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식 소통의 풍경: 유시진의 <온>
역설적이지만, 우리들에게 가장 일상적인 풍경이란, 일상적인 삶의 방식 자체까지 후다닥 바뀌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가장 뼈져리게 느낄 수 있는 분야 가운데 하나는 사람과 사람이 기술을 매개로 하여 소통을 하는 방식, 즉 통신이다. 십수년전에 만들어진 <영웅본색>같은 영화를 비디오로 볼 때, 조직의 간부가 은퇴한 적룡을 조직으로 다시 불러들이기 위해서 당시에는 부와 명예의 상징이었던 휴대폰 – 아니 이건 숫제 대청마루 디딤돌이다 – 을 건네주는 장면을 보면서 실소를 터트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세상인 것이다.
<마니>, <쿨핫>등의 작품들로 강력한 팬층을 형성한 만화가 유시진은 소통이라는 문제를 중심소재로 사용해 왔다. 사람들간의 근본적 차이점,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벽, 그 것에 다시금 안주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종종 매우 덤덤하고 소극적인) 노력. 이러한 모티브들이 작가 특유의 차갑고 경직된 화풍 속에서 반복된다. 순정잡지 ‘오후’에 연재중인 그의 작품 <온>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주인공들, 그리고 어쩌면 그들의 전생이었을지도 모르는 환타지 세계의 이야기가 교차하는 만화다. 현대의 주인공 중 한명인 제경은 직업이 환타지 소설가인데, 이것은 소통이라는 하는 측면에서 볼 때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우선 한국에서 환타지소설 작가라는 직업이 본격적으로 대두된 배경은 90년대 중반의 PC통신 소설 붐이다. 통신공간 속에서 젊은 세대는 출중한 장르적 상상력과 공개 게시판에서 펼쳐지는 연재에 갈채를 보냈다. 나아가 작가와 독자, 현실과 환상 사이의 간극은 여러 의미에서 점점 더 좁아졌는데, 통신이 아닌 전통적인 종이 출판물의 형태로 나오는 경우까지도 그 경향은 계속 확산되었다. 다소 비약해서 말하자면 주인공의 직종 자체가 90년대 이후의 소통방식, 통신문화의 상징적인 존재인 셈이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더 지난 오늘날, 환타지 소설가인 주인공이 컴퓨터로 원고작업을 하다가 인터넷에 연결해서 메신저로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일상적인 풍경이 되었다. 90년대 후반까지만해도 여러 만화작품에서 볼 수 있었던 삐삐가 핸드폰으로, 나아가 이 작품속에는 CDMA2000 방식의 폴더형 휴대폰으로 바뀐 것도 시대의 풍속도다. 하지만 동시에, 주인공 제경은 여전히 자신이 진짜로 관심이 가는 대상에 대해서는 술을 사들고 집으로 쫒아가서 직접 대면하는 고전적인 소통방식을 선호하기도 한다. 그래, 그것이 200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다.
이렇듯 사실 통신기술의 발전은 사람 사이의 소통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기보다는 단지 선택의 폭을 넓혀주었을 뿐이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이 소통을 하고 싶다는 의지의 핵심은 오늘날도, 아마도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듯 하다. 그 앞에 어떤 난관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글 김낙호/만화연구가·웹진 ‘두고보자’ 편집위원)
[경향신문 / 2004.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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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원출처는 경향신문 토요 만화 전문 섹션 ‘펀’의 칼럼인 <만화풍속사>입니다. 격주로 박인하 교수와 번갈아가면서 쓰고 있는 일종의 태그팀 같은 것이니 만큼, 같이 놓고 보면 더욱 재밌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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