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 바라보는 혁명, 혁명이 바라보는 만화 [예장 29호]

!@#… 서울예대 교지 ‘예장’ 29호의 특집 ‘예술에 드리워진 혁명의 그림자’에 한 꼭지로 실린 글. 각 분야의 글들을 모아놓고 보면, 만화/영화/음악을 아우르는 대중예술 쪽 꼭지의 필자들이 보여주는 작품소개 위주의 분류와, 개념용어의 바다에 익사하기 직전인 순수예술 성향의 미술/문학 꼭지의 필자들의 접근이 극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어서 재밌다. (핫핫)

 

만화가 바라보는 혁명, 혁명이 바라보는 만화

김낙호(만화연구가)

혁명이란, 기존의 근간이 크게 뒤집어져서 그 결과 완전히 새로운 방식이 시작되도록 하는 변화를 칭한다. 가장 포괄적으로 내린 이 정도 정의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첫째, 사실 혁명이란 보기보다 무척 애매한 개념이란 점이다. 얼마나 바뀌어야 개혁이 아니라 ‘혁명’인지 명확한 선을 긋는다는 것은 꽤 임의적일 수 밖에 없다. 게다가 혁명으로 바뀐 세상의 변화가 얼마나 지속되어야 성공한 혁명인지 아니면 혁명을 하려고 했다가 단순히 실패한 것인지 역시 역사적 해석이 정해주기 나름이다. 그리고 둘째(어떤 의미에서, 이것이 훨씬 중요하다), 혁명은 본연적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는 것이다. 실제로 혁명을 겪든 혁명을 이루고자 꿈꾸는 것에 지나지 않든 말이다. 어떤 이들은 혁명에서 불온함과 파괴라는 인상을 받겠지만, 다른 이들은 그 속에서 기존의 갑갑한 무언가를 타파하고 새로운 방식을 추구하는 진취적인 변화에 대한 강한 낭만을 느낀다. 그런데 예술 양식이나 기술에서의 혁명이라면 좀 더 세부적인 차원이기에 그 인상 역시 한정적이지만, 아예 사회 체제에 관한 혁명이라면 그 사회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모든 이들에게 있어서 도저히 피할 길 없는 강렬하고 큰 사건이다. 사회 혁명은 그런 의미로 보자면, 무척 대중과 가깝다.

그렇기에, 사회 혁명은 특히 대중과 가까이에 있는 것을 가장 중요한 매력으로 자청하는 만화라는 매체에 있어서 무척 매력적 소재다. 거꾸로, 대중의 힘을 동력으로 삼고자 하는 현대 사회 속에서 혁명을 이야기하는 이들에게 역시 만화라는 이 매체양식이 대중과 감성을 교류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다. 그렇다고 해서 만화가 본연적으로 혁명적인 민중 매체라느니 하는 이상한 과장을 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저, 만화와 사회혁명에 대한 몇 가지 작품들과 접근방식을 살짝 이야기해보고자 할 뿐이다. 어쩌면, 대중서사문화가 사회와 관계하는 방식에 대한 몇 가지 작은 단서가 보일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혁명을 다루는 만화
선동이든 발굴이든 상업성이든 어떤 거창한 다른 목표가 들어있든 간에, 만화에서 사회혁명을 다루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혁명이라는 소재 자체가 무척 흥미롭기 때문이다. 만화는 본연적으로 이야기 매체고, 혁명은 무엇보다 강렬한 이야기다. 사회 혁명의 과정에는 기존 사회의 모습, 그 속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관계가 있다. 그리고 급격하고 근본적인 변화의 물결 속에서 그 관계들은 흔들리며, 등장인물들은 자신들의 근본적 가치관을 도전받는다. 그리고 새로운 관계가 만들어지는 와중에서 때로는 희망이, 때로는 도저히 어떻게 해 볼 수 없다는 좌절이 온다. 하나의 사회를 아우르는 큰 스케일의 흔들림 속에서 수많은 사연들이 만들어지고, 커다란 이야기는 저절로 앞으로 나아간다.

즉 혁명을 소재로 다루는 가장 정통파 접근법이라면, 격변의 변화 속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 수 있다. 비단 만화 뿐만 아니라 어떤 이야기 매체라도 마찬가지이기는 하지만, 만화, 특히 극만화의 경우 상념과 사변보다 개별 캐릭터들의 사연을 중심으로 전개되기 에 더욱 이런 접근이 용이하다. 김혜린의 1983년 장편 데뷔작 『북해의 별』을 살펴보면 그런 동력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작품의 무대는 가상의 북유럽 해양제국인 보드니아로, 주인공 유리핀은 후작가문 출신이며 출중한 실력으로 해군에서 출세하지만 반역의 누명을 쓰게 된다. 가문은 파멸하고 약혼녀는 잃는 등 나락으로 빠지지만, 죄수들과 함께 탈출하여 혁명에 동참한다.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출세한 영웅이 음모로 파멸한 후 민중의 의지를 깨닫고 같이 새로운 이상향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분연히 일어선다는 접근법 자체는 매우 직선적이다. 나아가 작품의 진행방식도 주인공의 성격도 세밀하게 정해진 전략을 따르기보다, 우직한 열정으로 내달린다. 특히 같은 작가의 이후 작품들과 비교할 때 극적 투르기의 묘가 아무래도 다소 거친 편이다. 작가 스스로도, “당연히 이 속에는 각본도 모른 채, 열정만 가진 자의 어설픔과 치기, 뭐가 좀 보일 때의 발악과 탐구심 등… 5년간 시시각각 변해가는 내 만화표현이 그대로 담겨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을 정도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다분히 데뷔작이기에 나타날 수 있는 약점 정도는 가볍게 덮어버리는 것이 바로 격변의 시대를 살아가는 캐릭터들의 인간사 자체의 재미다. 혁명의 과정을 역사책의 사건서술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의 모음으로 만들었기에 작품으로서 동력을 얻은 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다분히 한국 80년대 군부독재시절의 기층 서민들의 사회체제에 대한 억눌린 반감, 그리고 민중문화적 시각이 깊숙하게 녹아들어가 있다.

하지만 아무리 탁월한 이야기꾼일지라도, 시대적 맥락에서 나오는 민중주의적 시각을 있는 그대로 풀어내는 것은 교조적이 되기 쉽기에 독자들에게 거부감을 줄 수 있다. 그렇기에 『북해의 별』처럼 가상 국가의 로맨스 강한 대하드라마로 포장하는 것이 유효했던 셈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만화의 장르적 상상력을 한층 적극적으로 포용한다면 어떨까. 심의당국이나 출판사의 반발을 막아내는 것은 보너스다. 『기계전사109』(김준범 그림, 노진수 글)는 자신들을 억압하는 인간사회에 대한 사이보그들의 반란을 그린 작품이다. 불법로봇을 색출해서 처형하는 남자주인공이라든지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기억을 이식한 로봇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여주인공 등은 영화 ‘블레이드런너’에서 이미 확고하게 선점해버린 테마다. 하지만 그 영화가 SF느와르의 형식을 빌어 철학적 차원의 인간 실존 문제에 집중했다면, 『기계전사109』는 SF라는 외양만 썼을 뿐 노골적으로 노동자 혁명을 그리고 있다. SF적 차원에서 접근한다면 오히려 더 중요했을 법한 인공신체와 인공지능 로봇체의 구분이나 사회상의 기술적 구성요인 같은 세부 세계관은 두루뭉술 넘어가고, 대신 호사롭게 사는 인간들과 그들을 위해 자체적 권리 없이 일방적으로 노동을 제공하는 입장의 로봇들이라는 관계가 부각된다. 로봇해방전선이라는 저항군의 조직명이라든지, 전면에 나선 여주인공을 ‘해방전선의 꽃’으로 부른다든지 하는 것은 그 의도를 더욱 명확하게 한다. 덕분에 이 작품은 SF로 보자면 함량미달에 가까운 결점들에도 불구하고 혁명을 살아가는 캐릭터들의 몰입감 있는 이야기가 되어주었고, 많은 이들에게 한국 SF만화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작품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혹은 사회혁명의 과정이라는 큰 덩어리보다, 그 속에서 반항적으로 전진하는 정신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혁명의 풍부한 이야기성을 끌어들일 수 있다. 일본만화의 기념비적 작품 『아키라』(오토모 가츠히로)는 의문의 거대 폭발로 인하여 크게 붕괴된 후 재건된 미래의 네오-도쿄를 무대로, 폭주족 젊은이들과 군부의 초능력 실험, 정부 저항군 등 여러 세력과 개인들이 서로 얽히고 섥히며 궁극의 힘의 현신인 ‘아키라’를 놓고 벌이는 사투를 그리고 있다. 당연히도 이 배경은 2차대전 후 6-70년대의 일본을 모델로 한 SF적인 비유인데, 빠른 재건과 안정화의 과정 속에서 더욱 갑갑하게 압박하는 정부의 관료주의로 인해서 자유로운 동력이 사라진 사회, 그런 사회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의 조직적 과격화, 항상 무언가 수상한 연구를 하며 음모를 꾸미는 듯한 군부, 그리고 무엇보다 그 와중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잡지 못하고 막연한 반항정신으로 ‘탈선’하는 젊은이들이 있다. 그리고 이 만화는 마지막까지 바로 그 젊은이들의 정신에 손을 들어준다. 이야기 속에서 게릴라 반정부세력은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 조차 없는 이상향 속에 지지부진하게 폭력을 행사할 뿐이고, 정부는 보이지 않으며, 군부는 사태를 틀어막기에 바쁘다. 하지만 그 속에서 거대한 파괴로 다시금 사회는 근본적인 변화를 강요당하게 되고, 그런 외부요인에 의한 혁명 속에서도 일관되게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며 이야기의 동력이 되어주는 것은 가장 단순한 반항정신으로 무장한 폭주족들이다. 결국 마지막에 다시금 파괴된 도쿄에 외국의 신탁통치가 들어서는 것을 막는 것 역시 이들이다. 그저 우리 미래는 우리 스스로 쥐겠다는 의지로, 또 다른 작은 혁명을 이룬 셈이다. 혁명은 커녕 반반한 개혁조차 하기 힘든 현실 속의 일본 사회에 대해서, 혁명을 꿈꾼 적 있는 세대의 작가가 보내는 대리만족인지도 모르겠다(전혀 다른 장르와 접근법이기는 하지만, 히트작 『20세기 소년』(우라사와 나오키) 역시 비슷한 정서가 엿보인다).

혹은 혁명이 만들어내는 이야기성보다, 혁명이라는 큰 이야기를 바탕에 깔아서 기본적인 재미를 확보한 후 다른 요소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혁명의 중심에서 내면적 정서를 관찰하고자 한다면, 아예 혁명의 시대적 아이콘을 세부 묘사하는 것도 상식적인 접근이다. 『체 게바라』(오에스터헬드 글, 알베르토 & 엔리케 브레시아 그림)는 유명한 사회주의 혁명 전도사 체 게바라의 삶을 조망하고 있다. 그것도 혁명군 지도자로 활동하던 시점에 중점을 두어, 계속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이상향의 현실성에 대해서 고민하고 또 계속 자신의 방식을 저울질하는 내면을 섬세하게 풀어내고 있다. 어차피 그의 삶 자체만으로도 드라마틱함은 충분하기에, 오히려 별다른 과장 없이 담담하게 묘사하는 것 만으로도 그 목적은 충실하게 충족된다. 아니면 더욱 다른 각도로 접근할 수도 있다. 파리 꼬뮌을 그린 자끄 따르디의 만화 『Le cri du peuple(민중의 외침)』(장 보트랭 원작, 국내 미출간)의 경우, 비교적 정형화된 혁명 속 민중의 이야기와 이미 역사적으로 드러난 종국의 좌절과 새로운 시대에 뿌린 희망의 씨앗이라는 익숙한 요소를 제치고 가장 돋보이는 지점이 바로 공간성이다. 작가 특유의 세밀한 공간묘사를 통해서, 정말로 그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파리의 여러 건물과 거리를 점유하며 투쟁을 벌였던 그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혁명의 기운을 전하는 이런 식의 접근은 만화이기에 가장 효과적으로 가능한 방식이다(클릭).

만화를 다루는 혁명
하지만 수많은 이야기 거리의 하나로서 만화가 혁명을 다룬다는 것은, 다른 매체에서도 충분히 혁명을 각자의 방식으로 소재화하고 있기 때문에 흥미롭기는 하되 그다지 특이한 내용은 아니다. 하지만 그 반대 경우라면 어떨까. 현실 사회에서의 사회 혁명 혹은 혁명을 꿈꾸는 이들에게 만화가 키워드가 되어준 경우들 말이다.

쉽게 떠오를 법한 사례는 권투만화 『내일의 죠』(치바데츠야)와 일본의 전공투 운동이다. 성장하는 경제의 물질적 기반과 서구 문화해방 운동의 영향을 받았으나 그들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꽉 막힌 관료주의 사회의 경직성과 보수성에 답답해하던 전공투 운동에 있어서는 구체적인 사회개혁의 세부 사항까지 가는 것 이전에, 그저 쓰러지지 않고 다시 일어나서 이상향을 추구하겠다는 것의 낭만이 중요했다. 물론 현실의 압박은 그렇게 아름답지 못해서 결국 전공투는 갈수록 구체적 방향을 잃고 종국에는 소수의 과격폭력집단이 되어 몇 번의 큰 사고를 치고 결국 사그러들었지만, 애초에 그들은 물론 그 시대와 세대가 지니고 있었던 열망과 에너지는 지금까지도 향수의 대상이다. 그 시절, 일본에서 유행했던 말이 “한 손에는 맑스, 다른 손에는 내일의 죠”이다. 그 만큼 이 권투만화는 전공투 세대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그들의 이상향을 다잡아줬던 정서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특별히 ‘내일의 죠’라는 만화 자체가 혁명을 노래했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그저 불굴의 의지로, 가장 밑바닥층에 있는 한 청년이 끝없이 노력하고 도전하며 권투를 하고, 결국 모든 힘을 불사르고 링 위에서 미소를 지으며 죽음을 맞이하는 이야기다. 여기에는 물론 하층민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과 아웃사이더들의 우정 등도 있지만, 민중이 힘을 합쳐서 질서를 타파한다든지 하는 민중혁명의 왕도는 전혀 없다. 하지만 껍데기만 타다 남은 불이 아니라 한 순간이라도 환하게 빛나다가 모든 것을 태우고 하얗게 재만 남기는,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어 끝없이 일어나고 기존의 질서(즉 챔피언들)에 도전하는 모습에 당시 혁명을 꿈꾸던 뭇 독자들의 심금을 울린 것이다. 『내일의 죠』에서 주인공이 다시 일어나서 도전하는 것은 구체적인 전략이나 장기적인 야망이 아니라 그저 본능적 긍지다. 그렇기에 그의 필살기조차 크로스카운터, 즉 자신도 맞지만 상대에게 동시에 더 큰 타격을 줌으로써 둘 다 쓰러지고, 누가 먼저 일어나는지를 겨루는 식이다. 한 시대의 혁명가(혹은 몽상가)들이, 자신들의 생각하기에 이 시대에 필요한 시대적 정서를 대변해주고 증폭시켜줄 파트너로서 선택한 만화인 셈이다.

혁명을 꿈꾸는 이들이 만화 속에서 시대정신을 찾는 것은 바다 건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소위 68혁명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급진적 좌파 성향 사회운동이 유럽을 강타했던 60년대 말, 미국 역시 그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 다만 보수적 사회체제에 대해서 지식인들이 참여하여 주창한 체제변혁에 대한 그나마 구체적인 측면들은 유럽에서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소실되어, 히피이즘의 몽상적 이상주의, 사랑과 평화 그리고 그 것을 앞당길 수단으로 마약과 섹스와 락음악을 이야기하는 방식이 되었다. 그 속에는 보잘 것 없는 자신에 대한 자학, 그럼에도 해피하게 사는 세상으로 가자는 낙천성이 동시에 담겨있었다. 기성세대의 문화는 경직된 보수성으로 규정하고, 그들의 스타일과 반대되는 느슨하고 헐렁거리며 비속한 방식의 반문화를 추종했다. 그리고 이런 반문화의 중심 아이콘 가운데 하나로 등극했던 것이 바로 언더그라운드 만화가 로버트 크럼의 작품들이다. 크럼이 그려내는 만화의 특징은, 20세기 초 미국 신문만화들의 떠들썩하지만 순진한 스타일을 연상시키면서도 그 내용은 요새 용어를 빌자면 ‘막장’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당대 주류 만화는 강력한 검열규정에 의해서 저연령층에 맞춘 표현수위를 넘지 못했는데, 크럼의 만화는 거침없이 미국의 점잖은 생활에 대한 황당하고 신랄한 비틀기, 모든 이들에 대해 공평하게 쏟아내는 정치적 편견과 악의, 자기 처지에 대한 자학, 섹스 등이 넘쳐났다. 그가 만든 만화잡지 ‘ZAP’은 반문화 언더그라운드 만화가들의 산실이 되었으며, 당대의 반항적 락밴드들은 크럼의 그림으로 앨범 표지를 장식하고자 줄을 섰다. 모든 것에 대한 병적인 혐오가 오히려 예술의 경지로 올라간 기인의 작품 가운데 특히 널리 인용된 것은 “계속 트럭질하자”(Keep on trucking)이라는 만화 시리즈의 이미지로, 그저 황량한 벌판을 미소지은 남자들이 하염없이 가로지르는 식이다. 그 별 것 없으면서 끝없는 낙천성이야 말로 미국 현대사의 가장 보편적으로 반항적인 시기의 정서적 이상향이었던 셈이다(클릭).

반대로, 만화 자체가 의식적으로 사회 혁명에 기여하고 싶다는 욕심으로 만들어지는 경우, 그 가운데 일정 정도 성공을 거두는 사례 역시 당연히 있기 마련이다. 혁명의 기운이 계속 축적되고 있던 한국의 80년대는 어떨까. 오랜 군사정권의 압제에서(너무나 오래 해서, 당시 세대의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그 시절을 오히려 미화하며 향수어린 눈빛으로 바라볼 정도다) 겨우 벗어나자마자 새로운 군사정권이 새로운 방식의 압제를 가하던 시절이다. 다만 우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대중문화 측면에서는 더 느슨하게 열어준 바람에, 소위 ‘민중문화’에 대한 담론과 작품들이 성장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서 만화는 그 대중적 속성 때문에 민중적 매체로 그 가능성이 관심을 끌었던 것이다. 82년에 한국카톨릭농민회에서 발간한 탁영호의 『학마을 사람들』은 그런 배경과 목적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논의 자체가 금지되었던 현대사의 이념적 대립에 의한 비극을 이야기하고, 그 속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의지로 바닥에서부터 희망을 찾아 올라오는 민중주의적 시각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이다. 그런 담론을 보다 널리 보급하고 민중을 ‘각성’시키려는 의도가 뚜렷했다.

더욱 노골적으로 접근하고자 한다면 역시 비유적인 내용을 담은 극만화보다, 아예 직접적인 연동을 무기로 삼는 시사만화가 있다. 80년대에 민중 시사만화가로 활약한 최정현의 필명은 ‘반쪽이’였는데, 이것 자체만 해도 당시에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 수준을 넘어서는 구체적인 생각이 금지되었던 남북분단에 대한 은유다. 몇몇 활동지에 게재되던 반쪽이 만화들을 묶어서 만든 『반쪽이 만화집』이 87년 제작되었으나, 공안당국이 전량 압수하는 사태도 있었다. 다행히도 그 책은 출판사가 2백권 정도를 빼돌리는 것에 성공, ‘말’지 독자에게 무료로 배포되었던 일화도 있다. 비슷한 수난 사례라면 시사만화 『깡순이』를 연재하던 민중만화가 이은홍이 노동자 대상으로 만들어진 책 『시장과 진실』으로 86년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바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작품은 노동자들에게 자신들의 계급적 처지와 그 타파 방법을 알려주기 위한 교육적 성격이 강한 작품이었고, 기존 질서의 권위 세력(예를 들어, 그때나 지금이나 엄살떨기 좋아하는 재벌기업의 자본가과 언론재벌들이라든지)들이 혁명에 대한 선동으로 받아들일 만한 구석이 가득했다. 혁명을 생각하는 이들이 그 비전을 퍼트리는, 혹은 그저 ‘민중’이 스스로의 처지를 직시하고 자신들의 힘으로 일어서기를 종용하는 교과서로서의 만화인 셈이다. (도판 클릭. 이은홍, 『시장과 진실』중, 1986)

직접적인 민중의식 고취를 위한 문자 그대로의 ‘민중만화’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민중만화 특유의 의식성과 사실주의 성향은 주류 한국만화에도 스며들어가 더욱 혁명적 시선의 영향력을 키웠고, 어떤 의미에서 한국만화의 품질에 대한 혁명을 가져오기도 했다. 이두호의 『객주』, 백성민의 『장길산』, 이희재의 『간판스타』 같은 작품들이 만화 본연의 오락적 이야기성에 민중주의적 시각을 결합시키며 높은 완성도의 작품으로 탄생했다. 나아가 그런 성과는 『만화광장』이라는 걸출한 성인만화잡지를 탄생시켰다. 하지만 이 계열의 가장 두드러지는 성과라면 『오!한강』(김진수 글, 허영만 그림)을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원래는 안기부의 의뢰로 운동권들에게 이념의 허망함을 계몽하기 위한 기획이었다고 하지만, 작가들의 반대방향의 의도가 들어가며 오히려 더욱 강렬한 작품이 된 사례다. 현대사를 지나오며 각종 이념적 대립에 의한 인간사의 비극이 이어지는데, 그것을 묘사하는 방식이 이념의 허망함이라기보다는 그 속에서 결국 끝없이 각자 생각하는 새로운 좋은 세상을 위해서 나아갈 수 밖에 없는 소작농 출신 주인공 이강토를 비롯한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되었다. 크게 진보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더할 나위없이 혁명적 정서로 뭇 운동권들의 애독서가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북한은 절대악이며 남한 정부는 무오류의 절대선으로 미화하는 것만이 받아들여졌던 시대에, 현대사의 격동 속에서 각자의 광기를 드러내고 그 속에 치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펼쳤으니 말이다. 특히 1부는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원래 안기부의 의도인 이념의 허망함을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현 정부의 압제적 세뇌에 반항하는 모습이 된 것이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에는 80년대의 화염병에 손을 살짝 들어줌으로써, 작가들의 ‘반항’은 정점을 찍었다.

***

하지만 여하튼 처음에 언급했듯, 이렇듯 혁명을 다루는 만화나 만화를 다루는 혁명을 이야기한 것은 결국 본격적인 소재 접근법에 대한 분류학도 아니고, 예술의 사회학을 하자는 것도 아니다. 무거운 개념들이 간간히 보일 듯 하지만, 사실은 그저 세상 속에서 만화를 즐기는 방식에 대한 것이다. 사실 어찌 보면 사회혁명이야말로, 무거운 개념들로 가득한 듯 보이지만 실상은 더 즐거운 세상을 만들고자 (종종 너무 성급하게) 기존의 판을 바꿔버리겠다는 꽤 순수한 발상에 대한 것 아니던가. 그저 세상과 만화의 연동지점을 하나쯤 더 의식하면서, 그 덕분에 더 즐겁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돕는 작은 가이드 정도로 여기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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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thoughts on “만화가 바라보는 혁명, 혁명이 바라보는 만화 [예장 29호]

Comments


  1. – ‘내일의 죠’가 어떻게 혁명만화인지 사실 좀 의문스럽긴 했답니다. ‘기계전사 109’라면 그게 사실은 노동자혁명을 얘기하고자 그린 거라는 느낌이 확 오지만요(누구는 노태우 때 어떻게 이런 만화가 버젓이 나왔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고 합니다만). 그래도 밑바닥의 에너지를 다룬다는 점에서 체제가 제대로 잡힌 사회에 반항하는 의미가 없지는 않았겠군요. 권투만화라는 측면에서만 봐도 이보다 후에 나온 ‘링에 걸어라’보단 백배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 건 공상비과학 대전에 나올 정도로 황당하기 그지 없어서요.

  2. !@#… 지나가던이님/ 뭐, 그런겁니다. 그 자체가 혁명만화가 아니라 일본의 전공투 시절이라는 특정한 맥락에서, 혁명을 꿈꾸는 이들이 좋아한 만화죠. 솔직히 오!한강도 한국의 80년대라는 맥락을 떼어놓고 볼 수 없듯이.

  3. ‘내일의죠’가 일본의 학생운동과 급좌성사건들까지 결부되는건 , 전공투시절부터 적군파 최후의 순간까지 내일의죠 를 신문기자들앞에서 언급할정도였죠. 하얗게 불태우겠다고… 이건 마치 우리나라 학생운동과 아침이슬 노래가 내용상 직접적 연관은 없어도 떼놓기 어려운 관계라는것과 마찬가지일겁니다.

  4. 캡콜님, nomodem님/ 예, 좀 더 자세히 이해가 가는 군요. 단, 아침이슬은 정부가 먼저 가사 속 태양을 ‘민족의 태양 = 김일성’ 으로 보고 탄압해다는 얘기도 들은 바 있어서 일본 학생운동가들이 내일의 죠를 언급한 것과 좀 다르다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요. 역시 당시 한국은 독재국가라는 생각이…

    – 한가지 추억은 87년에 아직 아침이슬을 포함한 금지곡이 해금되기 전에 담임선생님이 저 곡을 학생들앞에서 불렀다는 겁니다. 기억은 안나지만 애들이 뭔일인지 노래 좀 해달라고 했던건데 놀라운 건 우연히 그 근처를 지나가던 교감선생님이 그 노래를 다 듣고 박수를 치고 갔다는 거죠. 당시는 몰랐지만 그게 꽤나 위험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는 걸 훗날 깨닫게 되었답니다.

  5. !@#… nomodem님/ 극우든 극좌든 대충우든 대충좌든, 신문기자들 앞에서 누군가가 사고친 후 캡콜닷넷을 언급해 줬으면 좋겠습니다(핫핫)

    지나가던이님/ 아니면 교감이 감동할 정도로 미칠듯한 아름다운 노래솜씨셨다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