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의 자유와 발언의 무게 사이: 만평의 책임 [인물과 사상 0510]

!@#… 인물과 사상 2005년 10월호 수록(원래는 9월호용이었으나, 마감 시간의 문제로 – 편집부 잘못 1%, capcold 잘못 99% – 10월호에 들어감). 인물과 사상에서 하고 있는 ‘시사만화’ 이야기는  아무래도 통일된 주제를 상정하다보니 각론과 총론을 배합해가면서 쓰는 중. 그런데 개별 시리즈/작가를 해부하는 각론과는 달리, 종합적 이야기를 하는 경우에는 별로 인기가 없다. 이번에는 후자쪽 부류인데다가, 왠지 단행본으로 치면 결론 챕터에 들어가야할 듯한 내용… -_-; 하기야, 조선일보 곤란하다!라고 하면 다들 맞아맞아 하면서도, 신문의 책임은 이런 것이야!라고 하면 어려워하는 것이 사람심리.

!@#… 앞으로도 각론 분야에서는 뉴스툰이라든지, 시사뒷북 등으로 대표되는 서사형 시사만화, 박순찬의 장도리를 위시한 90년대 이후 동향… 등등, 그리고 총론 분야에서는 포털과 시사만화, 프로파간다로서의 만화, 만화와 사회참여, 한국 시사만화의 흐름(단순히 자료로서의 ‘역사’가 아닌, 진짜 변화과정) 등등 여러가지를 건드릴 생각. 확실한 틀을 좀 더하면 언젠가 단행본화할수 있을지도(누가 사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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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의 자유와 발언의 무게 사이: 만평의 책임

김낙호(만화연구가)

흔히 시사만화라고 할 때는 굳이 선화와 말풍선으로 되어있지 않더라도, 글이나 단순 삽화 위주의 여타 기사와는 달리 이야기와 메시지가 담긴 이미지로 구성된 코너 일반을 지칭한다. 특히 인터넷 신문의 경우 이미지 합성 패러디를 통해서 전통적인 양식과는 다른 만평을 종종 선보이는 등, 시사만화의 범위는 계속 확장되고 있다. 하지만 용어를 무엇으로 정의내리든 간에, 시사만화라고 하면 공통적으로 떠올리는 이미지는 무엇일까. 나쁜 의미로는 허황되고 저열하다고 욕하기 위해서, 좋은 의미로는 기발하게 핵심을 찌르는 직관력을 칭송하기 위해서 동시에 동원되는 개념이 하나 있다. 바로 “자유로운 상상력”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자유로운 상상과 표현이 만화의 핵심 이미지로 인식되다 보니 만화는 응당 자유로운 표현이 동원되어야만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즉 만화이기 때문에 오히려 상당한 수위의 표현이 사회문화적으로 허용되기도 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한 일간지에서 글로 “노무현 대통령은 무식한 깡패놈이다”라고 썼다고 치자. 아마도 금방 큰 물의가 빚어질 것이다. 하지만 조선일보의 만평을 보면, 항상 깍두기 머리에 조폭스러운 말투, 무식한 언변으로 깡패조직을 이끄는 한 만화캐릭터가 등장하고, 그 밑에는 ‘노’라고 써져있지 않던가. 그런데 사람들은 웬만하면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인다. 만화니까. 만화는 풍자고 패러디니까.

하지만 최근 수년간 만평이 법적 대응의 대상이 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 만평의 발언은 결코 성역이 아니다. 특히 각종 이미지가 홍수를 이루고 있고 온라인 네트워크가 표현과 복제와 수용의 경계를 허물어버리는 시대이기에, ‘언론으로서의 만화’의 역할이 증대되면서 더욱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사만화를 어디까지 농담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어떻게 사회적 책임을 부여할 것인가? 시사만화 작품의 가치 척도는 어디에 있는가? 공격적 만평에 과연 협박미수죄를 적용해야 할 것인가? 만평, 나아가 만평으로 대표되는 풍자적 언론 활동의 ‘책임’에 대해서 논의해봐야 할 시점이다.

만평 검열의 이면

만화가 언론으로서 기능해온 대표적 케이스는 신문의 시사만화다. 그리고 언론으로서 책임을 지는 행위의 일차적 방식은 표현에 대해서 사전 검열을 거치는 것이었다. 애초에 발언을 안하는 것 만큼 확실하게 발언을 책임질 수 있는 방법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 지면에서 한국 신문 시사만화 검열의 역사를 주욱 읊어 놓을 생각은 없지만, <고바우 영감>의 “경무대 똥치우는 분이오” 사건 같은 워낙 유명한 사건들만 놓고 보더라도 만화가 순수한 ‘작품’ 취급을 받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사 만화는 언론으로서, 그것이 개제되고 있는 신문의 일부분으로서 규정되어 내부적, 그리고 외부적인 규칙을 따라야만 했다. 만화가가 담당 편집자에게 원고를 건네면서 “첫번째 만화는 무조건 삭제당하니, 가장 약한 것을 맨 먼저 집어 넣고 점점 강도 높은 만화를 들이밀어라” 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만큼, 검열은 일상적으로 자리잡아 왔다.

(도판1: <고바우 영감>, 1958년 1월 23일자. 동아일보)

그런데 널리 퍼진 오해 가운데 하나는, 시사만화가 특별히 많은 검열과 탄압을 받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 시사만화는 신문의 여러 코너 가운데에서도 가장 덜 개입당하는 분야 가운데 하나였다. 단적으로 80년 광주에 대해서, 당시 만평들은 최소한 죽어가는 자들에 대한 ‘슬픔’을 이야기할 수는 있었다. 그것에 비해서 신문의 기사들은 자의에 의한 것이든 타의에 의한 것이든 폭도와 빨갱이들에 대한 ‘정당한 진압’을 설파할 수 밖에 없었다. 좀 더 최근으로 올라와서 2004년의 세계일보 시사만화 누락 사건을 놓고 보더라도, 신문사의 입장과 다른 논지를 펼치는 만평이 데스크에 의해서 누락 당했다는 사실이 하나의 이슈가 될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이 그만큼 주목할 만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일반 스트레이트 기사, 또는 사설의 경우에는 더욱 일상적, 체계적으로 검열과 내용수정이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관심조차 끌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만화의 지위(?)는 어떻게 해서 만들어진 것인가. “독립된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기 때문”이라는 나름대로 모범적인 해답을 내놓기에는 석연치 않다. 글로 된 사설보다도 더욱 본격적으로 신문의 본심을 드러내는 코너가 바로 만평이니까. 오히려 진짜 이유를 들자면, 시사만화에 대한 평가 기준이 제대로 확립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흔히 시사만화의 검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기준이 즉흥적이고 비일관적”이라는 말은, 다시 말하자면 그만큼 철저한 체계적 통제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사만평에 대한 검열 사례가 사람들에게 뚜렷하게 각인이 되어있는 이유는 판단기준이 일관되지 못해서 생겨나는 독특한 사례들의 기억에서 오는 편견일 뿐이다. 

단도직입적으로 사건을 묘사해야 하는 기사와 사설의 경우, 통제의 방법이나 기준이 뚜렷하다. 하지만 만화는 그보다 훨씬 다양하고 복잡한 수사법을 동원하는 것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기사의 경우 특정 정치사건을 놓고 보도할 때 정치인 당사자들이 서술 내용의 주연으로 나와 주어야만 한다. 하지만 만화의 경우 그냥 일반 서민을 주인공으로 놓고, 그 정치 사건을 관찰자로서 슬쩍 바라보고 지나가는 식의 표현이 흔하다. 이러한 우회적 발언의 경우, 철저한 검열을 하고자 한다면 그 속에 담긴 숨겨진 메시지와 코드들을 읽어낼 줄 알아야 하고 또한 그것이 전체 검열 지침에 어긋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드러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만화 속 표현이 “서민들의 정서”에 가까울수록, 비유가 날카롭게 다듬어져 있을수록 오히려 검열을 피하고 극복해서 자유롭게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셈이다. 그것이 바로 시사만화의 핵심적인 미덕인 풍자와 패러디다. 풍자와 패러디는 체계적인 평가의 척도를 애매하게 만든다. 풍자와 패러디라는 무기를 가지고 있는 한, 심지어 검열이라는 강력한 칼로도 만화를 완전히 지배하지 못한다.

만평의 가치척도

만평의 가치, 특히 언론으로서의 만평을 평가하는 잣대는 참으로 애매하다. 스트레이트 기사라면 ‘사실성 여부’라는 확실한 잣대가 있다. 사설이라면 주장의 ‘근거가 논리적으로 확실하게 갖추어져 있는지’가 중요하다. 하지만 만평은 과연 어떤가? 만평에 대해서 스트레이트 기사처럼 사실성 여부를 따지기는 참으로 뻘쭘한 일이다. 대통령과 측근들을 조선시대 상감과 신하들로 비유하는 만평은 한국의 정치가 가신정치의 틀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는 현상에 대한 풍자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단순한 사실성의 잣대로 평가하자면 모조리 거짓말이 된다: 대통령은 임금이 아니고, 도포를 입고 보고를 받지 않으니까. 또한, 만평의 가치기준은 사설과도 다르다. 만평은 해당 지면의 노골적인 본심을 담는다는 측면에서 볼 때 사설보다도 더욱 사설답다고 할 수 있지만, 그다지 논리를 요구받지 않는다.

시사만화에 대한 여러 연구와 평론들은, 한국의 시사만화가 해학과 풍자가 부족하다고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다(실제로 한국의 시사만화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하나의 부류로 묶어질 수 있는지의 문제는 다른 기회에 제기하기로 하자). 그만큼 해학과 풍자가 만평의 중요한 가치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뜻이다. 기사와 사설이 각각 사실성과 논리성이라는 형태로 ‘내용의 정당성’을 척도로 받아들이고 있는 반면, 만평은 풍자와 해학이라는 ‘표현의 효과성’이 강조되고 있는 셈이다. 즉 과정에서 규칙을 쥐어주기 힘들기 때문에, 결과로서 평가하게 된다. 덕분에 가끔 시사만화 만평은 무책임한 직언을 배설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한다. 가장 본심에 가까운 악의적 공격에, 살짝 면죄부를 씌워서 들이밀면 나름대로 납득해 주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전문적인 뉴스 생산 훈련을 받지 않은 개인이라도 강력한 여론을 형성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오로지 얼마나 효과적인가라는 한가지 척도에 의해서 말이다. 어떻게 보자면 노골적인 ‘선동’에 가까운, 현대 언론에서는 나름대로 지양하고자 하는 가치척도가 만평에서 만큼은 여전히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만평의 사실전달

다시 풍자, 그리고 (해학적 표현방식인) 패러디라는 이야기로 돌아와보자. 사전적 의미의 풍자는 “정치적 현실과 세상 풍조, 기타 일반적으로 인간생활의 결함 ·악폐 ·불합리 ·우열· 허위 등에 가해지는 기지 넘치는 비판적 또는 조소적인 발언”을 지칭하고, 패러디는 “어떤 저명 작가의 시의 문체나 운율을 모방하여 그것을 풍자적 또는 조롱삼아 꾸민 익살 시문”을 이야기한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즉 풍자는 현실 세상을 풍자하고, 패러디는 어떤 표현을 풍자의 기조를 바탕으로 패러디하는 셈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의무적으로 필요한 조건이 바로 원본에 대한 공유다. 무엇을 풍자하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풍자를 하는 것은 뜬금 없음의 극치를 이룰 뿐이며, 원본이 공유되지 않은 상태에서 패러디란 맥락 없는 부적절한 표현 이상으로 보이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만평의 핵심이 ‘풍자’와 ‘패러디’라는 말은, 만평이 정보 전달이 아니라 정보의 재해석이라는 점을 뜻한다. 만평이 풍자와 패러디로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그것이 독자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전달해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정보에 대한 신랄하고 노골적인 의견을 들려주는 것이어야 한다. 독자들 역시 만평의 역할을 그런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기에, 사실성이나 논리성보다는 주장에 대한 ‘공감’을 중시하게 된다.

만평의 자유로운 상상과 강한 발언력은 효과적인 수사법을 통한, 현실을 바라보는 의견의 정서적 유대감에 있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 위한 전제는 역설적이게도, 만평은 정보전달으로서의 가치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신문 전체의 편집을 놓고 볼 때 일반적인 시사만화는 수많은 글의 숲 속에서, 잠시 쉬어가면서 기발함에 이마를 치게 만드는 오아시스의 역할을 부여받고 있다. 주변의 기사와 사설들이 정보전달의 임무를 충분히 하고 있기에, 그렇게 전달된 정보를 만평이 안심하고 주물러버릴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세상이 갈수록 단순하지 않게 되고, 만평이 단지 언론의 일부가 아닌 개별적 장르로 떠돌아다니게 된다는 것이다. 원래의 의도와 관계 없는 방식으로, 만평이 정보전달의 가치를 지니게 되고 있다. 특히 신문지면이 아닌 인터넷 등의 공간에서 만평은 더 이상 글의 숲에 묻힌 존재가 아니다. 하나의 독립된 기사로서 의제설정 기능을 하는 것이다. 게다가 주장으로서의 논조를, 시각적 묘사를 통해서 구체적인 상황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에 스트레이트 기사와는 다른 방식으로 강력한 사실성을 획득하게 된다.

  

(도판2: 조선일보, 2005 년  8월  9일자 만평)

최근 청와대에서 문제를 삼고 나선 조선일보의 만평을 살펴 보자. 전통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자면 이 만화는 ‘버벅거리는’ 발언 장면 묘사를 해서 대통령의 무능함을 보여주어 독자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자는 취지고, 내부에서 묘사된 사건들은 적당한 과장과 풍자니까 너무 세세하게 따지지 않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만평에는 대통령이 도청 내용 보고를 이미 받았다고 묘사됨으로써, 아직 공식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사항이 하나의 사건정보로서 주어진다. 즉 이 경우 만평은 명확하게 사실 전달을 했고, 그렇기 때문에 그 사항에 대한 사실 전달에 대한 책임성이 생겨난다. 즉 풍자적 표현에 대한 책임이 아니라, 풍자적 표현의 맥락에 숨겨서 같이 묻어나온 사실 전달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같이 묶여져 나오는 기사가 그 책임을 대신 져주는 경우라면 좋겠지만, 그 맥락이 제시되지 않는다면 ‘오보’로서 책임을 져야한다는 각오 정도는 필요할 것이다.

패러디의 책임

풍자의 가장 대표적이자 효과적인 표현형식은 바로 패러디다. 그런데 패러디를 통한 과격한 표현이나 주장이 그 속에서 조롱의 대상이 되는 상대 진영으로부터 용납 받을 수 있는 것은, 유머러스한 재해석의 효과가 뚜렷해서 표현의 기발함이 내용의 거부감을 압도할 때 뿐이다. 한마디로 멋진 뼈있는 농담에 대해서는 정색하고 화내기 힘들지만, 뼈만 있는 단순한 ‘쌍욕’에 대해서는 대처를 한다는 말이다. 한가지 극명한 사례는, 보수를 표방하는 인터넷 신문인 <독립신문>에서 한 독자의 투고를 받아 공개하여 파장을 일으켰던 “스나이퍼 패러디” 사건이다.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의 실루엣과 저격 조준경 속에 들어와 있는 노무현 대통령의 모습으로 이루어진 두 칸짜리 만평인 이 작품은, 결국 협박미수라는 희한한 죄목으로 입건되기까지 했다. 성공적인 패러디는 ‘원본’에 대한 인식 공유가 먼저 되고, 그 맥락 속에서 새로운 유머러스한 해석이 들어가야 효과가 있다. 하지만 위 작품의 경우 어떠한 원본도 못하는, 단지 만화로 표현된 자기발언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모든 관심이 발언 내용 자체에 대해서 쏠릴 수 밖에 없고, 따라서 그것에 대한 책임여부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위의 경우 발언 내용 자체만 떼놓고 본다면 직접적인 살해 협박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도판3: 인터넷 독립신문, 2005년  4월  16일자 만평)

(우_도판4: KBS <시사투나잇>, 2005년 3월 15일 방영)

개그, 특히 패러디의 성공이라는 것은 항상 애매하다. 패러디의 힘은 원본이 지니고 있는 표현의 맥락을 비틀어서 의외의 충격을 주는 것에서 나오지만, 그 맥락이란 것이 워낙 가변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공동의 문화적 경험이 점차 줄어들고, 소규모 집단의 서로 다른 취향들이 독립적인 섬을 이루어가고 있는 현대에는 더욱 더 그렇다. 공유의 다른 사례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낙원추방 사건”이다. 문제가 된 것은 수도이전에 반대하는 모 한나라당 의원들의 비분강개한 표정들을, 낙원에서 쫒겨나며 슬퍼하는 아담과 이브가 그려진 성화에 합성한 작품이다. 그것이 온라인에 머물지 않고, 콘텐츠 제휴 공급을 통해서 KBS 뉴스의 한 코너에 나왔던 것이다. 이때의 죄목은 무려 ‘성적 비하’였다. 아무리 널리 알려진 그림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명화’의 맥락이 아니라 ‘음화’의 맥락으로 받아들이는 다소 특이한 취향의 계층에 있어서는 통하지 않는 개그가 된다는 것이다. 

앞에서 만평의 가치는 표현의 효과성에 있다고 말했는데, 뒤집어서 말하자면 표현이 효과적이지 않을 경우 만평으로서의 가치가 없어진다는 말이다. 그것도 단지 실패한 유머 정도로 머무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저돌적인 도발으로 재해석된다. 기사나 사설은 내용이 실패적이라도 여전히 기사이고, 사설이다. 하지만 만평의 패러디가 유머로서 실패하면, 순식간에 단순한 선동문이 되어버린다. 기사나 사설이 작성 과정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면, 만평은 철저하게 결과를 책임 져야 하는 위치에 있는 것이다.

만평에 책임 부여하기

이렇게 놓고 보면, 만평의 책임은 너무나 막중하다. 사실전달에 대한 책임은 물론, 결과적으로 그것이 다양한 맥락 속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에 대한 책임까지도 모두 짊어져야 한다는 말 아닌가. 풍자라는 양식이 현실의 무게를 가볍게 비틀어서 독자에게 청량감을 주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자면, 정작 이들에게 부과된 무게 자체가 너무 과한 것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풍자의 책임은 막중하다. 자유로운 표현의 폭을 보장받은 만큼 더욱 더 발언에 대한, 정확히는 발언 결과에 대한 책임이 증가한다.

그래서 앞선 이야기를 정리해서 만평에 대한 두 가지 척도를 제안하고자 한다. 하나는 만평의 표현이 근거로 삼고 있는 전제들 자체의 사실성 여부다. 그것을 과연 만평이 책임져야 하는가, 만화가도 단지 잘못된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 소신에 따라서 그린 것 아닌가, 라고 반문할수도 있다. 하지만 만화를 통해서 발언을 하는 언론인으로서 잘못된 사실에 바탕해서 소신을 지니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책임을 져야하는 영역이다. 두 번째는 유머 표현의 공감대다. 반드시 패러디라는 형식에만 한정시킬 차원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아무리 그렇게 썩 훌륭한 유머가 아닐지라도 최소한 대다수 독자들에게 “이것은 유머구나”라고 인식될 수 있을 정도 수준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고정된 지면을 벗어나 작품 자체만 전세계를 떠돌아다닐 가능성이 농후한 인터넷의 시대라면 더욱 신경써야 한다. ‘**신문 일일만평’이라는 간판의 맥락 효과 없이, 작품 자체만 떼놓고 볼 때도 어디로 보나 농담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비웃음의 대상이 된 주체들이 ‘분명히 명에훼손을 당했지만, 그렇다고 농담한 것에 정색하고 화내자니 참으로 난감하구나’라고 생각하는 상황이 펼쳐질 수 있다.

만평이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첫 번째 척도인 사실관계에 대해서는 정정보도를 내면 된다. 아니, 오보 사실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정정 만평을 내는 정도의 과정은 필요할 것이다. 좀 더 미묘한 부분은 두 번째 척도인데, 실패한 개그에 대해서 책임을 진다고 해서 “안 웃겨서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확실하게 하겠습니다”하고 넘어가는 방식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법적으로 고소해서 명예훼손죄를 묻는 것이 풍자에 대해서 책임지는 방식인가? 곤란하다. 우선, 만평이라는 표현방식 자체가 이미 명예훼손을 전제로 하고 있다. 풍자의 방식으로 비틀고 과장해서 근엄한 권위라는 ‘명예’를 해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실이 틀렸다’ 또는 ‘주장이 근거 없다’라고 하고 인정하는 것은 뚜렷하게 규정짓고 정정할 수 있는 사안이지만, “내가 표현이 좀 과했다”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도의적 차원의 사과에 지나지 않는다. 표현의 수위는 반론과 후속논의의 영역이다. 실패한 유머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방법은, 그 작품을 만들어낸 작가와 언론 자체가 그 논의에 최대한 뛰어들어서, “비록 실패했지만 어째서 이것이 적합한 표현으로 의도되었던 것인지”에 대한 공개적으로 토론을 하는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논의를 잘 흡수하여 좀 더 성공적인 작품을 만들어낼 수 밖에 없다.

문제는 가볍게 읽기 위해 펼쳐든 만평에 대해서 무려 진지한 토의를 하려는 사람은 좀처럼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만평은 언론으로서의 힘과 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면서, 언론으로서의 책임을 지는 방식에서 항상 벗어나 있다. 만평에 대해서 논의를 하자, 기준을 세우자라고 주장하고 넘어갈 정도의 시대는 이미 지났다. 이미 기준을 세워서 논의를 하고 있어야 할 때다. 막대한 영향력에 걸맞는 진지한 논의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하는 것, 그것이 바로 만평에 부과되어야 할 진짜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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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Pingback by capcold님의 블로그님 » Blog Archive » 시사문답 20080721

    […] Q. 틈만 나면 발언의 책임이니 하면서 인터넷 실명제를 부르짖는 것들이, 자기들이 언론플레이를 할 때는 심심하면 ‘청와대 관계자’ 같은 익명성 뒤에 숨어버리는 꼴이 가관입니다. 도대체 청와대 관계자는 누군가요? A. 경무대에서 똥치우는 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