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성의 조건 – 이와아키 히토시의 <히스토리에> [기획회의 050605]

!@#…지난호 기획회의. 우연찮게 비슷한 시기에 씨네21(507호)에서도 리뷰가 올라왔던데… 비교하며 읽어봐도 재밌을지도. 어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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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성의 조건 – 이와아키 히토시의 <히스토리에>

꽤 옛날, 한 왕이 있었다. 그 때 왕들이 의례 그렇듯이, 어디론가 남의 땅에 들어가서 말달리고 싸우고 이김으로서 ‘정벌’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뭐가 그리 속에 불길이 타올랐는지, 정벌을 하고 나서 그 다음 그곳을 지배하고 가꾸는 것에 큰 신경을 쓰지 않고, 곧바로 다음 목적지를 향해서 나아갔다. 정벌하고 정벌하고 또 정벌한 결과, 어느틈에 지중해 연안에서 아시아 전역을 다 휩쓸고 다녔다. 뭐 그러다가 결국 죽었지만, 그의 정벌 자체에 대한 그 무한한 집착과 성과는 어째서인지 후세에서 높이 평가받아, 알렉산더 ‘대왕’이라고 불렀다. 여하튼 그저 끊임없이 정벌을 반복하는 모습은 단순한 권력이나 지배욕과도 뭔가 다르며, 오히려 마치 병정개미와도 같은 순수한 본능에 가까워 보일 정도다. 그 과정을 바로 옆에서 냉정하게 지켜보는 입장이라면 어떨까? 사회적 명분을 뒤로 하고, 사실상 생물학적 특성인 듯한 그 행위들을 주욱 따라간다면 무슨 느낌이 들까.

알렉산더의 파란만장한 시대를 다루는 만화 <히스토리에>(이와아키 히토시 / 서울문화사 / 2권 발행중)의 주인공은 특이하게도 알렉산더 본인이 아니라 그의 개인 서기관이었던 에우메네스다. 에우메네스는 서기관이라는 입장에서 알렉산더의 기행(奇行)을 지켜보았으며, 총명한 두뇌와 리더십을 바탕으로 알렉산더 사후에 군대의 전권까지도 얻게 되는 인물이다. 물론 완전히 돋보이기 전에 결국 배신당해서 사망하지만, 확실히 특이한 경우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이와아키 히토시라는 작가가 과연 누구였던가. 인류가 사실은 생태학적으로 문제가 많은 종족이며, 그래서 먹이사슬을 복원하러 정체불명의 포식자들이 나타나서 인간의 몸에 기생, 인간으로 둔갑하여 들어간다는 충격적인 세계관으로 90년대 고품격 일본만화의 정점을 이루었던 <기생수>의 작가다. 그 작품에서 중요하게 사용되었던 모티브는 인간 바깥의 시선으로 인간을 냉철하게 바라보건데, 사실 인간이란 것이 별 것 없을 수도 있다는 섬뜩한 관찰담이다, 말도 안되지만 너무나도 순수할 정도로 직선적이고 본능적인 기행을 냉정하게 목격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에우메네스에게 그 접근법과 문제의식이 그대로 계승된다.

그 문제의식이란 바로 인간됨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히스토리에> 초반의 배경이 되는 고대 그리스권 도시국가들을 아크로폴리스니 민주주의의 시발점이니 하지만,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모든 시민은 평등하지만, 시민이라는 계급은 전혀 평등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민의 성숙함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자들은 그들과 다른 종족들을 바바로이(야만인)라고 부르며 폄하하며 노예로 삼아버렸다. 여성과 아이는 물론 정치적 참여권을 가진 일반 시민이 아니며, 게다가 혈통이 중시되었다. 그런데 그렇다면 바바로이와 문명인의 경계, 즉 시민과 노예의 경계는 도대체 얼마나 명확한 것인가. 사실 전혀 명확하지 않다.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일 뿐, 그리 선천적이고 절대적인 기준 따위는 없다. 그것은 바로 인간적이라고 부르는 성숙함의 경계선 역시 사실 별 것 아니라는 이야기와도 같다. 그럼에도 자꾸 자신들을 ‘인간’으로 자처하게 만드는 이성과 감성의 기준을 만들어 내며 자족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하지만 이성과 감성에 우선하는 것은 바로 생물로서의 본능 그 자체다. 그 중 하나는 개체의 생존본능, 또 다른 하나는 그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정복이나 복수 등 외적 공격성향이다. 고리타분한 고대 모험담이나 신화 섞인 전쟁이야기나 나오기 쉬운 이 시대와 역사를 배경으로, <히스토리에>는 인간에 대해서 논한다. <기생수> 당시보다도 더욱 진하고 집요하게.

인간(들)의 본질을 캐내기 위하여, 바깥의 자가 인간 활동 패턴을 관찰한다는 감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캐릭터들의 무심한 표정 덕분이다. 사실 이 작가는 그다지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만한 팬시 느낌 강한 미소년 미소녀를 묘사하지도 않을 뿐더러, 표정묘사 역시 지극히 부족하다. 아니 사실 데생이나 그림체 자체가 뭔가 ‘끌리는 맛’이 부족하다. 하지만 지금 기준에서 지극히 야만적이고 잔인한 제도들을, 당연한 문명의 꽃으로 인정하고 있는 이쪽 세계의 괴리감에는 그런 멍하고 무표정한 모습들이 오히려 확실한 효과를 준다. 그에 비해서 일반적인 연출방식은 대단히 완성도가 높아서 긴장 넘치는 복선은 물론, 난데없는 상황 반전 내지 급진전이라는 강력한 작품 통제력을 자랑한다. 특히 트라쿠스가 오랜 노예생활에서 풀려나서 햇살을 움켜쥘 듯 하늘에 손을 대는 희망의 모습과, 바로 그 다음 두 페이지를 장식하는 강렬한 죽음의 이미지의 대비는 이 만화에서 보여줄 수 있는 시각 연출의 백미다.

항상 그렇듯이, 티 없는 옥은 없다. 예를 들어 작품에서 필요 이상으로 자주 등장하는 잔학성은 작품의 내적 리얼리티와 ‘인간이란 게 다 그런거지’ 식의 시니컬한 메시지를 잘 살려주지만 독자층을 좁게 만드는 요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히스토리에>의 경우 가장 큰 잠재적 문제는 연재 작업 그 자체다. 일본 현지에서도 월간지 연재작인터라 단행본 발간주기에 특별히 연연할 것은 아니지만, 우선 내용 전개가 확실히 느리다. 현재 발간된 2권까지의 분량에서는, 에우메네스의 현재 모습과 유년기 경험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아직 알렉산더의 부하로 들어가 보지도 못했다. 게다가 장편시리즈이기 때문에 엿가락 늘리기식 지속을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요소까지 겹치면, 정말 난감해진다.

사실 말이 옥의 티지, 사실은 투정이다. 더 빨리 더 많이 에우메네스의 모험담을 접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라서 그런 셈이다. 그 멍한 청년과 함께, ‘인간의 조건’에 대해서 논하고 싶다. 에우메네스는 모르겠지만, 사실 작가는 이미 자신의 견해를 꽤 명확하게 표출을 해버리고 있다. 2권 마지막 페이지, 어린 에우메네스가 감정과 생존본능의 무게중심을 비견하여 결론에 도달하는 대목을 보며 작가에게 마음 속으로 기립박수를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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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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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네이버덧글 백업]
    – 쿠쿠 – 예전에 영점프에 연재되어서 기대하다가 이렇게 단행본으로 나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느린 전개때문에 지적하셨는데, 혹 모르죠. 칠성의 나라같은 경우도 있으니… 그나저나 유레카도 그렇고 작가분이 로마이야기에 재밌게 읽고 아이디어를 그쪽시대에서 찾은게 아닐까라는 아주아주 조심스런 생각입니다. 2005/06/23 14:05

    – 캡콜드 – !@#… 연재량이 월간으로 20p 미만. 그리고 1권에서 평탄하다가 2권에 가서야 확 이야기를 진전시켜버리기 때문에 일본에서도 이례적으로 1,2권 동시출간. 2005/06/23 23:52

    – 구기 – 에우메네스가 연속되는 여자의 꿈에 의해 갑자기 놀라운 병기로 전환된다는 설정에 왠지 당혹감이 들기도 한다굽쇼. 오늘 출근하자 마자 2권을 잡고 앞부분 체육 격투 장면에서 당황하면서… 아직 끝까지 읽지는 못했굽쇼. 2005/06/24 09:06

    – 코믹도치 – 이 작가한테선 뭐랄까? 건조하면서도 뜨거운 맛이 있어서 딱 제 취향이에요! 2005/07/06 19:09

    – ㅋㅅㅋ – 매우 흥미로운 만화. 2005/08/05 00:48

    – 좋은사람 – 대단하네요 만화에 대한 지식이 많은분 같네요 2006/02/15 15: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