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화와 저널리즘이라는 일관된 주제에 천착하는 연재물, 월간 <인물과 사상> 2005년 12월호 수록 원고. 아시다시피 격월간으로 기고중. 이 페이스면 내년 말 정도면 단행본 분량이 쌓일지도 (분량만 쌓이면 뭐하나, 아무도 책내자는 욕심이 없는데).
!@#… 1월 중순에 발간 예정인 2월호에는 당연히, 황랩 사건을 바라보았던 여러 만화들의 모습들에 대해서 쓸 예정(시사뒷북에 정신이 멍해지고 멜랑꼴리에 구토를 할뻔했던 경험들을 살려서…).
========================
신문을 읽지 않는 세상의 시사만화 읽기: 온라인의 경우
김낙호(만화연구가)
시사만화, 만평은 근대 신문과 함께 참 오랫동안 동고동락해왔다. 신문의 중요한 일부로, 경우에 따라서는 수구 신문에서 수구 이데올로기의 나팔수로, 다른 (소수의) 경우에는 진취적인 신문기사들 속에서 진짜 삶의 페이소스를 담아내는 매력을 발휘하기도 해왔다. 이데올로기적으로는 구리지만 신문의 지면 속에서 잘 어울려 들어가서 더 문제인 만화들, 진보적이지만 작품을 담아내고 있는 신문지면 자체가 너무나 영향력이 미미해서 대중과 못만난 만화들이 널렸다.
하지만 이제, 시사만화의 영역과 역할은 새로운 변화의 계기를 맞이해야 할 듯 싶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언론학 연구 결과들이 보여주듯이 가면 갈수록, 특히 세대가 내려갈수록 더욱 더, 사람들이 신문을 안 읽기 때문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과연 시사만화의 미덕은 어떻게 새롭게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인가. 신문과 함께 쇠락해버릴 운명인가, 아니면 자신만의 장점을 살려서 멋진 표현 도구로 새롭게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인가. 특히 항상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 전략에 약했던 진보 진영 – 아니 비 수구 진영에 있어서 이것은 대단히 실용적인 문제다.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우선 미디어로서 아직도 급부상중인 ‘온라인’ 이라는 공간을 놓고 한번 방향을 찾아보고자 한다.
맥락의 쇠락
시사만화는 기본적으로 사설이다. 언론미디어의 일부로서 언론의 기능을 하되, 사실보도가 아닌 명백한 주장을 전달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현대 언론 윤리관의 틀 속에서, 짐짓 객관적인 척 무게를 잡느라 다른 ‘문자로만 이루어진’ 사설 코너에서는 표현 못하던 진정한 진의를 내뱉을 수 있는 공간이다. 문자 사설에서는 “…과도하게 좌파적인 정책방향으로, 일반 대중에게 현명하지 못한 처사로 판단될 우려가 있다”라고 밖에 표현 못할 이야기도, 만평에서는 “너 빨갱이지?”라고 직접적으로 뱉어버릴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원래 사설이라는 것은 그것을 둘러싼 현실 정보, 즉 각종 보도가 담론 구성의 맥락을 충분히 형성해준 다음에야 비로소 힘을 얻는다. 그렇지 못한 경우라면 언론이 아니라 담벼락 낙서나 서울역 앞 광인이 나눠주는 전단지와 다를 바가 없는 단순한 배설형 외침에 불과하다. 즉 시사만화는 다른 사설들과 마찬가지로, 보도기사가 가득한 ‘신문’이라는 맥락 속에서 비로소 의미를 얻어내 왔던 셈이다. 만약 그 맥락이 사라진다면? 실제로 매일매일의 신문 만평으로 볼 때는 기발하고 훌륭했던 작품들이, 어쩌다 한번 5년 어치쯤 묶여서 단행본으로 나오는 경우들이 있는데, 대부분 특별한 임팩트를 주지 못하고 조용히 사라진다. 왜냐하면 그런 모음집의 경우, “그날 그날의 사건이 정리되어 주욱 기사로 나오는 속에서 답답하고 복잡한 마음을 한 번에 휘어 잡아주던 그 만화”라는 맥락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 요소가 빠지고 나면 대부분의 시사만화는 결국 그냥 덩어리진 단칸 카툰들, 그것도 특별히 사건 맥락을 따로 잘 짚어주지 않으면 이해조차 되지 않는 이야기들 투성이니까 말이다. 인기 스토리만화들과는 달리, 같은 작품을 재연재한다는 것은 더욱더 꿈도 못꿀 일이다.
보도의 한가운데에 있는 사설이라는 맥락이 제거된 시사만화의 유일한 가치라면 일종의 역사서로서의 가치인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일관된 흐름으로 사건의 전체적인 맥락을 짚어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을 날카롭게 반영하기보다는 단지 특정한 개별 정치인 캐릭터들에 대한 피상적인 조소와 푸념으로 일관하는 많은 ‘정치 이슈 전문’ 시사만화들의 경우, 그다지 그런 가치조차 부여하기 힘들다. 정치쑈에 올인하지 않고 진짜로 한국사회의 여러 복합적 차원들을 맥락 속으로 끌고 들어왔던 박재동의 <한겨레 그림판> 정도가 뚜렷한 예외였을 뿐이다(메이저 종합 일간지를 표방하는 신문의 시사만화 가운데, 당대 청소년문화의 핵심 아이콘이었던 ‘서태지와 아이들’의 은퇴를 아쉬워해줬던 작품이 또 있었던가). 한국에서는 아직 거의 찾아보기 힘든 신디케이트 방식, 즉 작품을 먼저 만들고 그 후에 신문사에 구입하게 만드는 경우라고 할지라도, 결국 그 작품이 개제된 신문의 맥락 속에서 판단될 뿐이다.
그런데 점점 사람들이 신문을 안 읽지만 정보에 대한 욕구는 오히려 늘어나서, 신문으로 읽을 것을 인터넷으로 보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물론 인터넷이든 뭐든 여전히 ‘조중동’의 파워는 강하니 어차피 마찬가지의 기사들을 읽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기사로 빼곡하게 꽉 짜여진 신문 지면 속에서 보는 것과 느슨한 인터넷 환경에서 보는 것은 맥락의 구성이 다르다. 각종 자유로운 편집과 커뮤니티 기능 – 즉 의견기사가 섞여있는 인터넷의 신문지면은 만평이 보도기사라는 문자의 한가운데에 파고든 오아시스 같은 효과가 돋보이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 ‘조중동’이든 ‘한경대’든 기존 신문사 사이트들의 경우 첫 화면에서부터 시사만평을 돋보이게 배치하는 편집을 사용하는 경우가 드물다. 길다란 메인화면을 통해서 소소한 주제 섹션마저도 일일이 새 기사를 명시해주는 표준적인 언론 사이트 편집방식을 놓고 볼 때, 시사만화에 대한 푸대접은 더욱 극명해진다. 전통적 언론지면 방식에서 누리던 시사만화의 맥락효과는 인터넷에서 대폭 감소하고, 그 결과 밀려나는 것이다. 포탈 뉴스 사이트의 경우는 그나마 엠파스, 네이버, 네이트 등에서 메인 화면의 하단에 작게나마 직접 클릭해서 들어갈 수 있도록 배치해서 나름의 대조를 이루고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포탈의 경우 역시, 다른 의미에서 맥락이 만들어진다. 한 신문사의 입장에 의거한 엄격한 의제설정 덕분에 이데올로기적 일관성을 가지고 있는 기사들의 맥락 속에서 기능하는 사설로서 만화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독립적인 ‘작품’으로서 만나게 된다. 사이트 연결이 아니라 아예 콘텐츠를 통째로 퍼가서 서비스하는 한국식 포탈 뉴스의 특징상 그렇게 되어있다. 조선일보 속에서 <조선만평>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조선만평>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만화의 내용을 구성해주는 시사적 지식맥락은 지극히 파편화되고 분리된다. 그나마 실질적으로 언론의 기능을 하고 있는 포탈 뉴스가 아니라, 아예 ‘펌질’을 당해서 개인 블로그 같은 전혀 새로운 공간에 옮겨가서 우두커니 남겨지는 경우라면 더욱 더 맥락은 파괴된다. 혹은 특정 신문사의 만화들을 스크랩해서 뉴스레터로 보내는 방식이라면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 완성된 담론구성체 속이 아닌 파편화된 뉴스 정보의 의미망 속에서, 전통적 의미의 시사만화는 급하게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즉 시사만화의 힘을 온라인에서 구축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이러한 맥락의 재구축이다. 어떤 방법들이 있을까.
시사만화의 포탈화
언론으로서의 맥락이 문제라면, 그리고 여전히 시사만화의 매력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면, 아예 시사만화가 메인이 되어 언론의 맥락을 만들어낸다면 어떨까. 즉 뉴스 속에 만화를 넣는 방식을 뒤집어서, 시사만화 속에 뉴스를 삽입한다면? 현재 이 모델에 가장 가까운 것은 ‘카툰저널’을 표방하고 있는 <뉴스툰>(http://www.newstoon.net) 이다. 이 사이트는 상대적으로 진보 성향을 지니고 있는 시사만화가들의 단체인 전국시사만화작가회의에서 운영하고 있는 곳으로, 회원 만화가들의 작품이 주요 콘텐츠다. 전통적 신문들의 짜여진 의제라는 경직된 맥락으로부터 벗어나, 시사만화들을 서로 한 지면으로 합쳐서 그 자체로 새로운 언론으로 자리매김시키고자 하는 시도인 셈이다.
하지만 뉴스툰이 언론으로서 얼마나 효과적인지는, 아직 풀어야할 숙제다. 실제로 시사만화가 주가 되어 언론을 만들고자 하는 시도 자체는 해방직후의 <만화세계>부터 2000년대의 <시사펀치>까지 이전에도 여러 번 있었지만, 결국 대부분 실패한 이유는 역시 정보성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사설, 즉 주장만 하나 가득 듣기 위해서 신문을 보는 것이 아니라 뭔가 ‘(시사적인) 정보를 얻었다’는 느낌을 원한다. 그런데 만화를 볼 때의 약속이자 자유로운 표현의 도구인 “약간 좀 과장하고 단순화시키고 뻥을 섞어도, 대세에만 지장 없으면 된다”라는 측면은 이 경우에 약점으로 작용할 수 밖에 없다. 즉 언론 매체로서의 매력이 감소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종이가 아닌 웹사이트인 <뉴스툰>은 이전의 선행 시도들과 어떤 차별점을 둘 수 있는가? 유감스럽게도 아직은 확실한 단초가 보이지 않는다. ‘뉴스브리핑’ 코너 등에서 만평과 함께 특정 사건에 대한 간략한 요약을 해주는 시도가 엿보이기는 하지만, 사건 자체에 대한 정보를 주기보다는 ‘만평을 설명해준다’는 느낌이 강해서 기사로서의 매력은 떨어진다. 다양한 관련정보 링크를 통해서 정보망을 구축해주기보다는, 자체 기사로서 해결하려고 하는 종이지면 식의 발상인 것이다. 저작권에 대한 지나치게 보수적인 해석도 문제다. 마음에 드는 작품을 퍼다가 널리 알리고 싶어도 마우스 클릭과 함께 “무단전제를 금한다”는 살벌한 표어만 나올 뿐, 콘텐츠를 널리 뿌려서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온라인 스러운’ 전략이 미비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외관은 신식이지만, 기본 발상은 여전히 전통적 지면 형태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 셈이다. 시사만화를 주인공으로 하겠다는 의지나 의식 있는 젊은 작가들을 규합하는 구심력은 좋지만, 정작 저널리즘으로서의 만화의 장점을 살리는 방향의 운동으로서는 그다지 효과적이라고 보기 힘든 방식이다. 결국 실제로 필요한 것은 단순히 언론을 만드는 것 보다, 보다 근본적으로 시사만화의 기본 틀 자체를 새로운 맥락과 환경에 맞추어 재창조하는 것이다.
서사형 시사만화
새로운 변화라는 측면에서 볼 때, 시사만화의 새로운 적응을 위한 방향성은 좀 더 대중적 맥락에서 먼저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바로 형식적인 측면에서 새로운 어필을 행사하는 시사만화 형태들의 부각으로, 바로 본격적인 서사형 문법의 도입이다. 현재 이런 방식의 가장 대표적인 스타작품이라면 인터넷 뉴스 사이트 ‘미디어 다음’에서 연재되고 있는 박철권의 <시사뒷북>을 들 수 있다. 물론 이런 방식의 작품의 직계선조라면 한겨레21에서 장기연재된 바 있는 조남준의 <시사SF>, 주간조선의 히트작인 이원복의 <현대문명진단>등 시사주간지 만화들이 있다. 그리고 그 이전에는 박재동의 <목긴 사나이> 같은 변형된 신문 시사만화가 자리잡고 있으며, 더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는 등 난데없는 새로운 발명품은 아니다.
물론 단칸 방식의 만평도 충분히 서사성을 지닐 수 있으며 특히 4칸 만화의 경우 한층 발전된 서사양식을 지니고 있지만, 아예 1-2개 면을 만화 특유의 칸 문법을 응용하여 총체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본격적인 서사형 시사만화에 비견할 바가 아니다. 덕분에 캐릭터의 감정이입과 반전 등 스토리 구성이 충분히 가능한 포맷이고, 이야기 속에 아예 자체적으로 더 많은 정보를 녹여 넣을 수 있다 보니, 다른 보도기사들에 대한 맥락효과에 조금이나마 덜 의지하도록 만들 수가 있다. 즉 온라인의 경우 이러한 측면에 주목해야할 이유는, 느슨한 배경정보로 흩어져 있는 현재의 뉴스 소비 패턴 속에서도 특정한 ‘의미전달이 가능한’ 시사만화 작품으로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서사적 재미를 부각함으로써 이야기성에 굶주려있는 온라인 이용자들에게 만족감을 주는 것은 물론, 다양한 지면으로 펌질 당해서 흩어지더라도 온전하게 작품의 표현과 메시지를 살려낼 수 있는 장점이 있는 셈이다. 다만 여기에도 분명한 단점이 있는데, 그만큼 재미있는 이야기 구조를 짜기가 기술적으로 더 어렵다는 것이다. 하나의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장면’을 던져주는 것과는 달리 서사적 흐름을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역시 이 접근의 핵심은, 시사만화가 자신이 전달하려는 사건과 그것에 대한 메시지의 맥락을 스스로 쥐고 간다는 것이다. 뉴스 정보 맥락의 의미연결망 속에서 주변부가 아니라 스스로 하나의 중심 고리가 되고자 한다는 말이다. 서사화 시켜서 정보 맥락의 덩어리를 증가시키는 이러한 측면을 좀 더 발전시키면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소재와 관련된 기사 정보들을 직접 링크시켜 놓는다든지 하는 등의 보다 적극적인 방식도 차차 추구해볼 수 있는 등, 여러모로 중요한 단초를 제공하는 움직임이다. 게다가 무엇보다, 재미있는 이야기로서 전달하고자 하는 작가의 고뇌만큼, 실제로 더 ‘이야기로서’ 재미 있기 때문이다.
만인의 시사만화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온라인의 저널리즘 측면의 최고 관심사는, 누구나 쉽게 자기 지면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물론 그 지면들이 모두 동등한 인지도를 가지고 공평하게 사람들을 접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는 우선 접어놓더라도, 여하튼 제작해서 공개하는 것 자체는 확실히 용이하다). 물론 장점은 보다 다양화된 소식과 정보소스들이고, 단점은 무신경한 ‘카더라’ 통신의 범람인데, 시사만화라는 저널리즘 형태도 거기에 그대로 포함된다. 시사만화 역시 이제는 누구나 발표할 수 있게 되었고, 일개인이 만든 작품들이 대형 히트를 쳐도 이상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저널리즘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문체나 글 솜씨보다는, 과연 얼마나 ‘할 말’이 있고 그것이 얼마나 듣는 이들에게 중요한(혹은 중요해 보이는) 내용인가 라는 문제다. 아무리 정제되지 않은 글이라도 중요한 정보가 담겨있다면 정제된 쓸모없는 내용보다 더 저널리즘으로서 파급력이 있다는 것이 2000년대 내내 한국의 온라인 시민 저널리즘이라든지, 개인 블로그 같은 표현수단들이 지금껏 증명해오고 있는 바다. ‘글솜씨’와 ‘할 말’은 시사만화에서는 표현기술과 통찰/관찰력이라는 두 차원으로 치환할 수 있는데, 당연히 후자가 성공적인 파급효과를 위한 핵심이다.
표현솜씨는 빈약하지만 통찰/관찰력이 뛰어나서 화제를 모으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는 바로 한나라당 소속 이계진 국회의원의 <여의도를 오가며>다 (연재 주소: http://blog.naver.com/kjl533 )
그 반대로 표현 솜씨는 좋고 심지어 진취적인 뜻을 추구하기까지 하지만 정작 별반 뛰어난 통찰력이 담겨있지 않아서 한계를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2004년에 유명 온라인 만화가들이 진행한 탄핵반대 만화 릴레이 행사의 경우가 하나의 안타까운 사례로 기록될 성 싶다. 이러한 행사가 진행되었다는 사실 자체의 의의는 충분히 훌륭하지만, 정작 그 속에 담긴 개별 작품들의 질적 수준 차이는 명백했다. 프로 만화가이기 때문에 만화의 그림과 표현법에 능하다는 것과, ‘시사’적 식견과 통찰력을 지닌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탄핵반대 입장에 서있던 한 아마추어 대학생의 작품 <병렬연결>이 훨씬 시사만화로서 뛰어난 비유와 세상 이치에 대한 통찰력을 보여주었던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만인이 시사만화를 만들어내는 와중에서 가장 확실하게 ‘통찰력’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중앙일간지의 논설위원 내지 만평 ‘화백’ 흉내를 내지 않고 자기 눈으로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실제로 탄핵반대 릴레이 만화에서는 특별한 임팩트 없는 평범한 선전물에 그쳤던 인기 인터넷 만화가 강풀이 2005년에 5.18의 의미를 홍보하기 위해서 그린 한 서사형 시사만화가 이 지점을 명확하게 드러내준다 (만화 보기 클릭). 이 작품에서 작가는 철저하게 광주민주화항쟁을 처음 접했던 이야기, 그리고 오늘날 지금의 모습들을 온전히 자신의 생활반경과 관점에서 이야기한다. 저널리즘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훈련을 받아온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굳이 무게를 잡을 필요 따위는 없다. 자신의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세상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이미 일상생활은 충분히 정치적이고, 그 연결고리는 정보의 과잉 속에서 점점 더 가깝게 묶여 있으니 말이다. 중요한 것은 거창하고 일반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작고 개인적인 것으로 시작하더라도 확실한 통찰을 담아내는 것이다.
온라인에서 시사만화의 역할
신문 속이든 신문을 벗어나서 온라인에 새로 둥지를 틀든, 시사만화는 저널리즘이다. 비록 다소 특별한 양식의 저널리즘이지만, 기본 룰은 같다. 아직은 단독매체로서는 가능성이 발전단계 정도에 불과하지만, 온라인의 뉴스소비라는 새로운 환경 맥락에 적응하면 ‘멀티미디어’ 콘텐츠에 적합한 웹이라는 온라인 공간의 특성상 분명히 중요한 역할으로 급부상할 운명이다. 결국 핵심은 이 공간에 처해있는 여느 저널리즘의 중심과제와도 같다. 파편화된 맥락효과 속에서 자신만의 무게중심을 최대한 확보하기, 독자들의 정보와 재미의 수요를 맞춰주기, 그리고 화려한 거창한 의제설정보다는 확실한 통찰을 담아내기 말이다. 그럴 때 비로소 온라인은 시사만화에게 무덤이 아닌 새로운 장이 되어줄 것이다.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 / 동의없는 수정 불가 / 영리 불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