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써놓고 보니 무척 낮간지러운 제목인데, 그래도 그런 소재로 이렇게 멋지게 작품을 뽑아주는 작가의 실력에 다시 한 번 경의를.
세계가 청춘을 맞이하다 -『넘버 파이브』
김낙호(만화연구가)
하도 팬들의 호들갑에 늘상 동원되곤 해서 신선도가 형편없지만, ‘천재’라고 불릴만한 작가들이 있다. 역설적이게도 이 호칭은 활동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더 붙이기 힘들어지는데, 천재적으로 혁신적인 작품을 처음 탄생시키는 것도 물론 어렵지만 계속 일관되게 후속작도 그 이상의 충격을 주도록 하는 것이 더욱 어렵기 때문이다. 작품세계 흐름의 일관성을 지니면서도(하다못해 “항상 변신한다”는 일관성이라도) 동시에 독자의 기대치보다도 더욱 큰 작품적 성장을 이뤄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해내고 있는 작가라면 그만큼 훌륭하다 할 수 있을텐데, 만화 분야에서 그런 천재 가운데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마츠모토 타이요다. 2000년대에 그의 천재성을 다시 한 번 갱신한 역작 『넘버 파이브』(마츠모토 타이요 / 김완 번역 / 전4권 / 애니북스)가 최근 한국에 출간되었다.
이전에 필자가 다른 작품에서 이야기했듯 마츠모토 타이요의 핵심 키워드는 청춘, 놀이, 그리고 광각이다. 청춘은 성장을 대하는 자세에 관한 코드로 그의 주제의식이며, 놀이는 낙서체 그림이나 진지한과 천진함의 교차 같은 세계관이며, 광각은 도약의 이미지로 가득한 표현력이다. 이런 코드들은 그의 초기작인 『철콘 근크리트』에서 이미 훌륭하게 정립된 바 있는데, 『넘버 파이브』에서 재정립에 가까울 정도로 극대화되었다.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캐릭터 개인들의 내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세계 자체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우선 ‘청춘’이라는 주제의식은 이제 개인의 청춘이 아니라 세계의 청춘을 이야기하게 되어, 세상이 받아들여야 할 현실과 이상향, 저항과 성장을 집요하게 파고들고 있다. ‘놀이’는 이전 작품들에서도 그랬듯 그림체는 물론, 세계관 자체의 천진한 유희성으로 승화되었다. 최고 권위의 창조자 아버지의 전신토끼옷, 사자와 양의 잡종동물, 모든 갈등의 매개 역할을 하는 히로인 마트로슈카의 러시아 목각인형스러운 컨셉 등 끝도 없다. ‘광각’은 작가의 그간 모든 능력을 총동원한 듯한 역동적 화면의 극치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극단적인 클로즈업과 공간의 주관적 재창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줄거리는 의외로 직선적이다. 세계정부에는 9명의 초인들로 이루어진 특공대인 지구평화대 무지개팀이 있다. 그들은 각자의 원래 이름 대신 ‘넘버’로 불리며 강력한 능력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그 중 대장격이며 세상에 자신의 감성을 공유시킬 수 있는 능력의 넘버원은, 항상 순수하게 동화적인 이상향의 세계를 만들고 싶어 한다. 그런데 어느날 저격수라는 특수능력을 지닌 넘버파이브가 궁에서 마트로슈카라는 여성을 데리고 탈주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리고 그는 차례대로 추격해오는 오는 다른 ‘넘버’들을 물리친다. 그 와중에 결국 자신의 동화적 평화의 이상향으로 세상을 개조하려는 넘버원의 쿠데타도 진행되고, 세계의 비밀도 조금씩 밝혀진다. 박제된 이상향, 그리고 저항하고 싸우며 성장하는 현실의 대립이 독특한 SF 활극 분위기 속에서 펼쳐진다.
물론 작가의 기존 성향을 보면 쉽게 유추할 수 있듯, 작품은 결국 저항하며 성장하는 쪽의 손을 들어준다. 폭력까지 장착하며 폭주해버린 이상향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자유로운 저항이며, 그런 것이 바로 청춘의 성장과정이다. 그렇기에 모든 것이 끝난 후에도 넘버파이브는 세상의 지배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세계를 떠돌아다닌다. 무지개팀이라는 초인들의 보호도 없어지고 순수하지만 허망한 이상향도 사라진 세상은,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저항도 하면서 자신의 앞길을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청춘의 성장통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상상된 이상향의 세계를 버리고 현실을 받아들이며 성장하되, 좌절하지 않고 계속 저항하는 젊은 에너지에 대한 칭송이야말로 마츠모토 타이요의 매혹적인 전매특허다. 한 캐릭터가 아니라 하나의 세계가 그렇게 해서 성장한다.
『넘버파이브』의 시각적 표현력은 타이요가 지금껏 구현한 가운데 최상의 경지다. 자유분방하면서도 세밀한 세계 묘사, 유럽과 일본 작가주의 만화들의 장점들을 흠뻑 흡수한 황홀한 화면구도, 뫼비우스의 직계라고 자처해도 좋을 뛰어난 디자인 감각 등이 돋보인다. 이 정도로 종합적인 세계구축은 지금까지 작가가 해왔던 여러 작품 가운데 가장 전체적이다. 넘버포 쌍둥이들이 초능력을 구현하는 시퀀스의 시각적 경이나 마지막 클라이막스에서 넘버원과 넘버파이브의 세계관이 대치하는 장면의 연출에서 넘치는 힘은 특히 놀랍다. 물론 이러한 시각적 표현력은, 담겨 있는 내용의 철학과 맞아떨어지기에 진가를 발휘한다. 분방한 저항과 성장, 청춘의 이미지가 세계로 투영되었기에 그 세계 속 이야기가 그런 그림 속에서 돋보인다(여담이지만, 그런 의미에서 단지 쿨한 그림체라는 껍데기에만 매료되어 그의 스타일을 무조건 모사하고 싶어 하는 뭇 만화가 지망생들의 경우 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다만, 『넘버파이브』라는 작품에 몰입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장벽이 있다. 예를 들어 거의 극단적으로 추구되고 있는 놀이성이 어떤 독자들에게는 익숙해지기 힘들 수 있다. 하드보일드 추격 스릴러나 장대한 SF판타지 같은 진지한 느낌 속에서도, 결국 어린아이의 상상 같은 느낌을 동시에 받아들일 수 있음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뚜렷한 개그 요소를 강조하지 않는 상태에서 말이다. 토끼 옷을 입고 심각하게 세계의 운명을 이야기하고 암살을 지시하는 박사 ‘아버지’처럼, 유머러스하되 웃을 타이밍을 잡기 힘든 요소들이 가득하다. 혹은 논리적 이치보다는 희망에 관한 하나의 관념이 인간형상으로 압축된 가까운 히로인 마트로슈카의 존재가 어리둥절할 수도 있다. 이렇듯 상징과 실제 캐릭터의 경계는 미묘하게 흐려진다. 직선적 줄거리와 달리, 혼란스러울 수 있는 요소들은 산재해있다. 다만, 그 모든 것을 그저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최고의 독서경험이 되겠지만 말이다.
한국어판의 경우 일본에서 연재 당시 8권짜리로 나온 것을 완결 후 4권짜리로 묶은 판본을 바탕으로 출간되었다. 또한 같은 출판사에서 이전에 냈던 타이요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한정판세트라는 형식을 통해서 전질 세트의 판매를 우선으로 하고 있다. 연재로서의 감칠맛보다는 전질 소장의 매력을 공략하는 방식이다. 다만 작품 속성상 그저 장르만화팬들을 대상으로 하는 마케팅보다는, 느슨한 지적 성찰을 원하는 독자들(예를 들어, 상당한 숫자로 밝혀지곤 하는 베르나르 베르베르 SF소설 지지자들) 등 보다 폭넓은 층을 공략할 필요가 있을 듯 하다. 이런 독특한 에너지가 넘치는 작품을 유연하게 히트시킬 수 있을 때, 한국의 출판계도 새로운 청춘의 성장을 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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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 Copyleft 2008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넘버 파이브 세트 (한정판) – 전4권 마츠모토 타이요 지음, 김완 옮김/애니북스 |
하나오 다음으로 재미있는 작품이었어요.
평도 매우 훌륭하네요.
작품을 다시 읽어봐야겠네요;;;
!@#… 버찌님/ 읽을 때마다 새로운 의미의 층을 발견할 수 있는 풍부함도 장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