로 끝나는 과정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그러면서도 만화 전반에 걸친 장면 묘사 역시 과장된 캐리커쳐와 오버액션 등의 선정성을 배제하고, 최대한 냉정하게 상황 재현에 머물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접근은 감정적 접근, 음모론적 접근이 넘치던 당시(그리고 지금까지도)의 9/11 관련 작품 및 자료들과 선을 달리 하고자 노력했던 보고서 위원회의 정신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화라는 형식으로 압축하기 때문에 생기는 몇 가지 부작용은 있다. 각 상황에서 일종의 주인공 역할이 생겨난다든지, 대사들이 일부 창작되거나 단순화된다든지 하는 등 만화독서의 맥락을 맞춘 지점 만큼은 어쩔 수 없다. 한국 학습만화에서 주류 표현기법이 되어 있는 ‘선생님 캐릭터의 강의’나 칸 안의 내용에 거의 의무적으로 유머를 삽입하는 방식보다는 훨씬 더 냉철한 다큐멘터리에 가깝지만, 일정 정도 감정이입이 생기는 것은 만화의 숙명인 마냥 피할 수 없다.
2006년에 9/11 5주년에 나온 원작을 2007년 6주년에 맞추어 출간한 이번 한국어판은 반가우면서도 동시에 몇가지 아쉬움을 남긴다. 개인들의 드라마화가 되는 것을 최대한 피하고자 했던 원작의 취지와 달리 표지부터 인물 중심으로 재편집하는가 하면, 만화의 도상성과 가독성을 고려하지 않은 다소 미숙한 식자작업이 거슬린다. 하지만 이런 작품은, 나와 준 것만으로도 반가운 범주에 속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관대하게 넘어가도 괜찮으리라.
아프간 인질 납치 사건에서도 보았듯, 그리고 현대사의 수많은 경험으로 알고 있듯, 직접적 공격을 당해서 불타오르는 적의와 공포는 한국에 있어서도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냉정한 자료정리와 효과적인 소통을 목표하는 이런 류의 작품이 국내의 여러 이슈에 대해서도 널리 만들어지고 읽혀지면 좋겠다는 희망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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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 Copyleft 2007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9/11 테러 리포트 시드 제이콥슨.어니 콜론 지음, 박인균 옮김/추수밭(청림출판) |
저도 capcold님 추천도서목록 보고 한권 구입했다는 것 아닙니까.
생각보다 무지 얇아서 처음엔 좀 당황스럽더군요.
아무튼 좋은 책 추천 감사합니다.
즉, 업계인 뽐뿌질 용.
아니죠 거기에 넘어가는 독자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알면서도 속아주는 센스?)
!@#… 익명님/ 혹시나 독자들이 정당하게 설득당하시지 않고 그저 ‘속으실’ 까봐, 의도를 명확하게 밝히는 거죠. :-)
advantages님/ 감사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