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시에 관하여 [싱크 13호]

!@#… 한국사회의 역사 맥락상 무척 민감해할만한데도, 무척 둔감한 토픽.

 

감시에 관하여

김낙호(만화연구가)

정보라는 도구를 통해서 상대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가능해지기 위한 한 가지 중요한 조건이 있다. 그것은 바로, 상대를 관찰하여 그런 식으로 활용할 수 있는 정보를 얻어내는 것이다. 권력은 비대칭이기 때문에 비로소 권력이 될 수 있듯, 정보 수집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상대에 대해서 아는 바가 상대가 나에 대해서 아는 바보다 많지 않으면 지렛대로 작용하지 못하고 대등한 균형을 이뤄버린다. 감시는 일방향일 때 힘을 발휘한다.

감시의 발달과정의 종착점에 있는 것이 무엇인가는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가 사용한 ‘판옵티콘’의 비유에서 정점을 이룬다. 판옵티콘은 감옥의 설계방식인데, 원형으로 이뤄진 구조에서 죄수들의 감방은 벽 쪽에, 간수는 중앙에 있기에 죄수보다 훨씬 적은 숫자의 간수들로 최대한 효과적으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다. 나아가 간수는 죄수를 볼 수 있고 죄수는 간수를 볼 수 없기에, 감시의 일방향성이 이로써 성립된다. 하지만 이로 인해서 생겨나는 더욱 중요한 현상은, 간수가 죄수들을 감시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으면서도 감시 중일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줌으로써, 실제 감시가 이뤄지든 말든 복종을 얻어내는 것이다. 감시라는 행위가 감시라는 체제로 바뀌어 일상적 복종이라는 관행으로 뿌리내리는 흐름이다.

그런데 현대사회가 발달할수록, 권력을 행사하는 현장과 방식들은 점점 정교해지고 늘어난다. 이에 발맞추어 감시 역시 한층 치밀하고 일상적으로 발달해왔다. 스파이들의 거창한 첩보작전이든 관료제의 끝없이 일상적인 서류 축적이든, 자식의 이메일 폴더에 대한 부모의 감시든 정부 관계자의 초법적 민간인 사찰이든 말이다. 그렇기에 감시란 거대한 악의 세력이 우리를 짓밟는 종류의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사회적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지점들을 한번씩 돌아볼 필요가 생긴다. 단지 우리를 감시하는 억압자들을 때려눕히자가 아닌, 감시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들을 어떻게 만들고 있는가라는 측면 말이다. 거대한 질문일수록, 소화불량에 걸리지 않도록 적절한 자극과 즐거움을 주는 만화 작품으로 접근해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감시가 사회의 기본 원리가 되는 곳은, 그만큼 정보를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그것에 따라서 모든 사회적 취급이 이뤄지는 사회다. 무슨 ‘정보화 사회’ 같은 희망적(?) 표어를 꺼내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과 행동에 대해 체계적 분류와 절차에 의한 대처를 강조하는 관료주의 사회를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공무원들이 서류더미에 깔리는 그런 희극적 장면을 상상할 수도 있지만, 실상은 모든 것에 대해 기록을 남기고 절차를 검토하는 작업을 중시하는 체계 자체다. 강력한 구조를 모든 사회적 장면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만큼, 구조 집행 의지와 집행 기술의 자연스러움 사이에서 괴리가 발생하는 만큼씩 사회는 경직된다.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보를 얻어 사회의 집행을 그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집요하게 정보를 얻어낸 후 그것을 다시금 규격화된 틀에 맞추고는, 다시금 사람들의 행동반경을 일방적으로 강요해버린다. 브레이크 풀린 관료주의는 모든 장면에서 체계적 감시가 이뤄지는 지옥이 되는 셈이다.

그런 관료주의가 극단으로 간 모습을 뛰어난 상상력의 악몽 풍경으로 그려낸, 작품이 바로 [꿈의 포로 아크파크](마르크-앙투안 마티외) 연작이다. 지극히 ‘카프카적인’ 세상을, 만화 안에 그려내는 사회의 모습으로서 뿐만 아니라 만화의 표현 구조에 대한 질문까지 엮으며 한층 강력하게 개인이 구조 속에 속박되는 모습들을 적절한 유머 효과와 함께 그려낸다. 안그래도 주인공은 정부 산하 부처인 ‘유머부’의 공무원으로, 유머 수집이 업무다. 그런 그가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만화의 구조 자체를 살짝 전복하는 이상한 현상을 접하고, 그렇게 어긋나는 지점을 수습하고자 한다. 그리고 마지막은 마치 꿈을 꾼 듯, 다시 관료사회의 여러 공무원들이 슬쩍 힘을 합쳐서 구조가 회복된다. 유머조차 감시하고 수집하여 분류하고 틀 안에 넣겠다는 극단적 세계 설정으로, 그보다는 덜 심하지만 꽤 일상적 감시로 경직된 우리 현실 사회를 돌아보게 만든다.

하지만 풍부한 상상으로 만들어낸 세계보다 더욱 판타지스러운 일상적 감시가 이뤄지는 현실 사회가 존재하기도 한다. [남쪽손님 / 빗장열기](오영진)은 남북 경제협력 경수로 사업 당시 북한에 출장을 나갔던 작가 자신이 겪은 일화들을 자세하고 경쾌하게 그려내는 작품이다. 북한 방문기를 그려내는 여타 작품들이 북한을 기이하고 이상한 나라로 그려내는 것에 몰두하거나 그저 우리는 한민족이라는 경탄에 빠지는 실수를 범하는 것과 달리, 이 작품은 북한의 기이한 경직성과 그래도 은근히 사람들의 행동과 관습들이 한국과 비슷한 구석이 있음을 찾아내며 균형점을 찾아낸다.

그런데 작가가 보고 온 북한 사회는 감시가 일상화되어 있다. 남한에서 온 노동자인 작가에게, 사람들은 친절하고 인간적으로 대하면서도 동시에 늘 뭔가 잘못을 저지르지 않나 감시를 한다. 일상을 관찰한 메모도 숨겨서 가지고 나와야 하며, 모든 동선에서 가이드가 감시의 눈길을 거두지 않는다. 친절한 대우, 인간적인 면모와 공존하는 상호 감시의 관행이 있고, 특히 남쪽 손님에 대해서는 그것이 한층 더 강력하게 적용되는 그런 모습이 조금은 우습고 조금은 섬뜩하게 다가온다. 그저 경비를 서는 군인들이 그런 감시를 하는 독재 정권의 압제라기보다, 압제를 위해 도입되었을 상호 감시가 이제는 그냥 당연한 것이 되어 있는 셈이다. 감시를 하는 실력이 매섭기 때문이 아니라, 늘 그렇게 감시하고 있다는 것이 피곤하게 만드는 일이다.

강고한 구조에 의한 감시, 사회 관행이 된 감시에 더불어 또 하나의 일상화된 감시의 모습이라면, 바로 감시가 하나의 민간 사업이 되는 모습이다. 공식적 허가 여부에 따라서 어떤 나라에서는 사립탐정이고 어떤 나라에서는 흥신소 해결사가 되는, 사업으로서 누군가의 의뢰를 받아 다른 누군가를 감시하는 이들 말이다. [신 노조키야](야마모토 히데오)는 ‘노조키야’는 훔쳐보기 업자라는 뜻인데, 주인공들은 도청, 미행 등 감시를 전문으로 하는 전문가 팀이다. 팀의 리더격인 주인공은, 관음증 환자이자 한쪽 눈이 의안인데, 자신의 말로는 그 눈으로 사람의 내면을 본다고 한다. 작업을 하면서 접하게 되는 수많은 지저분한 모습들에 대해서, 늘 자신의 감정을 배제하고 관찰자의 시점을 고수하며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을 발휘한다.

현대 일본이라는 나름대로 개개인이 정치적 및 문화적 자유를 누리는 사회지만, 여전히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의심하고, 권력의 우위를 노리고, 부패부터 기이한 성벽까지 상대의 치부를 감시를 통해 캐내고자 한다. 캐내는 각종 은밀한 프라이버시 영역의 정보보다도, 그렇게 누군가의 것을 어떻게든 훔쳐내서 자신의 도구로 사용하고자 하는 그 욕망의 모습들이 어떤 면에서 더욱 섬뜩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것을 주인공은 묵묵하게 최첨단의 기술문명과 탁월한 재주를 동원하여 실행에 옮겨줄 뿐이다.

그렇다면 감시가 사회의 근간인양 여러 층위에서 일상화되는 이런 모습들을 거스를 수 있는 방법은 과연 있는가. 상호 감시를 통한 정보권력 격차의 감소, 공적 영역에 대한 감시 강화와 사적 영역에 대한 감시 금지라는 균형 원칙. 혹은 과격한 투명성으로 감시의 필요성을 상쇄하기 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사람들이 열심히 이런 소재들을 읽어낼 수 있는 만화작품들을 열심히 읽고 현실을 되돌아보는 것이 가장 먼저 필요할 듯하다. 다들 열심히 읽는지, 감시라도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당연히 농담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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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만화잡지 격월간 [싱크]. 이미지프레임 발간. 테마별 만화들을 소개하며 인문사회적 화두를 넌즈시 이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칼럼.)

Copyleft 2012 by capcold. 이동자유/수정자유/영리불허 — [부디 이것까지 같이 퍼가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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