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딩과 ‘삘띵’의 차이는 뭘까? ‘빌딩’이라고 하면 63빌딩이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떠올리지만, ‘삘띵’이라고 발음하면 동네 골목길 어귀에 서있는 4층짜리 상가 건물을 떠올리게 된다. 미묘한 뉘앙스에서 오는 커다란 이미지의 차이. 그런 비슷한 경우가 바로 ‘츄리닝’이다. 우리가 트레이닝복이 아니라 ‘츄리닝’이라고 할 때, 그 어감이 주는 임팩트는 남다르다. 굳이 운동을 하기 위해서 입는다기보다는 단지 헐렁하게 대충 걸치고 무언가 시시껄렁한 짓거리를 하면서 돌아다니기 위한 복장. 잔뜩 폼 잡고 조깅이라도 할 듯 나왔다가, 골목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나 한모금 빨고 다시 들어가서 TV나 보는 패턴이 어울리는 복장이다.
<츄리닝>(이상신, 국중록 저 / 애니북스)은 스포츠신문 연재만화 가운데 하나를 단행본화한 것이다. 애초에 주 2회 연재의 마이너한 코너에 불과했던 시리즈로 시작했다가, 금새 주 6회씩 연재되는 정규 꼭지로 격상되었다는 점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작품은 최근 1년여 동안 가장 좋은 반응을 얻어내고 있는 연재물 중 하나다. 실제로 신문 판매량 증가에 도움이 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수많은 개인 블로그와 게시판으로 ‘펌질’을 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 인기를 여실히 실감할 수 있다. 제목 그대로, 여러 가지 다양한 상황 속에서 결국 헐렁하게 사는 방식이나 시시한 (하지만 꽤 욕망에 충실한) 결말을 선택하는 사람들의 짧막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흔히 연재물이라고 할 때 떠올릴 수 있는 것은, 하나의 이야기를 주욱 연결해서 이야기해주거나, 에피소드 방식을 취할 경우라고 하더라도 하나의 캐릭터가 겪어나가는 하나의 세계의 이야기를 다루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어느 틈엔가, <트라우마>, <애욕전선 이상없다>등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연재물과는 다소 다른 특징을 지닌 작품들이 주류로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이 연재물들은 하나의 통일된 이야기나 캐릭터를 담아내기 보다는, 서로 전혀 연관성이 없는 에피소드들이 매일 새롭게 펼쳐질 뿐이다. 이 시리즈를 하나의 작품으로 묶어주는 것은 캐릭터나 커다란 이야기가 아니라, 작품의 브랜드다. 하지만 단편 모음집과도 다른 것이, 일간이나 최소한 주 1,2회 이상이라는 빠른 연재 페이스 속에서 분명히 이것이 연속된 연재물임을 느낄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츄리닝>은 바로 이 분야에서 성공을 이루어 나가고 있는 작품이다.
이러한 방식이 개그라는 장르에 효과적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정해진 캐릭터와 상황으로 이야기를 끌고나가면서 개그를 발휘하는 것은 물론 장점도 많지만, 한계가 명확하다. 우스운 이야기를 나눌 때, “…너네들, *** 알지? 아 그 사람이 말이야 지난번에…” 라고 하는 것과, “…참새 두 마리가 전신주 위에 앉았는데 말이야…” 라고 시작하는 이야기는 자유도의 폭이 다르다. 웃겨야 한다는 지상목표를 위해서는 어떤 자유롭고 황당한 설정이라도 새로 만들고, 또한 생명력이 다하면 그대로 버리는 것이 효과적이다. 그 중 많이 웃겼던 설정은 나중에 한번쯤 더 써먹으면 그만이다. 독자 입장에서도, 세계관이 이 에피소드 다음에도 계속 지속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그 한 회를 보고 가볍게 웃고 나면 끝이다.
<츄리닝>은 이러한 전략에 무척 충실한 만화다. 모든 개그는 그 한 회 한 회로 자기 설정을 만들어내며, 네 페이지 안에 확실한 결말을 본다. 반복해서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들은 하나의 이야기를 이어나간다기보다는, 매번 새로운 코너에 도전하는 개그맨들과도 같다. 같은 얼굴, 같은 성격의 소유자들이지만 사실 전혀 다른 이야기, 다른 캐릭터를 소화하고 있다는 약속을 독자들과 이미 공유하고 있다. 물론 연재물 안에서도 연속성을 지니고 반복해서 등장하는 ‘탱구네 가족’ 등의 캐릭터들이 있지만, 그것은 마치 고전적인 우스개인 ‘참새 시리즈’에서 전신주의 참새들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덕분에, 어느 한 화를 떼어놓고 따로 읽어도 아무런 부담이 되지 않는 자기완결적인 호흡이 만들어진다. 쉽게 입문하고, 크게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 예를 들어, 장편연재의 호흡을 지니는 작품인 <식객>의 하루 연재분량(6페이지)을 자기 블로그에 올려놓고 사람들보고 즐기라고 해봤자 무슨 효과를 얻을 수 있을까? 하지만 <츄리닝>은 된다.
그 결과, <츄리닝>의 핵심은 개별적인 에피소드를 만들어내는 작가들의 능력이다. 비록 통일된 큰 이야기의 흐름이 없더라도 그림이나 개그 센스가(효과적인 분업의 힘이다) 시리즈로서의 구심력이 되어준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그만큼 위태로운 측면도 있다. 순간적인 임팩트의 강도를 위해서, 장기적인 이미지 구축을 상대적으로 게을리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분야의 선배격인 <누들누드>의 사례처럼, 나중에도 길이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식 연재 만화는 단지 순간순간의 빛나는 아이디어만으로 차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일관된 시각을 가지고 있다. 만약 <츄리닝>이라는 작품을 순간의 즐거움 이상의 의미로 만들고 싶다면, 우수한 개그 이상으로 좀 더 명확한 자기 색깔을 만들 필요가 있다. 만약 작가들이 지금의 빛나는 개그 재능이 소진되고 나면, 사람들은 <츄리닝>을 무엇으로 기억하게 될 것인가, 라는 문제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아직 <츄리닝>의 개그보따리는 도저히 마를 줄을 모르고 있다. 더군다나 이번에 출시된 단행본은 순서대로 작품들을 모은 것이 아닌, 베스트 에피소드 선집이다. 큰 흐름보다는 각각의 화에서 보이는 순간의 기지가 핵심적인 이 작품에 어울리는 방식이다. 한마디로, 누가 보더라도 충분히 유쾌할 것이다. 그 성과를 조금이라도 폄하할 이유는 없다. 현재 <트라우마>, <애욕전선 이상없다> 등 이 계열의 인기작들 역시 같은 출판사에서 계속 출간 진행중인데, 이들 역시 성공을 거두기를 기원한다. 누구나 자신의 서가에, 언제라도 한번씩 중간에 펼쳐들고 피식 웃을 수 있는 생활 속의 웃음창고를 보관해두는 습관이야말로 진정한 웰빙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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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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