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래는 VOD 출시되자마자 구매하여 반복 관람했으나, 미국 개봉 후 극장 관람까지 하고 써보는 우주명작 [기생충]에 관한 몇가지 무순위 단상. 온갖 영화평들, 관련 토론들이 한국에서는 이미 개봉 초기에 다 이뤄졌으므로, 이미 누군가 어디선가 했을법한 이야기들. 이야기 전체를 다루므로, 당연히 스포일러 만발이다.
- 이 영화에 대한 감상의 폭이 갈릴만한 요소는, 기정이 가족 모두에게 스며있는 것은 바로 “반지하방 냄새”라고 지적할 때 바로 그 냄새를 떠올릴 수 있는가 없는가 여부일 듯하다. 벽에 스민 눅눅한 곰팡이, 환풍 안되어 찌든 음식내, 빨래가 빨리 안말라서 남는 쿰쿰함, 그런게 섞이며 생기는 어떤 은은한(…) 갑갑한 냄새. 나중에 박사장이 그걸 걸레 빨면 나는 냄새라고 표현하는 것 자체도 그 냄새의 맥락을 모르며 강도를 과장하게 되는 계급 격차의 단적인 표출.
- 가진자 못가진자의 대비가 아니라, 더 세분화되는 상대적 개념이 일품이다. 더 못가졌는데 오히려 가진자 분위기 흉내에는 더 잘 적응한 어떤 계층. 아직 덜 못가졌는데 이제 막 새로 적응하는 어떤 이들. 그야말로 원래 제목으로 생각했다는, “데칼코마니”다.
- 대사를 통해서 사업을 벌렸다 망한거라는 언급이 주어지는데 (아마도 규모있는 직장, 거기서 나오고는 대사에 언급된 치킨집, 망하고 대만카스테라, 망하고 발레파킹 요원…), 그보다도 더욱 강고한건 그 인생경력이 배우들의 연기에 스며있는 점이었다. 기택이 고집하는 교양있는(사실은 교양있는 자기 모습으로 자존심을 지키려는) 말투. 여러차례 낙방했지만 연대가 자기 자리라는 기우의 뚜렷한 인생 희망 및 그럭저럭 잘 사는 듯한 친구가 있었던 고교 시절의 흔적. 그 친구가, 미대 희망하는 기정이 미대 입시 학원에 다닐거라고 무심코 생각하는 모습. 문광은 너무 엄청난 관계로 따로 언급할 필요도 없다.
- 계급 격차 너머 계급 이동에 관한, 그 중에서도 계급 하방 이동에 관한 이야기. 주어진 상황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가족의 이야기로 시작해서(소독약 휘날리는 상황에서도 집중력 넘치게 피자박스 접기 영상을 보며 열심히 일을 하는 기택을 보라… 결과는 죄다 불량이지만) 계급 상승을 위해 술수를 벌이는 이야기로 펼쳐진다. 그런데 갈수록, 상승 욕구 자체 너머 추락한 계급에 적응해버리는 것에 대한 공포가 드러난다. “계획이 다 있구나”의 계획이란, 계급 상승의 희망으로 보인다. 하지만 “최고의 계획은 무계획”에서 드러나는건 하강에 대한 날 것 그대로의 공포와 무기력. 특히 자신의 거울상과도 같은 문광 남편의 상황, 지하실의 생활에 완전히 적응한 것을 목도하며(그도 한 때는 지하실에서, 고시 공부를 했다!) 기막혀하는 기택의 모습이 백미다. 그야말로 오늘날 우리 사회의 자연스러운 아귀지옥 패턴의 은유.
- 동경하는 모습의 흉내라는 모티브가 집요하게 반복된다. 기택 가족이 기회가 되자 박사장 라이프스타일을 흉내낸다. 문광 가족이 건축가 남궁 선생의 라이프스타일을 흉내낸다. 무엇보다, 기우가 하는 모든 것이 자기 대학생 친구 민혁의 흉내다. 자신들의 원래 무언가를 물리적 환경으로 상실했을 때, 그것을 채우는 것은 결국 막연하게 더 잘나보이는 것을 흉내내며 나도 저만큼은 한다, 나도 저 판에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자기 만족.
- 계급적 연대가 이뤄지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도 뼈아픈 토막이 이야기의 구도 속에서 넌즈시 던져진다. 처지가 비슷한 이들이 여럿 존재하는 것 만으로 연대가 이뤄진다는 생각은 턱없는 환상이다. 그런 이들이, 힘을 합쳐야 무언가를 쟁취할 수 있다는 공동체적 효능에 동의해야 연대가 겨우 시작되지, 그게 아니면 고작 한정된 자원을 놓고 경쟁을 벌일 상대일 뿐이다. 파국의 다음날에 기정과 충숙이 이야기하던 “잘 되는 쪽으로다가 어떻게 해보”자는건, 그저 개별적 온정으로 나눌 수도 안 나눌 수도 있는 연민과 적선이다. 말미에 기택은 박사장이 근세에게 던진 모멸의 표정에 결국 폭발하여 칼부림을 할 만큼 감정적 동조를 해버리고 만다. 문광에 대한 장례도 힘들여 해준다. 하지만 그냥 그 뿐이다.
두 가족 사이에 연대가 이뤄질 수 있는 운명공동체의 순간은 한쪽 가족이 손 들고 벌 서고 있던 그 때 뿐이었다. A측은 B측의 사기에 대한 증거가 있고, B측은 A측의 지하실 무단 거주 증거가 있고. 하지만 핸드폰을 빼앗기고 포박당한 순간, A측은 아무 레버리지가 없다. 끔찍하게도,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돌을 들고 지하로 내려가 살상을 하려는 기우의 계획인 것이다. 연대를 놓친 관계의, 지옥도.
- 아무래도 미디어쪽이 다루는 분야다 보니, 사적 영역과 공개 영역의 무너짐에서 생기는 비극도 특기할 만했다. 기택의 모멸감에 불을 붙인 것은 자신에게 들리도록 전제된 것이 아닌, 박사장 내외의 배게 대화였다. 즉 남들이 가장 사적인 장에서 하는 이야기였고, 그들은 그 불만을 이유로 이쪽에 불이익을 줄 생각이 없었으며, 그 이야기를 엿들은 쪽이 오히려 침범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맥락의 방벽으로 변호할 수 없을만큼 사적인 것과 공개되는 영역의 경계가 흐려지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미디어 현실이기도 하다.
- 각자 아는 만큼씩만 보이기에 생기는 부조리가 또 흥미로운 테마. 관객은 그 이면에서 차곡차곡 쌓여나간 감정의 맥락(!)을 지켜봤기에 파국적 결말은 그야말로 피할 수 없는 자연스런 귀결이었다. 하지만 박사장 가족을 포함하여 이야기 속의 사회 일반 대부분 사람들에게, 이 사건은 이해불가한 괴사건, 즉 온화하던 고용인이 그야말로 갑자기 칼부림을 한 것이다. 원한 관계도 아니고 무언가 강도상해도 아니고 심지어 사건상황 안에서 실랑이조차 없었다(냄새와 표정 뿐이었기에). 파티에 난입한 노숙자는 더욱 더 어리둥절한 요인이다. 우리가 보게 되는 현실의 사회적 부조리의 태반에도 결국 어떤 논리와 감정의 전개 속에 생겨나는 비극이 가득할 터.
- 이동진 평론가의 말대로, “명징하게 직조된” 표현이 단연 압권이었다. 공간의 높이가 계급으로 치환되는 느낌을 잘 살려낼 뿐만 아니라, 위에서 밑으로 흘러내리는 물의 무서운 모습, 거주지에 따라서 공간의 몰입감은 물론 아예 소리조차 바뀌는 경험까지(이건 확실히 극장에서 볼 때 뚜렷햇다). 그러나 넘치는 명장면 속에서도 하나를 꼽아야한다면, 역시 물난리가 난 집에서 기정이 변기 위에서 담배를 피는 장면이다. 박사장 집에서 고급 욕조에 있던 모습과 다르지 않은 우아함이지만, 역류하여 넘치고 세어나오는 폐수를 온몸으로 눌러 막는 상황. 그런 지경에서도 천정에 꽁쳐놓은 담배를 꺼내서 피는 것을 선택하는, 아직은 힘차게 지켜나가는 인간적 존엄. 반복 관람할수록 울컥하게 만드는 대목 가운데 하나다. 마지막의 [브라질]식 결말과 함께.
- “충숙이 언니도 원래는 착한 사람인데..” 그걸 어떻게 알겠는가. 그냥 지하실 문 한번 함께 열어준 것 뿐인데. 게다가 그 앞의 싸움 와중에서는 유리할 때는 언니동생 불리할 때는 이년저년으로 호칭이 널뛰기했었다. 어떤 의미에서, 근본적 선의라는 것의 허망함을 드러내는 작지만 묵직한 대목이 아니었나 한다. 앞서 이야기했던, 연대의 기회를 날려먹는 것의 비극성이 더욱 뼈저리다.
!@#… 해외판 한정 감상: 영어 자막을, 정말대단히무지하게 신경써서 만든 것이 좀 놀라웠다(달시 파켓 만세). 너무 문화권을 통째로 바꾸지 않는 한도 안에서 상황의 느낌을 번안하는 외줄타기가 일품. 심지어 기택의 교양 폼 잡는 말투도, 평범한 문장 속에 문학적 단어를 넣는걸 통해서 구사해낸다(예: “참으로 시의적절하다” => “It’s a very opportune gift”). 한국인의 영어 남용 부분을 이탤릭체로 처리하는 섬세함. 하지만 이렇게 날고 기는 자막임에도, “자다”와 “처자다”의 차이를 구현하지는 못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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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처음 봤을 때부터 의문이었는데, 그 ‘대만 카스테라’ 부분은 영자막에서 어떻게 번역이 됐나요?
Taiwanese cake shop으로 나왔습니다. 사회적 맥락은 전달이 어려웠지만, 전문성 없이 뭔가 도전했다가 망한 뉘앙스는 확실히 전달되었죠.
기생충이 해외에서 호평받는다는 이야기 들을 때마다 그 부분이 어떻게 번역됐나 항상 궁금했었는데 타이와니즈 케이크샵이었군요. 답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