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퀴어를 가장 앞장서서 반영한 대중문화 [기획회의 475호 / 181105]

!@#… 출판전문지 기획회의의 특별 기획 “퀴어문화와 출판”에 한 꼭지로 참여한 글.

만화, 퀴어를 가장 앞장서서 반영한 대중문화

김낙호(만화연구가)

한국에서 1980년대가 유신의 종말과 함께 대중문화가 꽃피기 시작한 시기였다면, 90년대는 아예 탈권위주의와 “신”세대 담론에 힘입어 더욱 사회적이며 거침없고 세련되게 진화하던 시기였다. 당시에 본격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여러 사안 가운데 하나가 바로 동성애 인권으로, 혁신적이었던 신문물인 PC통신의 연결성에 힘입어 온라인 동호회, 그리고 각 대학의 동아리로 조직화를 이뤄가며 “퀴어”, 또는 그 한국형 해석인 “이반”의 문화를 알려나갔다. 그렇지만 한국의 주류 대중문화 일반으로 기반을 확장하여 당당하게 자리매김하는 것은 여느 인권과 문화적 사안과 비교해도 그저 더딜 따름이었다. 다만 하나의 예외 분야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만화였다.

만화에서 퀴어 문화를 이야기할 때 흔히 먼저 언급되는 것은 BL(보이즈 러브), 또는 그 장르가 국내에 뿌리내렸던 당시의 경향성을 반영했던 용어인 야오이다. 호쾌하리만치 통속적이고 극적인 로맨스를 진행하되 그 주인공들을 동성으로 설정하여 탐미성이든 자극적 몰입이든 혹은 유머든 추구하는 접근으로, 전문잡지는 물론이지만 특히 동인지 문화를 통해서 해당 장르가 발달했던 일본만화의 개방이 더욱 확대된 90년대 후반에 국내에 널리 보급되었다. 야오이물의 즐겁게 불온한 성적 상상력은 특히 여성 청소년 가운데 만화문화에 몰입한 층에게 큰 인기를 구가했다. 다만 이 장르는 사회적 금기 요소를 통해서 오락성을 극대화하는 판타지에 몰두할 뿐이지 사회적 현실로서의 동성애는 사실상 완전히 배제했던 약점이 있다. “퀴어”라는 명칭 자체가 성소수자들의 사회적 투쟁의 일환을 담아내는 것을 고려할 때, 큰 한계로 볼 수 있다.

사실은 오락 요소 수준이 아니라 좀 더 본격적으로 퀴어문화를 담아내는 작품들도 주류에서 90년대 내내 등장했다. 남자 청소년들의 방황과 동성애 관계를 담아낸 <Let 다이>(원수연), 탐미적 화풍으로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을 교차시키며 동성애 요소를 녹여내는 <호텔 아프리카>(박희정), 90년대 초반 대학문화의 변화를 그려내며 페미니즘과 퀴어 요소를 담아내는 <사춘기>(이진경), 성적 지향이 모호한 주인공들 투성이인 <쿨핫>(유시진) 등이 대표적이다. 당시의 순정만화계는 전문 잡지의 증가와 함께 동시대적 문화적 감수성과 신선한 표현력을 지닌 만화가들이 대거 활동하며 성장을 이루던 시기였고, 동성애는 성“소수자”로서의 현실적 측면 때문에 갈등 요소 풍부한 소재가 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2000년대에 들어서며 사회 일반의 퀴어 담론 확대와 함께 계속 성장했다. 한편으로는 일본만화의 수입에서도 야오이 장르의 오락적 동성애 차용 너머 본격적으로 소수자성을 현실적으로 건드리는 <뉴욕뉴욕>(마리모 라가와), <서양골동양과자점>(요시나가 후미) 등이 적잖은 호응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성인 순정만화잡지의 부활을 기치로 내건 격월간 <오후>에서는 아예 주인공이 드랙퀸(주: 내면의 여성성을 드러내고자 화려한 여성 분장을 하고 퍼포먼스를 하는 남성의 속칭)인 <미스터 레인보우>(송채성)이 연재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인터넷의 급격한 보급에 힘입어 개인 창작자들이 한층 자유롭게 퀴어 소재를 사용하고 결국 출간에 이르는 모델도 생겨났는데, 2006년작 <변태천사>(변천)가 좋은 사례다.

만화의 주류가 전문화된 종이잡지에서 포털사이트 연재 중심의 웹툰으로 옮겨오던 초창기에는, 모두를 무난하게 만족시키는 소재의 만화만 남을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그와 정반대로 양적 팽창 흐름 속에서 다양한 내용이 허용되는 상황이 생겼고, 퀴어 또한 그 중 하나였다. 2008년에 연재를 시작한 <어서오세요 305호에!>(와난)은 이성애자가 동성애자와 함께 룸메이트를 하는 대학가 시트콤으로, 편견 많던 흔한 이성애자의 시각에서 성소수자들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자연스레 그려내며 오히려 보편적 호응을 이끌어냈다. 한편 당사자의 시각에서 일상물을 만들어낸 <모두에게 완자를>(완자)는 극적 재미 요소는 부족해도 성소수자 생활의 디테일을 끌어올렸다.

포털에 소속되지 않고 전문분야를 특화하는 다양한 웹툰 서비스들의 등장 역시 퀴어 만화의 판을 넓혔다. 성인취향을 표방하며 2013년에 출범한 레진코믹스가 <거울아, 거울아> 등 퀴어물을 꾸준히 취급해왔고, “까만봉지”라는 이름으로 아예 성소수자 독자들만 공략하겠다는 전문 웹툰 서비스도 등장했다. 잡지의 쇠퇴와 함께 오히려 작가주의가 강조되는 단행본이 돋보이게 된 종이 출판의 영역에서도, 퀴어 성향과 한국의 가족문화를 담담하게 갈등시키는 뛰어난 현실감의 <환절기>(이동은, 정이용)가 비슷한 시기에 출간되었다.

90년대부터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만화가 퀴어라는 소재를 재빨리 차용하고 반영하며 주류화할 수 있도록 해준 여러 맥락들이 앞으로도 맞아 떨어지리라는 보장은 물론 없다. 하지만 만화가 퀴어문화의 효과적인 무대로 인정받는 상황은 꽤 지속될 것 같다. 성소수자 혐오 단체에서조차 자신들의 악의를 전파하기 위해 <동성애자의 양심고백>이라는 웹툰을 제작했을 정도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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