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만화: 『총몽』[팝툰 59호]

!@#… 팝툰의 ‘내 인생의 만화’ 코너에 등장(…). 꼽을만한게 너무 많아 그냥 “내 인생이 만화”로 바꿔보면 어떨까 했다가 그냥 얌전히 지면의 원래 컨셉 유지.

 

내 인생의 만화: 『총몽』

김낙호(만화연구가)

“내 인생의 만화” 코너의 집필을 의뢰받고, 적잖이 곤혹스러웠다. 문제는 간단하다. 내 인생에 만화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뭐, 인생의 만화라고 하니 굳이 최고의 명작 만화를 고르느라 저울질을 하기보다는 속편하게 뭔가 개인적인 분기점이 되어준 만화를 꼽는 쪽이 나을 듯 하다. 그 방향으로 좀 더 기억을 가다듬어보니, 떠오르는 만화가 바로 디스토피아 SF물 『총몽』(키시로 유키토 / 전9권 / 서울문화사)다.

『총몽』의 무대는 먼 미래 지구, 고철도시라고 불리는 마을이다. 그 위에는 자렘이라는 거대도시가 공중에 떠있는데, 고철도시는 아마도 지상낙원일 것이라고 이야기되곤 하는 자렘에 물자를 공급하고 또한 그곳에서 지상으로 떨구는 각종 쓰레기를 수집하며 살아나가는 곳이다. 도시 전체가 치안부재의 슬럼인 열악한 사회조건 속에서도 기술은 발달하여, 신체의 사이보그화가 지극히 흔하며 인간을 규정하는 것은 오로지 뇌라는 신체기관의 존재 뿐이다. 고철마을의 의사인 ‘이도’가 쓰레기더미에서 여주인공 사이보그 ‘갈리’의 잔해를 발견하여 수리를 하면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화성의 격투술을 익히고 있는 갈리가 현상금 사냥꾼으로, 격투레이싱 스포츠 선수로, 평범한 일상인으로, 그리고 결국 자렘의 특수요원으로 활약하면서 보고 겪는 여러 사연이 이어진다.

『총몽』은 뛰어난 SF상상력을 발휘하는 만화지만, 혁신적 연출력을 자랑한다거나 전무후무한 독창성을 선보이는 스타일은 아니다. 소위 사이버펑크 장르에서 유행하는 사이보그와 인간성 소재, HR기거의 디자인에서 영향 받은 디자인, 메트로폴리스를 연상시키는 계급구도, 각종 프로그레시브락 명반들에 바치는 오마쥬 등이 매우 뚜렷하고, 격투 장면을 그릴 때 드러나는 기합은 드라마 부분을 그릴 때에는 쉽게 발현되지 않는다. 하지만 가상의 연애 대상물이 아니라 싸우고 성장하는 주체로서의 여주인공, 특유의 암울한 이야기와 그 안에 담긴 극소량의 희망은 이 작품을 기억하지 않고는 못 버티도록 만든다. 무엇보다, 그냥 스쳐지나가는 작품이라기보다 계속 더 찾아보고 싶게 만드는 비틀린 매력이 있다. 뭐 적어도, 필자에게는 그런 매력이 차고 넘치게 느껴졌다.

처음 『총몽』을 접한 것은 93년 무렵, 제삼미디어라는 “유명” 해적출판사(이곳은 실로 여러가지 가명으로 책을 찍어냈다)의 해적판이었다. 어딘가 첫 페이지부터 느낌이 친숙하다 했는데, 소년주간지 ‘아이큐점프’에서 그 무렵 연재하다가 조기 종결된 ‘아스트리아스 칸’이라는 국내 작가의 만화가 이 작품의 디자인을 노골적으로 도용했던 탓이었다. 그저그런 SF격투만화겠거니 하며 심심풀이로 넘기고자 보기 시작했는데, 어라 뭔가 달랐다. 노골적인 계급구도와 인간다움에 대한 질문은 처음부터 불편함을 주며 시작하고, 잔인한 신체훼손과 살상 난무는 『북두신권』류와 달리 통쾌함과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해적판들이 종종 그렇듯, 초고속으로 기존 출간분량을 토해낸 뒤 일본 현지 단행본 진도를 따라잡으면 망설임 없이 시리즈를 접어버리는 식이었다. 그렇다고 당시 한국의 만화출판 여건에서 그 정도로 막나가는 표현수위의 만화를 정식출간해주리라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아직 일본어도 못하던 주제에, 후반부를 원서로 입수하도록 만들었다. 그때 무슨 아마존 재팬이 있던 것도 아니고, 고속터미널이나 명동 등에 있는 일본 만화/애니 물품 수입업자에게 주문 부탁해서 구입하는 식이었다. 관련 정보도 물론 인터넷 이전의 시대인 만큼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적극적으로 찾아봐야 했다. 언제 다음 단행본이 나오는지 뉴타입 잡지의 신간정리표를 매달 체크하는 것은 기본이다. 운 좋으면 4800bps 모뎀을 켜고 하이텔 애니메이트, 나우콤 앙끄동의 고수들에게 소식 조금, 자신들의 시각에서 읽은 감상평 하나씩을 들을 수 있었다. 96년 즈음에 마지막권을 본 후에도 계속 상기하고 있다가, 99년 초의 개인 홈페이지 구축 붐 속에 총몽 팬페이지를 만들기도 했다. 아직 인터넷이 ‘정보의 바다’ 같은 별명으로 불리던 시대였기에 전문정보 페이지를 만들겠다며 단행본 정보 일람, 분석평 등을 나름대로 열심히 쑤셔 넣었던 바 있다(그 페이지, 지금도 열람할 수 있다).

그러니까 『총몽』은 필자로 하여금 처음으로 그냥 문방구와 동네서점의 신간서가가 아닌 적극적 열성을 기울여 구하게 만든 작품이고, 그 분기점 이후로 결국 만화연구가 타이틀을 자칭하는 현재의 상황까지 왔으니 확실히 ‘내 인생의 만화’라고 부를 만하다. 세간에서 최고의 칭호를 듣고 있어서가 아니라,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자신의 코드에 너무나 잘 맞아떨어졌기에 취향을 적극적으로 추구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던 셈이다. 그 코드가 하필이면 암울한 SF, 생명경시 블랙유머, 인간성 소실의 끝자락, 우민들의 계급사회, 난무하는 신체훼손 격투폭력 뭐 그런 것들이었다는 점은 대범하게 넘어가도록 하자(…).

뭐, 각자 자신에게 그런 계기가 되어줄 ‘인생의 만화’를 만나는 것은 어디까지나 운이다. 다만 좀 더 재미있고 싶다는 의지를 가지고 여러 만화를 편견 없이 접하다 보면, 그 운의 확률이 조금씩은 올라갈 것이다. 필자가 만화연구가로서 여기저기 쓰고 다니는 글들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Copyleft 2009 by capcold. 이동/수정/영리 자유 —    [ <--부디 이것까지 같이 퍼가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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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thoughts on “내 인생의 만화: 『총몽』[팝툰 59호]

Comments


  1. 아 저도 인생의 만화라면 이 작품을!
    팬페이지 정말 그립네요 흐…

  2. 내 인생의 만화 코너에서도 너무 캡콜님스러운 글을 쓰셔서 즐겁게 봤습니다.
    그나저나 팝툰 2월호 이후 휴간 확정.. OTL

  3. 총몽이라..정말 대단했던 작품이었죠. 중간에 작가의 다른 작품은 그저그런, 새롭게 연재하는 총몽 2부는 1부의 주제를 더 진지하게(하지만 더 꼬아버린) 만들어서 제겐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더군요. 총몽 비긴스 뭐 이런 걸로 따로 만드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봅니다. :)

    아무튼…capcold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항상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건필!

  4. !@#… 별개님/ 신비로 무료계정에 개인홈을, xoom.com에 주제페이지를 넣었던 시절의 유산이죠;;

    언럭키즈님/ 실로 OTL…

    j준님/ 라스트오더는 2부라기보다, 이미 자기완결성을 가지고 완전히 마무리된 ‘총몽’에 대한 패럴랠월드로 보는 것이 속 편하죠. 재밌는 건 후기에 따르면 원래 작가가 총몽이란 작품에서 처음에 하고자 했던 건 격투물인데, 결국 LO에 이르러 원하는대로 해버린 셈. 그런데 작가의 의도가 마음대로 반영되지 않은(!) ‘총몽’이 훨씬 복합적이고 우수한 작품으로 남았죠… 역시 적절한 태클과 제어는 필수.

  5. 총몽.. 아키라 이후 SF만화를 그려보고 싶게 충동질한 만화였는데…시간을 내서 다시 한번 보고 싶은 작품이네요… CAPCOLD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필’도 많이 받으셔서 계속 좋은 글 생산하시길 기원합니다 ^^

  6. 그 때까지 있던 SF설정과 스토리를 잘 버무려서 녹여낸 느낌인데 그게 순수한 작가의 역량이 아니었다는게 재미있죠. 90년대 중반에 그 제삼미디어의 ‘사이보그 앤젤’이란 해적판으로 처음 봤는데 당시 흔했던 잔인한 장면 색칠하기가 거의 없어서 놀라워하면서 본 기억이 납니다. 재미있게 봤던 건 더 말할필요가 없고요. 이마지노스 보디 쓰는 마지막 분량만 제대로 진행하고 끝냈으면 좋았을텐데 아쉬울 뿐이죠.

  7. !@#… 박순찬님/ 그러고보니 99년 당시, 원래 총몽 다음에 비슷한 방식의 팬페이지를 만들겠다고 유즈넷 FAQ도 거의 번역해놓고 배너까지 걸어놓고는 결국 안만들고 넘어갔던 작품이 ‘아키라’ 였습니다 OTL //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소재고갈에 시달리시기를 기원합니다(‘그분들’이 개과천선해버리고 좋은 의미로 심심한 세상이 도래해서). :-)

    지나가던이님/ 결말 연재 당시 작가의 건강에 이상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많은데, 사실 여부는 모르겠습니다. 마지막 두 개 챕터에 단행본 1권 분량의 전개내용을 한꺼번에 가버렸으니 참;;; 그것도 소드마스터 야마토 엔딩이 아니라 모든 연결고리를 죄다 매듭지어버리기까지 하면서 말이죠. // 박스포장된 이도가 그대로 나온 것의 신선한 충격이란…(핫핫)

  8. 단행본 뿐만 아니라 해적판 잡지도 있었지요. 천원정도 했던 것 같은데 거기서 첫회 연재분을 본 기억이 나네요. 영화 브라질에서 똑같은 디자인의 인물과 건물들을 보고 놀랐었지요.

  9. !@#… 모과님/ 옙 해적잡지들이 좀 난무하던 시대다보니, 해적판책으로 나온 것 중에 좀 인기가 있다 싶은 건 다시 ‘연재’식으로 엮어낸 실로 약삭빠른 방식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