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차점에서 해탈하다 – 『죽도 사무라이』[기획회의 266호]

!@#… 또 마츠모토 타이요인가;; 하지만 또 스타일이 업글했는데 어쩌겠나.

 

교차점에서 해탈하다 – 『죽도 사무라이』

김낙호(만화연구가)

옛날 일본에서는 전쟁이 끝나고 평화로운 시절이 오면, 유복한 귀족가문의 가신으로 들어가지 못한 무사들이 더 이상 일거리가 없어져서 떠돌아다니게 되는 경우들이 있곤 했다. 사무라이의 신분은 가지고 있되 검을 휘두르는 것 말고는 딱히 다른 재주가 없는 그들은 낭인이라고 불렸다. 그런데 다른 칼 쓰는 일자리를 운좋게 구하지 못한채로 시간이 지나가면 결국 돈이 떨어지고,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 당장 쓸 일은 없고 값도 좀 나가는 것을 팔아치울 수 밖에 없는 상황도 온다. 그래서 자신의 칼을 판다. 하지만 칼을 차고 다니지 않는다는 것은 사무라이로서의 신분을 과시하지 못하는 것이고, 따라서 생각해내는 궁여지책이 바로 대나무로 깎은 모조칼이다. 한쪽으로는 분명히 새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수하는 허세 그 자체지만, 다르게 보면 이전의 살상무기가 다른 의미와 용도의 모습으로 변환된 새 시대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칼을 팔고 죽도를 차는 것이 그저 궁여지책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스스로의 살기를 제어하고 보다 평화로운 시대에서 재미있게 살아가기 위한 의지라면 어떨까. 살기와 평온함, 새 시대의 방식과 구식인간들, 여러 교차점에서 풍부한 이야기 거리가 만들어진다. 따지고 보면 현대사회 그 자체가 항상 그런 교차점 위에 서있기도 한 만큼, 공감의 폭도 넓다.

『죽도 사무라이』(마츠모토 타이요 그림, 에이후쿠 잇세이 원작 / 김완 옮김 / 애니북스 / 2권 발간중)는 200여년전쯤, 즉 전란의 시대는 지나고 서구 개화 정국의 혼란으로 돌입하기보다는 전인 시대다. 주인공 세노 소이치로는 여우상을 한 사무라이 낭인으로, 자신의 검을 팔고 죽도를 차고 다니는 백수다. 같은 연립주택에 사는 이웃소년 칸키치가 그에게 호기심과 두려움을 느끼며 따른다. 그는 드문 경우 싸움이 붙을 때는 요괴에 씌운 것 같은 살기를 내뿜으며 고수의 능력을 보여주는데, 평소에는 고양이와 대화하고 나비의 비행을 따라해보며 지붕의 무늬로 동물연상놀이를 즐기는 아이 같은 괴짜다. 별다른 일을 하지 않고 흘러가며 그가 보내는 하루하루 속에, 소이치로와 칸키치는 소소한 것에서 작은 즐거움과 깨달음을 얻곤 한다. 그런데 어느날 도시에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나고 소이치로도 의심을 사면서 점차 평온한 생활과는 거리가 먼 일들에 서서히 말려들고, 그 이야기의 와중에서 재능과 강함, 호기심과 즐거움에 대한 통찰들이 흘러나온다.

사실 일본 사무라이극이든 중국 무협이든 한국 사극이든, 강맹한 실력을 숨기고 평온하게 살아가는 백수 주인공은 흔하고 흔한 설정이다. 호기심 많고 순진한 어린이가 뭔가 수상한 어른을 만나 그를 관찰하는 식의 이야기도 전세계적으로 흔하다. 도대체 시대를 앞서간 것인지 시대에 뒤쳐진 것인지 모를 엉뚱한 기인이 당대 세상의 모습과 대비되며 독특한 효과를 만들어내는 이야기도 더할 나위 없이 흔하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하나로 합쳐내고, 천재적 재능이라는 소재에 천착하며 짓눌리는 고뇌보다는 즐거움의 깨달음을 담아 그려온 바가 있는 명작가를 붙여주면 어떨까. 작가가 새로운 화풍과 연출법 같은 더욱 재미있는 시도들을 해볼 수 있도록, 작가와 스타일과 호흡이 딱 맞는 파트너가 시나리오 작업을 분담해주면 금상첨화겠다. 만약 각 요소들이 부조화를 일으키며 쫄딱 망하지만 않는다면, 큰 무리없이 자연스럽게 희대의 기대작이 될 법하다. 그런데 현재까지 발간된 분량까지 보고 판단해본 결과, 별다른 고민 없이 후자다.

『죽도 사무라이』는 마츠모토 타이요가 천착해온 몇가지 코드들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완전히 다른 세계를 바라볼 줄 아는 천재와 그를 한심해하고 동경하며 그에게 점차 빠져드는 이, 천재가 보여주는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세계, 현세의 경계선마저 허물 것 같은 거침없는 도약 등은 기본이다. 여기에 시적 감수성마저 추가되었고, 이상한 세상의 이미지에 밀려서 줄거리 자체가 부수적인 것으로 떨어질 것 같은 위태로움도 없다. 이렇듯 에이후쿠의 시나리오는 마츠모토 타이요보다 더 마츠모토 타이요적인 감수성을 가득 담아낸다. 그림이나 주제는 매력적이지만 이야기 흐름이 뭔가 산만한 구석이 있곤 했던 작가의 약점을, 최고의 협력자를 만나서 극복한 셈이다. 그리고 그 보답이라도 하듯 그림과 연출 역시 사극이라는 장르를 만나 한층 업그레이드되었다. 그래피티를 연상시키던 광각 가득한 원래 그림체와 2차원의 정적 구도로 가득한 옛 일본 민화들을 섞어 만들어내는 장난끼와 섬세함, 섬뜩함이 수시로 교차한다. 거칠고 분방한 펜이 붓선의 호쾌함과 자연스럽게 합쳐지며, 뮤직비디오를 연상시키는 강렬한 현대적 시점연출을 줄이는 대신, 칸 편집의 리드미컬한 재미를 최대한 화려하게 끌고 간다. 덕분에 가만히 있는 장면이나 그저 대화를 나누는 대목이라 할지라도 역동적인 느낌으로 가득하며, 장난끼 어린 느슨함과 언제 뒤집어질지 모르는 긴장감이 공존한다. 이야기나 그림이나, 여러 가지 가치들이 수시로 교차하는 모습에서 그 경계가 깨지며 어떤 깨달음에 가까운 쾌감이 만들어진다. 마찬가지로 강함의 본질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동시대 사무라이 활극의 최고 인기작 『배가본드』가 동적인 장면에서도 정적인 느낌으로 순간을 탐구하는 구도자의 모습이라면, 『죽도 사무라이』는 동과 정의 구분자체가 무의미한 느낌 속에 완전히 해탈로 향해가는 득도의 모습이다.

작품의 매력이 물을 건너오는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덜 감소하도록, 한국어판의 출판 품질 역시 훌륭하다. 번역은 뉘앙스와 전달력을 적절히 안배한 고풍스러운 말투로 되어있으며, 일부 개념에 대한 주석도 친절하되 눈에 거슬리지 않게 배치되어 있다. 극중 효과음을 그림체에 가장 어울리도록 펜과 붓으로 쓴 손글씨를 사용한 것도 돋보인다.

『죽도 사무라이』는 진지함과 장난, 살기 어린 강함과 느슨한 여유, 자신을 제어하기 위해 칼을 버릴 줄 아는 의지와 그 칼을 꿈에서도 다시 그리곤 하는 미련이 수시로 오가는 이야기다. 그 와중에 마치 도를 깨우치고 해탈해버릴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을 책을 펼친 동안 느끼게 해주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사극이라는 장르에서 응당 기대할만한 드라마틱한 시대와 굴곡진 인생사를 다루는 재미와는 멀기 때문에 모든 독자들이 좋아할 만한 작품은 아니겠지만, 이야기를 보나 표현력을 보나 만화라는 양식의 매력이 줄 수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이 이만큼 빼곡하게 담겨 있는 경우는 무척 드물다.

죽도 사무라이 1
마츠모토 타이요 글.그림, 에이후쿠 잇세이 원작, 김완 옮김/애니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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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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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thoughts on “교차점에서 해탈하다 – 『죽도 사무라이』[기획회의 2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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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Pingback by Nak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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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아. 지금까지 왠만한 뽐뿌질은 버텼는데, 이번 뽐뿌질에는 저항에 실패했습니다. OTL

  2. 아직 1권만 봤습니다만, 원작자가 타이요를 위해 스토리를 써주나 싶더라고요. 여전히 너무나 타이요적인 만화라. 빠로서는 불만은 없지만, 그래도 최초의 원작자 기용 작품이니만큼, 뭔가 달라지게 되지 않을까, 아직 기대하고 있습니다.

  3. !@#… 에라님/ 저항 안하실수록 좋은 뽐뿌질이죠(핫핫)

    pseudorandom님/ 지금 분위기로는, 우리에겐 새 세상을 열어갈 청춘이 있어 엔딩이 나올 것 같지는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