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고발보다, 성장에 관한 – 『피부색깔=꿀색』[기획회의 242호]

!@#… 신문기사나 도서리뷰는 대호평인데, ‘네티즌 감상’ 같은 것은 거의 제로에 가까운 취향의 작품. 즉 “모에 없음 / 쿨함 없음 / 짤방매력도 낮음 / 하지만 작품적 재미와 깊이 상당” 부류.

 

사회고발이 아니라 성장에 관한 이야기 – 『피부색깔=꿀색』

김낙호(만화연구가)

‘미안하다 사랑한다’라는 히트 드라마가 있었다. 결국은 눈빛 멋진 남자주인공과 비련의 여주인공이 본격 연애하다가 비극으로 끝나는 드라마가 되기는 했지만, 적어도 초반만큼은 해외입양아 문제를 소재로 해서 묵직한 화두들을 몇 가지 던져주곤 했다. 적어도 필자는 그 드라마에서, 남자주인공의 허무한 멋스러움보다는 그런 표정이 몸에 스며들 때까지 겪었을 사연이 더 궁금했으니 말이다. 다른 피부색의 사람들 틈바구니, 심지어 자신을 받아들인 가족들도 외모에서부터 나와 다르다는 느낌을 주는 상황에서 자라난다는 것이 주는 고독감은 정신세계의 구석구석에 스며든다. 나를 버린 곳, 하지만 나의 원류가 된다는 어떤 곳에 대한 애증은 또 다른 응어리가 된다. 그런데 이런 조건들은 중간에 걸려 넘어져 좌절하기 쉬운 만큼, 반대로 잘 삭여서 인생의 일부로 잘 받아들이면 그만큼 성숙해질 수 있기도 하다. 만약 스스로 그 성장경험을 회고하고 정리하면서, 극적으로 과장하지 않는 담담함과 다소간의 유머감각으로 스스로 아픈 부분을 다독일 줄 안다면 말이다. 나아가 그 과정을 여러 사람들과 같이 나눌 수 있기까지 하다면 귀중한 성숙함으로 간주해도 무방하다.

『피부색깔=꿀색』(전정식 작/ 박정연 옮김 / 길찾기)은 벨기에의 가족에 입양된 한 한국교포작가의 자서전적 이야기다. 서울의 거리에 버려졌던 꼬마가 한국에서 해외입양아 주선의 중추적 역할을 맡고 있는 홀트 재단의 고아원에 수용되어, 새 가족의 품으로 간다. 그의 수속 서류에 적힌 피부색은 꿀색. 아마도 특정 인종의 피부를 노란색, 빨간색 같은 원색으로 묘사하는 것이 편견을 불러일으킨다고 여겨지던 당대의 미국적 사고방식의 결과였을 듯하다. 그 덕분에, 이 작품은 흔한 인종주의적 갈등의 차원을 살짝 넘어설 발판이 생긴다. 인종적 정체성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회상적 유머와 따뜻한 인간관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쪽으로는 이 작품이 “한국인 입양아들의 현실을 알려주는 교양만화”로 받아들일 분들도 적지 않겠으나, 그 이상으로 이 만화는 낯선 환경 속에서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사람들과 소통하며 성장하는 소년의 이야기다.

줄거리 속에서 묘사되는 작가의 성장과정은 극적으로 불행한 차별과 핍박의 세월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냥 아름다운 환경도 아니다. 자신의 다름에 대한 자각은 계속 마음 한구석을 누르고, 주변의 다른 같은 또래 한국 입양아들은 여럿 자살했을 정도니 말이다. 그런 경험을 적당히 농담도 섞어가며, 특히 짖궂은 사춘기 청소년 시절의 못된 장난질에 향수를 보내면서 담담하게 그려내는 것은 이 작품을 최루성 인간극장이 아닌 하나의 성장물로 읽을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기제다. 입양에 적극적인 새아버지와 좀 더 거리감이 있고 엄격한 어머니 사이에서 아시안으로서 받는 대접의 미묘한 차이, 형제남매들과의 우애가 만들어지는 과정 등은 굳이 극적 사건의 연속으로 기승전결을 넣지 않아도 충분히 하나의 인생의 흐름을 보여준다. 형 에릭과 벌이는 쓸데없는 소년적 치기, 동갑 백인누이와의 난감한 에피소드 등 당혹스러울 정도로 솔직하게 사례들을 들어가며 말이다. 항상 담담하고 유머러스하게, 하지만 그 내면에는 약간 복잡한 느낌이 남도록.

성장과정의 에피소드들 사이사이에 들어가는 것은 작가가 느껴온 감정들을 만화 특유의 초현실적인 시각적 비유를 통해서 직접 드러내는 부분들이다. 세상 속에 있는 자신의 상을 그려내는 것인데, 인생의 단계마다 조금씩 바뀐다. 자신이 주변의 다른 사과들마저 상하게 만드는 썩은 사과가 아닌가 의심하는 순간도 있고, 이곳에 자신의 뿌리가 존재하지 않기에 마치 화분에서 뽑힌 나무 같은 자신을 볼 때도 있다. 물론 자신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그 곳에서 찾지 못했던 무언가가 있을 한국이라는 자신을 버린 곳에 대한 호기심도 마음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반대로, 실제 한국의 입양아 정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부분은 해외의 독자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해서 이곳에 이렇게 오게 되었는가를 설명하는 배경지식 정도로 절제한다. 그렇기에 사회고발이나 교훈적인 메시지로 빠지거나 한민족의 뜨거운 핏줄 같은 감상주의로 빠지지 않고, 한 개인이 자신의 세상을 찾아나서는 정서의 성장을 그려낼 수 있는 것이다. 작품 말미에 결국 자신이 썩은 사과가 아니라 그냥 사과인데, 다른 나무에서 난 사과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그런 성장의 일례다.

앞서 언급했듯, 그런 무거운 주제들이 담겨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는 낙천적으로 유머감각을 발휘해서 전개를 하고 있는 작품이다. 구체성 없는 성적 호기심으로 가득한 사춘기, 부모의 의지로 받게 된 무용 수업에서 청일점으로 군림하는 사연, 풋풋한 연애가 시작될 때 쯤 오히려 도망간 소심한 사연 등은 가깝거나 먼 공감을 자아내며 웃음을 유발한다. 시트콤식 화려한 웃음보다는, 인간사의 소소하고 지리멸렬한 절묘함에 대한 감탄으로 새어나오는 웃음 말이다. 다만 많은 이들이 입양아 수출에 대한 일종의 사회적 원죄의식을 공유하는 한국 독자들에게는, 상황의 묵직함이 이런 웃음의 정서가 전달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경우가 있겠다 싶기는 하다. 게다가 원작에서는 개구쟁이 소년의 일기를 훔쳐보는 듯한 느낌의 손글씨로 말이 표현되어 있지만, 한국어버전은 마치 기록물을 보는 듯한 반듯한 글꼴이라서 묵직함이 더하다.

현재의 작가 전정식은 불어 만화권에서 ‘콰이단’(괴담) 연작 등 동양적 소재들을 바탕으로 하는 모험활극 만화로 6-70페이지 남짓 컬러 하드커버의 출판형식인 알붐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주류만화계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피부색깔=꿀색』은 아시아 만화쪽의 방식에 가깝게 그려냈다. 300페이지 가량의 흑백 그림에, 연출방식 역시 유럽 주류만화식의 오밀조밀한 화려함보다는 차분하고 편하게 읽히는 방식을 택했다. 컬러링을 흑백 농담으로 표현한 것은 동양수묵화의 이미지를 참조한 것이기도 하다. 만화의 표현방식을 이쪽으로 시도해본 것 자체가 사실은 작품 속에서 작가가 그리는 뿌리 찾아보기의 일환이기도 한 셈이다.

『피부색깔=꿀색』은 내년 즈음 개봉을 목표로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다. 실사와 애니메이션이 섞인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현실의 작가와 작품 속 이야기가 녹아들어가면서 정체성과 성장에 대한 굵직한 감성을 보여주리라 기대를 모으고 있다. 그때까지 한국 독자들도 이 작품을 얼마만큼 접하게 되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단순한 입양아문제 사회고발물이 아닌 사람의 이야기로서 받아들일 때 작품의 진가는 더욱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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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피부색깔=꿀색
전정식 글.그림, 박정연 옮김/이미지프레임(길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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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thoughts on “사회고발보다, 성장에 관한 – 『피부색깔=꿀색』[기획회의 24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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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Pingback by 일다의 블로그 소통

    틈새의 공간에서 자란 해외입양인의 자전만화…

    (길찾기, 2008.01)의 작가 전정식은 다섯 살 때 벨기에로 입양됐다. 만화는 해외 입양된 작가의 자전적 삶을 토대로 한다. 노란색 앞표지에는 입양 당시의 서류가, 뒷표지에는 이름과 번호가 함께 박혀있는 그의 어린 시절 사진이 실려 있다. 만화는 전체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배고픔에 지쳐 서울의 어느 거리를 헤매던 다섯 살 어린 나이의 기억과 고아원에서 벨기에로 입양되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언어가 다르고 피부색이 다른…..

Comments


  1. 시간내서 꼭 보고 싶은 작품이네요.
    어제 지나치다 본 TV에서, 다문화가정 아이들에게 엄마의 모국어를 가르쳐주는 교실이 나오던데, 참 좋아보였습니다.
    낯설음, 다름을 극복해가는 건 결국 개개인의 삶의, 일상의, 존재의 문제일지 몰라도,
    그걸 함께 풀어가는 사회의 노력이 있다면 그게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훨씬 덜 외롭고 조금은 더 든든하겠지요.

    그런데, 입양서류에는 피부색도 표기가 되나 보지요? 동양인을 꿀색이라고 한다면 다른 피부색의 아기들도 쵸콜릿색이라든가, 우유색이라든가…. 하진 않겠지?;; 하는 생각이 잠시..
    꿀색이든 복숭아색 살구색이든, 결국 피부색을 서류화한다는 자체가 차별을 의식한다는 거 아니가 하는 생각도 잠시.. 아무리 개인의 특징을 인식하는 표지로 사용할 뿐이라 해도 말이죠.

    p.s 원래는 손글씨인 걸 왜 인쇄체로 바꿨을까요? 에러네요.. 말풍선도 표현의 일부인 건데..

  2. !@#… 곰곰님/ 그러게 말입니다. 우선 그런 다름을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멋진 것인지를 보편적으로 인식시킬 필요가 있죠. // 피부색의 서류화는 인상착의 때문에 필요하긴 합니다;;; // 손글씨는, 아무래도 한국에는 아직 손글씨 레터링이라는 관례가 미진하다보니까요 (세미콜론의 ‘씬씨티’에서 김수박 작가의 글씨를 쓴 것이라든지 예외는 생기고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