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베 현상의 여러 층위들(온갖 거시적 사회지표부터 미시적 개별 개개인 사연까지 얼마나 다양하겠는가) 가운데, 현실적 대처 – 상위 원칙들이고 뭐고 그냥 통쾌한 발본색원의 꿈이 아니라 – 에 대한 논의를 위해 하위문화라는 측면에만 좀 더 시선을 집중해본 글.
게재본은 여기로: 일베는 무엇에 저항하고 어떤 세상을 꿈꾸는가 (슬로우뉴스 / 14.9.25.)
일베, 하위문화로서의 극우
일베라는 유머 커뮤니티가 인터넷상에 횡행하는 극우성향을 지칭하는 일반명사로 사실상 굳어버린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이미 언론, 학술, 개인매체 등 담론판의 여러 공간에서 많은 논의들이 오갔기에 식상할 법도 한데, 세월호 유가족 단식 조롱 “폭식투쟁” 이벤트 덕분에 새삼 다시 주목받고 있다. 특히 이번에는 이들이 오프라인에서 행동을 했다는 점에서 일본 재특회와 유사성이 더욱 주목받고(=걱정거리가 되고) 있는데, 아무래도 주로 극우적 사고의 ‘결집’이라는 측면에 주목하는 식이다.
극우 사고의 결집은 물론 중요한 일면이지만, 개인적으로는 현재 일베로 대표되는 일련의 모습들을 더 흥미롭고 위험하게 만드는 살짝 다른 부분에 주목하게 된다. 바로 특정 소재 하위문화로 결집한 어떤 성향이 극우화’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인데, 그에 대한 몇가지 가설과 대처방안을 살펴보고자 한다. 당장 2010년대 초반 이글루스의 ‘뉴스비평 밸리’만 해도 애초에 단련된(?) 넷극우들이 결집한 공간이었지만, 일베의 경우는 막장유머를 즐기는 사람들이 모여 놀다가 그중 상당수가 극우적 논리로 무장을 하게 된 공간에 가깝다(그렇기에 극우 정치 이념 하나만으로로 단순화시키지 못하는 다층성을 지니곤 한다).
[] 하위문화라는 속성
사실 PC통신 서비스들의 익게에서 디씨인사이드의 막갤, 코갤 등을 건너 결국 일베까지, 국내 하위문화와 극우화의 교차점은 은근히 여러번 이미 존재했다. 어째서 그럴까 논하려면, 우선 하위문화의 흔한 메커니즘에서 시작해 볼 수 있다.
- 하위문화는 쉽게 대항문화의 속성을 띄곤 하며, 깊숙히 들어갈수록 당대에 주류 도덕 권위로 받아들여지는 어떤 것들에 대한 일탈적 저항 정서가 강하다.
- 그런 저항으로 도래할, 상상력을 풍부하게 발휘한 어떤 어렴풋한 이상향을 둔다.
즉 어떤 하위문화의 속성을 보려면, ‘무엇을’ 도덕 권위로 상정하고 저항하는 가, 그리고 그 결과 ‘어떤 세상을’ 동경하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일베 또한 마찬가지다.
1. 현재 한국사회에서 도덕적 권위의 위치로 상정되곤 하는 것은 크게 두 방향인데, 하나는 장유유서 운운하는 ‘전통’ 질서고, 다른 하나는 민주적 가치의 긍정이다(민주화 역사에 대한 예의든 현대적 양성평등이든 여러 차별금지든 노동권이든).
그런데 두 가지는 사회적 정착의 강도가 상당히 다르다. 전자는 어기면 패륜으로 일컫어질 정도로 혹독하게 굳어있지만, 후자는 애매하다. 이쯤에서 압축근대화/압축민주화 현실을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는데, 바로 각종 현대 민주적 가치의 도덕률이 큰 틀에서는 형식적으로 소개되어 있으나 사회적으로 충분히 “합의”되어있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좀 더 기술적으로 표현하자면, 그런 가치들의 당위에 대한 선포는 있으나 지배 담론 및 제도로 안착한 불가침 영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장 교육현장에서조차 보편 인권이 교과서에는 명시되지만 학교 생활에는 적용을 거부당하는 기묘한 중간 상태 아니던가. 광주항쟁 간첩 음모론을 TV방송에서 떠들어대도 제재가 있는둥마는둥 아니던가. 다시 말해, 민주적 가치들이 도덕으로서 이미 꼽히고 있으나 온전히 정착한 것은 아닌 애매한 중첩 상태에 놓여 있다.
이런 상태에서 기성 도덕으로 인식하는 것에 대한 저항은, 저항에 대한 리스크가 큰 전통 도덕률보다는(물론 대충 용납하는 정도지 아예 거스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민주적 가치에 대한 공격이 훨씬 쉽다. 그것도 이미 이뤄낸 것이 아닌, 아직 이뤄내려고 싸워야 하는 진보적 가치들에 대한 저항이기에 더욱 그렇다. 민주적 가치를 내세운 사회 진보의 ‘추구’ 자체를 지배적 도덕으로 간주하여 저항하는 꼴인데, 그런 저항이 극우 논리와 중첩되어버린다. 그런데 한국사회 기준에서 극우 논리가 담지하는 것은 바로 가부장적 권위주의, 개인능력 만능론, 소속에 기반한 차별의 옹호 같은 것들이고, 도덕률 저항의 극단에서 오히려 권위주의에 복속하는 모순적 결과가 발생한다.
눈을 돌려 보면, 미국 막장 하위문화의 산실인 4chan의 /b/ 게시판 역시 여러 최악 수준의 쓰레기 멘트들이 넘친다. 하지만 차이가 있다면, 이 곳 사용자들이 대충 용납하는 도덕률은 그간 미국에서 보편적으로 자리 잡은 수준의 민주적 가치고, 주로 저항하는 도덕률은 정숙함(decency)이라는 점이다. 누구나 무슨 말이든 다 하고 누구에게나 까이는 아나키즘적 공간을 목표로 하고 있고 (4chan 운영자 m00t의 TED 발표가 이런 자세를 명확하게 요약해주고 있고, 4chan을 매개로 활동을 시작한 해커 그룹인 어나니머스의 지향성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러다보니 인종차별, 여성혐오 멘트를 날리는 사람도 많은데 다른 유저들이 그것을 기회 삼아 그를 격하게 까버리는 풍경도 흔하다. 자정작용이라기보다는, 독이 독을 누르는 격이다.
2. 그렇다면 저항을 통해 꿈꾸는 더 나은 세상은 또 어떤가. 그들 자신의 목소리를 정리하자면(그런 내용을 성실하게 모아낸 책으로 [일베의 사상]을 추천) “모두가 평등한 병신의 세상”을 표방한 바 있다. 하지만 자신들의 활동 동기를 잘 담아냈다고 그 동네에서 큰 호응을 얻은 만화 “일베충의 일기“를 다시 들춰보면, 그 “평등”은 무슨 사회 관계를 합리적으로 재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신들의 권리회복이라는 의미다. 작품이 그려내는 설명에는 기본적으로 약자-강자 내러티브가 존재하고, 약자에 대한 연민이 넘친다. 그런데 그 약자란 민주화를 내세운 도덕 권위에 대한 복종을 거부해서 핍박받는다고 느끼는 자기 자신들이다. 그들이 힘을 뭉쳐서 자리를 찾는 아주 그림 같은 해방서사다.
일베 사용자들의 약자-강자 정체성 이입을 논한 박권일은 그들에게서 두 가지 인식으로 ‘강자선망’과 ‘피해자되기’를 관찰하고, 두 가지가 모순이 아니게 되는 지점을 ‘타락한 능력주의’라는 한층 추상화된 이념 층위에서 찾은 바 있다. 하지만 앞서 소개한 만화에 이미 암시되었고 그냥 정체성 층위 자체에서 간편하게 그런 모순을 뛰어넘을 수 있는 매끈한 통합된 인식이 있으니, 바로 “나는 강자여야 했는데 사정에 의해 위축된 약자”라는 것이다. 보편적 일상어로 치환하면, “내가 이런 대접이나 받을 사람이 아닌데” 정도로도 표현할 수 있고, 해방서사의 훌륭한 밑밥이다. 이 경우 최종지향점은 당연히 “내가 대접받는 세상”이다.
이런 인식이 동류 그룹에서 내부성을 다지며 숙성되고 증폭되면, “내가 당연한 대접을 못 받는 원인, 즉 잘난 것도 없는데 부당하게 좋은 대우를 받는 자들이 나쁘다”는 인식으로 타락하기에 안성맞춤이다. 특히 한창 저항하고자 하는 기성도덕(앞서 논했듯, 민주적 가치)에 결부되어 등장하는 이들이면 더욱 우상 파괴의 쾌감이 큰데, 호남계, 진보 활동가, 나와 안 사귀는 여자, 세월호 유족 등 대상은 무궁무진하다. 그런데 앞서 꼽았듯 이들에 대한 사회적 불리함은 아직 실제로 해결되지 않은 상태라서, 이들에 대한 공격은 진보적 변화를 거절하는 극우와 자연스레 맞닿는게 된다.
[] 무엇을 할 것인가
이런 식의 접근을 시도하는 이유는 무슨 학문적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 하위문화로 인식하여 대처하는 방식의 효용을 역설하기 위해서다.
우선, 특정한 하위문화는 없앨 수 없다. 마음대로 원천봉쇄해서는 안된다는 표현의 자유 원칙 같은 규범론을 떠나서, 그냥 없애는 것이 불가능하다. 없앤다고 나서봤자 다른 공간에 비슷한 무언가가 다시 생겨날 따름이다.
또한, 하위문화라는 속성에서 볼 때 이들의 정치 행동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는데, 전면으로 나서고 진지하게 대외적 행동을 할 수록 더 이상 재미있는 하위문화가 아닌 평범한 극우집단이 된다는 것이다(이미 그들에 대한 일반 대중의 인식도 상당부분 그쪽으로 갔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다고 진지함을 포기한 조롱 이벤트는 실체적 운동효과 없이 단순히 대내적 단결과 대외적 반감만 만드는 감정적 성과에 머문다. 반면 이런 한계가 극복되는 문제적 순간은, 주류 집단이 이들의 홍보력을 노리고 손을 잡는 경우다.
이런 인식 위에서 할 수 있는 대처는, 이들을 하위문화이기에 그나마 내버려두는 범위에 머물도록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위문화 영역 밖으로 나오면, 그만큼의 책임도 감수해야한다는 교훈을 확고하게 정착시키는 것이다. 이런 개념을 실천하는 방법은 매우 명확하다. 첫째, 하위문화로 킬킬거리다가 더 진지하게 마음먹고 행동으로 나온 이들에 대해서 법적 소송으로 일일이 책임을 부과하는 것이다. 둘째, 그들이 우익 정치세력의 비호 아래 들어가 파트너십이 이뤄지지 못하도록, 현실적인 대중정치세력에게는 도저히 옵션이 될 수 없음을 여론으로서 그들에게 확고하게 인식시키는 것이다. 실무에서는 여러 경계선 사례들이 오가겠지만, 기본 원칙은 대략 이런 방향이 바람직하다. 이런 것을 더 수월하게 하기 위해 법조 절차 도움 주기의 체계화, 이들이 공직에 연루되는 것이 어불성설임을 명확히 하는 망언 자료들의 체계적 공개 등의 구체적인 대처 과정이 이어질 수 있다.
그런 대처가 과연 효과가 있을 것인가. 여러 소송으로 책임을 지게 되었으며 현실 정치세력이 활용하기에는 곤란한 인물로 이미지가 잡히다보니 일부 극우 동네 말고는 더 이상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게 된 한 미디어사업자의 사례를 떠올리자면, 성공 가능성을 어느 정도는 점칠 수 있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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