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만에 책내서평.
잔혹함을 모르는 잔혹한 세계의 동화
김낙호(만화연구가)
기왕 이렇게 된 김에 끝까지 읽기(클릭)
!@#… 정작 출판을 하는 사람들이 만화의 표현양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아무리 훌륭한 작품을 들고 오더라도 상당부분 망가질 수 밖에. 그리고 한국에서 단지 멋있게 보이려고 그래픽노블이라는 명칭 쓰는 것, 무척 짜증난다. 뭐 그것을 무려 그래픽 소설이니, 그림소설이니 직역해서 쓰면서 정작 그게 만화를 지칭한다는 것 자체도 제대로 모르는 글쟁이들을 보면 더 짜증나지만 (만화의 지위니 뭐니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도대체 무엇에 대해서 글을 쓰고 있는지조차 모르면서 글을 뱉어낸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라고나). 하지만 여전히, 작품 자체는 강추하니까 리뷰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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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의 인위적 구축에 관하여 -『유리의 도시』
김낙호(만화연구가)
소설 원작 『유리의 도시』는 폴 오스터의 대표작 『뉴욕3부작』의 첫 작품이고, 잘 알려져 있듯 이 작가는 현대문학의 대표적 문인 가운데 하나다. 사실 줄거리는 간단하게 시작한다. 가명으로 탐정소설을 쓰는 퀸이라는 주인공이, 잘못 걸려온 전화를 받고는 한 여성 고객에게 탐정일을 의뢰받아서 수상한 노인 박사를 미행하다가 점점 더 큰 음모의 소용돌이로 빠져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형적인 느와르풍 펄프 탐정소설의 외관 속에서 중첩된 정체성, 언어적 기표와 기의의 혼란, 그리고 결국 분열증적 도피에 대한 중층적인 이야기들이 장르적이면서도 동시에 해체적으로 펼쳐진다.
최근 한국에서 만화판 『유리의 도시』(오스터 글/ 마주첼리, 카라식 그림/ 황보석 역/ 열린책들)가 출시되었다. 한국에 폴 오스터의 책들을 소개해온 출판사가, 원래 오스터의 책들을 번역해온 번역가를 거쳐서 일종의 소품으로 들여온 것이다. 사실 이 작품이 94년에 만화로 만들어진 것은 작가의 친구이자,『쥐』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골수 뉴요커 아트 슈피겔만의 제안에 따른 것이었다. 슈피겔만은 부드러움과 비정한 도시가 공존하는 탁월한 느와르 그림체를 선보인바 있는 마주첼리를 끌어들였으며, 원작이 지니는 관념적 세계관과 기이한 연출방식을 만화 특유의 방식으로 소화해낼 인재로 자신이 창간한 대안만화잡지 <로>의 편집인 출신인 카라식을 한 팀으로 엮었다. 결과는? 마치 『유리의 도시』는 애초부터 당연히 만화로 그려졌어야 했을 작품이라는 인상을 풍긴다. 만화판 『유리의 도시』는 만화적 표현력의 극단에서 폴 오스터가 펼쳐낸 복합적 세계관을 완전하면서도 독자적으로 소화해내고 있다.
가장 돋보이는 것 가운데 하나는 도시적 경직성을 나타내는 연출의 형식미다. 세로 페이지를 세로의 9개 칸으로 균등하게 분할하는 칸 연출은 뉴욕의 바둑판식 도로의 이미지이자 고층빌딩의 창문, 그리고 나아가 감옥문을 연상시키는 경직성을 자연스럽게 전달한다. 하지만 그 속에 사는 인간군상은 도시 자체와는 달리 둥그런 필체로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생을 영위한다. 하지만 그 정상성 가운데 때로는 선이 거칠게 갈라지면서 속에 담아둔 광기와 혼란의 내면이 슬쩍 엿보이는 순간이 다가오기도 한다. 또한 언어적 기호와 도상 기호의 자유로운 혼합 역시 만화적 연출의 힘을 과시한다. 이 작품에서 궁극의 인위적 구조이며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기제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도시’, 다른 하나는 바로 문화적/사회적 코드로서의 ‘언어’다. 언어는 세계의 자연스러운 모습들을 인위적 기호로 치환하며, 그 속에서 때로는 갑갑한 현기증을 일으키도록 하는 주범인 셈이다. 그런데 도상 기호의 자유로운 흐름, 언어(문자)와 그림의 혼합을 가장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는 매체가 만화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자연언어를 발견하려는 실험을 당한 후유증으로 보통의 언어구조와 다른 사고방식을 지니게 된 극중 인물 피터 스틸맨 (아들)이 주인공 퀸에게 말을 거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하나의 이미지는 다른 이미지로 자유롭게 치환되며, 그 전체를 아우르는 것은 스틸맨의 입에 완전히 붙어서 나오고 있는 말풍선 속의 메마르고 모호한 말들이다. 구조주의 언어학에서 기표와 기의의 분리관계를 이야기하듯, 말과 그림은 서로와 위태로운 줄다리기를 하는 명 시퀀스다. 혹은 존 밀턴의 실낙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읽어나가는 장면 역시 탁월한 사례다.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아담의 행위는 그대로 만화의 칸 속에서 문자가 되어 바닥에 그림자로 달라붙고, 세상 사물의 자연스러운 모습과 문자라는 언어기호의 인위성이 그로테스크한 대비를 이룬다. 작품의 세계관을 그대로 옮겨놓은 이러한 탁월한 연출효과를 그 어떤 다른 매체에서 흉내낼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이러한 요소들은 반대로 생각하면 만화 특유의 자연스러운 독서를 방해하는 단점을 초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줄거리 요약만 하는 명작문학 학습만화가 아니라 또 다른 버전의 ‘폴 오스터 소설’을 읽는다고 생각하면,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는 독자들이기를 기대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 게다가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형식적 미학을 추구하기 위해서 줄거리 진행의 재미를 놓치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원래 원작 자체는 팜므파탈, 수상한 과거를 가진 용의자, 미궁으로 빠져드는 사건, 그 속에서 모호해지는 정체성 등 장르 탐정소설의 얼개는 줄거리적 재미를 충분히 보장한다. 혹은 줄거리가 해체적으로 변모하는 말미까지 전부 포괄하더라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도시 버전, 혹은 정신분열증 증상 전개의 비유적 표현이라는 틀에서도 새롭게 읽어낼 수 있다. 이러한 다양한 해석의 방식을 가로막지 않는 포괄적 그림체의 열린 연출은 이 작품에 작가팀이 들였을 세심한 고민을 엿보게 한다. 이렇듯 미학과 재미 두 요소들을 종합해서 판단을 내리자면, 만화판 『유리의 도시』는 명작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 걸작의 경지를 기웃거리는 매우 우수한 작품으로 별 무리 없이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품의 우수성과는 별개로, 이번에 출시된 한국어판은 편집 제작상의 몇가지 큰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만화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인하여 작가들의 세심한 연출이 상당부분 뭉개지는 실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당장 표지의 일러스트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미국에서 원래 출시된 판본은 주인공 퀸의 정상적 외관부터 시작하여 완전히 갈라진 선으로 그려진 내면의 혼란의 묘사까지의 중간과정들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한국어판은 마지막 혼란의 그림을 생략하고 중간과정까지만 잘라버리는 실수를 범했다. 더욱 큰 문제는 바로 글꼴의 사용이다. 이 작품에서 ‘언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지대하다. 그렇기 때문에 원어 판본은 경직된 분위기의 곧은 글꼴, 제3자적 시선의 타자기 글꼴,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대화를 담아내는 부드러운 글꼴 등을 포함, 다양한 글꼴들이 효과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세심한 연출의도는 한국어판에서 일괄적으로 가벼운 글꼴 하나로 통일해버리는 통에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보도 자료에서 만화라는 용어의 사용을 의도적으로 꺼리며 ‘그래픽 노블’이라는 어휘로 한껏 멋을 부려보고 싶은 심정은 이해하지만, 그렇다면 그에 합당한 세심한 미학적 관심을 먼저 발휘해 주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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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 한국어에서 “보수”의 관례적인 반대말은 “진보”다. 그런데 정작 영어에서 conservative의 반대는 liberal이다. 이런 것이 바로 “세계관”.
— 2005 copyleft by capcold. 이동수정영리 자유 —
!@#… 약간 떨어져서 보고있노니, 한국의 진정한 저력은 근면도 한도 신바람도 아닌…
“융통성”이다. 비싼 변호사들을 동반할 경우를 제외하곤 그다지 융통성이 없는 시스템의 나라에서 서식하고 있다보니 확실히 그런 사회적 기후의 차이가 느껴진다.
!@#… 나쁜 쪽으로 빠지면 얍삽이, 좋은 쪽으로 빠지면 역동성의 원동력. 중국인의 배째라와 한국인의 얍삽함과 일본인의 소심함… 뭐랄까, 동아시아의 나름대로 훌륭한 삼각편대다.
(리플보다가 약간 추가)——
!@#… 한중일의 차이는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만약 다음 토익 시험의 문제가 무더기 유출된 자료가 있다고 치자. 한국에서는 아마도 비실명제 온라인 유학 커뮤니티를 위주로 좌악 퍼질 것이다. 일본에서라면, 몇몇 개인들이 쉬쉬하면서 자기만 혼자 볼 것이다. 중국에서라면, 시험장 앞에 사람들이 좌판을 벌여놓고 판매를 할 것이다. -_-; (거의 실화)
!@#… 융통성이란 뭘까: 융통성은, “해내야 한다”는 강한 목표지향성과, “그러기에는 시스템이 안받쳐줘! 시스템 대로 하나씩 나아가려면 시간이나 재원이나 여튼 뭐든지 부족해”라는 냉엄한 현실 사이의 괴리를 극복해내는 위한 하나의 기제다. 해내야 한다는 목표는 타협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해서 현실적으로 그 목표를 추구하는 것을 가로막는 시스템을 완전히 개혁하지도 않는 선에서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조금씩 시스템을 어기지만, 그 결과 목표가 훨씬 효과적으로 충족되며 또한 불상사를 컨트롤 할 수 있다는(또는 들키지 않을 것이라는) 나름의 조심성과 자신감으로 밀어붙이는 사고 및 행동 패턴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애매한 상태의 무언가를 놓고 뭔가 판단을 내려야 할 때 굳이 세세하게 따지지 않고 가장 편한대로 결정해버리는 것도 그런 융통성의 하나다. 속칭, “애매하면 세이프”. (어떤 학자가 비슷한 이야기를 했을지 어땠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내가 지금 지어낸 정의다).
(추가 끝)——————-
!@#… 2년이 걸리고, 200페이지를 새로 그리고 나서야 나왔다는 2권. 3권에서는 그 콤비네이션을 따르지 말아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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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라는 지리멸렬한 파멸 – <십자군 이야기2>
성격 안좋고 힘센 나라가, 자신의 잇속을 위해서 마음대로 다른 나라를 침공하고는 그것을 ‘전쟁’이라고 불렀다. 그 다른 나라의 지도자도 하필 상당히 문제많은 인간이었기에, 그 명분은 무려 민주화였다. 여하튼 침략은 전쟁이라는 이름을 뒤집어썼고, 잠시의 화려한 쑈를 거치더니 이내 전쟁은 끝났다. 아니 단지 이번에도 일방적으로 끝났다고 선포를 당했다. 실제로는 전혀 끝나지 않아서, 그 뒤 2년여가 다 지나도록 아직도 세계 도처로 무대를 확장하고,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추악한 형태로 계속되고 있다. ‘민주화 해방’ 되었다는 이라크는 국가 분열과 내전의 위기에 몰렸고, 런던에서 많은 안타까운 죽음을 낸 지하철 폭탄 테러가 일어나고… 모든 것은 이 지리한 과정의 일부에 불과하다. 전쟁을 처음 시작하는 책동가들은 모든 것이 자신들의 승리로 마무리되어 깔끔하게 털고 일어설 것을 항상 계산하지만, 실제로는 길고 긴 늪으로 빠져들어 버린다. 미국의 또다른 현대사에 길이 남을 전쟁 책동 공작이었던 베트남전으로부터 인류가 얻은 교훈 따위는 전혀 없는 듯 하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 당시, 전쟁이라는 충돌형태의 원인에 대하여 날카롭게 분석해서 독자들을 전율시켰던 한 만화가 있었다. <십자군 이야기>라는 제목의 이 만화는, 중세 십자군의 ‘성전’을 통해서 누군가에 의해서 전쟁이 책동되고, 사람들이 어리석게도 동원되고, 그 와중에서 누군가가 희생당하고 누군가는 잇속을 챙기는 메커니즘을 해학적으로 풀어놓았다. 그리고 2년여가 흐른 후, 여전히 전쟁이 진짜로 종식될 가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오랫동안 고대했던 속편이 나왔다. <십자군 이야기2>(김태권 / 길찾기)는 전작이 끝난 부분에서 새로운 시작을 한다. 1권이 군중십자군의 우매하고도 비극적인 개전을 통해서 십자군 전쟁의 전체 패턴을 압축적으로 묘사해냈다면, 이제 2권에서는 본격적으로 정규군에 의한 전쟁이 시작된다. 귀족 제후들, 종교지도자들이 정식으로 군대를 이끌고 나름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동쪽으로 간다. 군중 십자군이라는 무지한 욕심꾼들을 슬기롭게(?) 극복한 동방 로마제국은 이번에는 아예 자신들을 통째로 먹어 삼키려는 진짜 침략자들을 맞이하게 된다. 이슬람은 오합지졸 군중십자군을 퇴치하고는 방심하다가, 예루살렘까지 일시적으로 빼앗기는 패배를 겪는다. 그리고 물론 그 와중에는 정복에 눈이 먼 십자군이 자행하는 비인간적인 학살과 (문자 그대로) 포식에 희생 당하는 불특정 다수의 주민들이 있다.
2권의 핵심 정서를 압축적으로 나타내는 주인공은 바로 기사 보에몽이다. 그는 강력한 무력과 높은 지도력으로, 전형적인 전쟁 서사극 주인공의 됨됨이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현실이라는 것은, 멋진 영웅담과는 무척 거리가 멀다. 승리의 순간에 이야기를 끝내거나, 비장한 죽음으로 여운을 남기며 나머지 이야기를 바람속에 흐트려놓을 수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전쟁에 쉬운 결말 따위는 없다. 당초 십자군의 명분이었던 예루살렘 탈환을 이루고 난 후에도, 십자군은 끝나지 않는다. 1차 십자군의 강력한 군사적 리더 보에몽이 완전히 몰락해버리고 나서도, 끝나지 않는다. 끝끝내 질리지도 않고 계속 지리멸렬하게 계속 꿈틀대는 전쟁의지 속에서, 당초의 책동가들도 이미 스스로 예상한 이득의 궤적에서 벗어난지 오래다. 앞으로 훨씬 더 많은 횟수의 “제*차 십자군 원정”이 이어질 것을 역사적 지식으로 알고 있는 현대 독자들은 정말이지 질려버릴 노릇이다. 전쟁은 뚜렷한 비전을 가지고 시작하지만, 예상치 못한 요소들이 점차 붙어나가면서 결국 헤어나오기 힘든 커다란 수렁이 되어버린다.
전작의 프롤로그가 서방세계의 중세 이전 전쟁사를 다루었다면, <십자군 이야기2>는 우리가 ‘이슬람 세계’라고 부르는 그 중동 공간에 존재했던 이슬람 종교 이전의 문명사를 이야기해주고 있다. 현재까지도 사람들은 종교가 어쩌니 하고 명분을 세워서 싸움을 찾고 있지만, 사도 마호멧 이전의 문명사도 사실 별다를 바가 없다! 원래부터 더 많은 것을 차지하려는 야욕을 엔진으로 하는 전쟁들이 넘실댔으며, 그 속에서 균형과 부조화가 번갈아가며 세상을 지배했다. 1권에서만큼 프롤로그와 본 내용이 유기적으로 연결된다는 느낌은 적지만, 십자군에 맞서는 이슬람 진영의 처지를 좀 더 본격적으로 집중할 3,4권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연결다리를 시사하고 있다.
전작 이후로 흘러간 2년여의 시간은, 작가의 표현능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 고전적 드라마와 현대적 풍자, 극중 이야기와 작가의 직접 개입을 넘나드는 서술 솜씨는 한층 능란해졌고, 그림 역시 더욱 통일성 있게 다듬어졌다. 각종 해학적 농담은, 더욱 농밀하면서도 전작에서 가끔 보였던 지나친 집착에서 벗어나 양념의 역할로 좀 더 확실히 자기 자리를 찾고 있다. 200여 페이지를 다시 그려야 했다는 작가의 후기가 그간의 과정을 미루어 짐작하게 해줄 뿐이다. 지적인 성향 역시 여전해서, 작품 뒤 빼곡이 차있는 참조도서에까지 해설을 한마디씩 더해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물론 아직 좀 더 다듬어졌으면 하는 부분도 없지 않다. 예를 들어 정사와 야사, 가설을 만화 자체의 서술 속에서 뚜렷이 구분되게 묘사해 내는 방법론이 더욱 연마되어야 한다. 분명히 극중 십자군이 벌이는 이야기는 것을 전제로 하는 작가의 여러 현실풍자적 해설들이 이어진다. 하지만 군중십자군의 은자 피에르가 1차십자군에서 롱기누스의 창을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그 피에르와 동일인물이라는 가설을 실제 극 속에 풀어 넣음으로서, 픽션의 요소들이 녹아들어가버린다. 그리고 모든 것을 직접 현재진행형의 사건이자 사실로서 보여주는 관행에 익숙한 만화라는 매채에서, 그것은 자칫 역사적 사실을 왜곡했다는 인상, 나아가 전체 내용의 신뢰성을 흐리는 폐단을 낳아서 작품의 큰 주제와 맥락에 누가 된다.
분명히 <십자군 이야기2>는 이 시리즈의 전작을 뛰어넘는 명작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또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십자군 이야기3>이 더욱 뛰어난 모습으로 돌아와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역시, 인류가 조금만 더 현명해져서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과 메시지들이 하나도 신선하고 충격적이지 않은 조화로운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이상주의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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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지난호 기획회의. 우연찮게 비슷한 시기에 씨네21(507호)에서도 리뷰가 올라왔던데… 비교하며 읽어봐도 재밌을지도. 어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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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성의 조건 – 이와아키 히토시의 <히스토리에>
꽤 옛날, 한 왕이 있었다. 그 때 왕들이 의례 그렇듯이, 어디론가 남의 땅에 들어가서 말달리고 싸우고 이김으로서 ‘정벌’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뭐가 그리 속에 불길이 타올랐는지, 정벌을 하고 나서 그 다음 그곳을 지배하고 가꾸는 것에 큰 신경을 쓰지 않고, 곧바로 다음 목적지를 향해서 나아갔다. 정벌하고 정벌하고 또 정벌한 결과, 어느틈에 지중해 연안에서 아시아 전역을 다 휩쓸고 다녔다. 뭐 그러다가 결국 죽었지만, 그의 정벌 자체에 대한 그 무한한 집착과 성과는 어째서인지 후세에서 높이 평가받아, 알렉산더 ‘대왕’이라고 불렀다. 여하튼 그저 끊임없이 정벌을 반복하는 모습은 단순한 권력이나 지배욕과도 뭔가 다르며, 오히려 마치 병정개미와도 같은 순수한 본능에 가까워 보일 정도다. 그 과정을 바로 옆에서 냉정하게 지켜보는 입장이라면 어떨까? 사회적 명분을 뒤로 하고, 사실상 생물학적 특성인 듯한 그 행위들을 주욱 따라간다면 무슨 느낌이 들까.
알렉산더의 파란만장한 시대를 다루는 만화 <히스토리에>(이와아키 히토시 / 서울문화사 / 2권 발행중)의 주인공은 특이하게도 알렉산더 본인이 아니라 그의 개인 서기관이었던 에우메네스다. 에우메네스는 서기관이라는 입장에서 알렉산더의 기행(奇行)을 지켜보았으며, 총명한 두뇌와 리더십을 바탕으로 알렉산더 사후에 군대의 전권까지도 얻게 되는 인물이다. 물론 완전히 돋보이기 전에 결국 배신당해서 사망하지만, 확실히 특이한 경우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이와아키 히토시라는 작가가 과연 누구였던가. 인류가 사실은 생태학적으로 문제가 많은 종족이며, 그래서 먹이사슬을 복원하러 정체불명의 포식자들이 나타나서 인간의 몸에 기생, 인간으로 둔갑하여 들어간다는 충격적인 세계관으로 90년대 고품격 일본만화의 정점을 이루었던 <기생수>의 작가다. 그 작품에서 중요하게 사용되었던 모티브는 인간 바깥의 시선으로 인간을 냉철하게 바라보건데, 사실 인간이란 것이 별 것 없을 수도 있다는 섬뜩한 관찰담이다, 말도 안되지만 너무나도 순수할 정도로 직선적이고 본능적인 기행을 냉정하게 목격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에우메네스에게 그 접근법과 문제의식이 그대로 계승된다.
그 문제의식이란 바로 인간됨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히스토리에> 초반의 배경이 되는 고대 그리스권 도시국가들을 아크로폴리스니 민주주의의 시발점이니 하지만,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모든 시민은 평등하지만, 시민이라는 계급은 전혀 평등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민의 성숙함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자들은 그들과 다른 종족들을 바바로이(야만인)라고 부르며 폄하하며 노예로 삼아버렸다. 여성과 아이는 물론 정치적 참여권을 가진 일반 시민이 아니며, 게다가 혈통이 중시되었다. 그런데 그렇다면 바바로이와 문명인의 경계, 즉 시민과 노예의 경계는 도대체 얼마나 명확한 것인가. 사실 전혀 명확하지 않다.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일 뿐, 그리 선천적이고 절대적인 기준 따위는 없다. 그것은 바로 인간적이라고 부르는 성숙함의 경계선 역시 사실 별 것 아니라는 이야기와도 같다. 그럼에도 자꾸 자신들을 ‘인간’으로 자처하게 만드는 이성과 감성의 기준을 만들어 내며 자족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하지만 이성과 감성에 우선하는 것은 바로 생물로서의 본능 그 자체다. 그 중 하나는 개체의 생존본능, 또 다른 하나는 그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정복이나 복수 등 외적 공격성향이다. 고리타분한 고대 모험담이나 신화 섞인 전쟁이야기나 나오기 쉬운 이 시대와 역사를 배경으로, <히스토리에>는 인간에 대해서 논한다. <기생수> 당시보다도 더욱 진하고 집요하게.
인간(들)의 본질을 캐내기 위하여, 바깥의 자가 인간 활동 패턴을 관찰한다는 감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캐릭터들의 무심한 표정 덕분이다. 사실 이 작가는 그다지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만한 팬시 느낌 강한 미소년 미소녀를 묘사하지도 않을 뿐더러, 표정묘사 역시 지극히 부족하다. 아니 사실 데생이나 그림체 자체가 뭔가 ‘끌리는 맛’이 부족하다. 하지만 지금 기준에서 지극히 야만적이고 잔인한 제도들을, 당연한 문명의 꽃으로 인정하고 있는 이쪽 세계의 괴리감에는 그런 멍하고 무표정한 모습들이 오히려 확실한 효과를 준다. 그에 비해서 일반적인 연출방식은 대단히 완성도가 높아서 긴장 넘치는 복선은 물론, 난데없는 상황 반전 내지 급진전이라는 강력한 작품 통제력을 자랑한다. 특히 트라쿠스가 오랜 노예생활에서 풀려나서 햇살을 움켜쥘 듯 하늘에 손을 대는 희망의 모습과, 바로 그 다음 두 페이지를 장식하는 강렬한 죽음의 이미지의 대비는 이 만화에서 보여줄 수 있는 시각 연출의 백미다.
항상 그렇듯이, 티 없는 옥은 없다. 예를 들어 작품에서 필요 이상으로 자주 등장하는 잔학성은 작품의 내적 리얼리티와 ‘인간이란 게 다 그런거지’ 식의 시니컬한 메시지를 잘 살려주지만 독자층을 좁게 만드는 요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히스토리에>의 경우 가장 큰 잠재적 문제는 연재 작업 그 자체다. 일본 현지에서도 월간지 연재작인터라 단행본 발간주기에 특별히 연연할 것은 아니지만, 우선 내용 전개가 확실히 느리다. 현재 발간된 2권까지의 분량에서는, 에우메네스의 현재 모습과 유년기 경험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아직 알렉산더의 부하로 들어가 보지도 못했다. 게다가 장편시리즈이기 때문에 엿가락 늘리기식 지속을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요소까지 겹치면, 정말 난감해진다.
사실 말이 옥의 티지, 사실은 투정이다. 더 빨리 더 많이 에우메네스의 모험담을 접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라서 그런 셈이다. 그 멍한 청년과 함께, ‘인간의 조건’에 대해서 논하고 싶다. 에우메네스는 모르겠지만, 사실 작가는 이미 자신의 견해를 꽤 명확하게 표출을 해버리고 있다. 2권 마지막 페이지, 어린 에우메네스가 감정과 생존본능의 무게중심을 비견하여 결론에 도달하는 대목을 보며 작가에게 마음 속으로 기립박수를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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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 연쇄살인마 유영철 사형 확정이라는 뉴스가 최근 흘러나왔다. 물론 어제 대우 김우중 전 회장 검찰 출두라는 뉴스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피해의 규모가 다르다, 피해의 규모가!). 그리고 심심찮게 들려오는 여러 변태들의 소식 앞에 참 한국은 빠른 속도로 범죄선진국화 되어가고 있구나, 가히 세계수준이구나, 하는 생각이 밀려온다.
!@#… 그런데 이런 소식이 나올때마다 항상 토론이 붙는 것은, 사형제 찬반 이야기. 이런 놈들은 죽여버려야 한다, 아니다 사형은 국가의 살인이다 등등. 나는 개인적으로 사형폐지론자이고, 최근의 사형폐지론 움직임을 나름대로 환영하고 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이쪽 진영의 여러 심성 고운 사람들과는 좀 근본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사실 문제는 단순히 국가적 살인장치로서의 사형제도 폐지냐 존속이냐가 아니기 때문이다. 과연 현대사회에서 사형제도가 최고 형벌으로서 효과적이냐 아니냐, 효과적이지 않다면 어떤 대안이 있는가, 의 문제라고. 나는 항상 이야기해오듯, 사형제도가 형벌으로서 그다지 효과가 없다, 라는 쪽. 죽으면 땡이니까. 피해자들에게 특별히 위안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 것들의 죽음’이 피해자들이 입은 아픔을 실질적으로 보상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사회적으로 일벌백계의 효과가 있는가하면, 그것도 전혀 아니다. 요즈음의 사회적 자극수준이라면, 적어도 시청앞 광장에 데리고 나와서 눈 앞에서 삼대를 몰살하고 능지처참을 하지 않는 한, 그다지 ‘공포’에 의한 예방효과는 없다(사실 그것조차 빠른 속도로 면역력만 키울 뿐일 것이다). 유일하게 효용이라고 할 수 있을법한 건 사회적인 “스트레스 해소”, 즉 권선징악의 샘플을 보여주어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것 정도인데, 그건 엽기 변태 살인마 한둘 정도 처단한다고 나아지지 않는다. 뭐 적어도 전두환이 잘먹고 잘살고 있는 한.
!@#… 그렇다면 현대사회에서 별 효용도 없는 사형제도를 뭐하러 유지할까, 하는 거다. 인권 시비에나 휘말리고, 오남용 가능성이 항상 잠재하고 있는데. 오히려 이 사회에 가장 걸맞는, 좀 더 잔인하고 집요한 형벌을 창조해내야 한다고 본다. 범인에게 진짜 후회의 눈물을 흘리게 하며, 그 과정이 너무나 섬뜩해서 사람들이 일벌백계의 교훈을 얻고, 나아가 사회적 스트레스까지 해소할 수 있는 것. 살아서 고통받아야 뉘우친다. 사형수들이 참회한다 어쩐다 하는 것은, (죽음의) 고통 속에서 살아있기 때문이다. 살아서 고통받아야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도 교훈을 얻고 사회적 스트레스가 풀린다. 그 고통은 충분히 강도가 세며, 누구나 공감 가능하며 한다.
!@#… 사실 그래서 저는 형벌로서의 ‘체벌’을 적극 지지한다. 조상의 지혜가 서려있는 태형(곤장)이야말로 위의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는 멋진 형벌이다. 또 궁형 (거세)도 지지한다. 발정기마다 앞뒤 못가리고 온 동네 강아지들을 임신시키는 개새끼는 보통 다음날 거세당한다. 인간도 다를 바 없어야겠지. 정관수술 같은 거 말고, 완전히 잘라버리는 것 말이다. 그리고 유영철 같은 ‘인간의 형상을 한 재앙’ 에게는, 옛 중국인들의 잔인한 지혜를 총동원하는 것도 나이스하리라 본다. 한나라의 인돈(인간돼지: 사지를 잘라내고 두 눈과 귀를 도려낸 다음 돼지우리에서 살아가게 만들기) 같은… 다시금 말하지만, 나는 인권 때문에 사형을 반대하는 멋진 사람이 아니니까.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 수정 영리 자유 —
!@#… 나는<평성너구리대전폼포코>를보면서무려자연보호캠페인으로해석해내는소위기자니평론가니하는사람들을도저히이해하지못하겠다.그들은이작품에서이야기하는전환기산업사회의계층모순과투쟁,그리고그속에결국적응하면서살아나가는소시민들의삶이안보인단말인가.얼마나순진무구한장미빛세상에서살았길래이정도로명쾌하게비유해줘도그개념자체를못받아들인단말인가.그것도제작된지10년이된작품인데도아직도그런글을무려기사로내뱉고있다니참기가찰노릇이지.-_-;
!@#… 한국 기업들의 유사종교적 경영기법의 폐단. 절대공감. 애니메이트 동호회에서 mondain님 소개로 보게된 글인데, 절절하고 명쾌하다…
문제제기: http://www.scieng.net/zero/view.php?id=now&no=8364
호쾌한 답: 거기에 달려있는 ‘프리라이터’님의 리플들.
!@#… 지난호는 신년특집으로, 그냥 자유롭게 자기가 작년 한해 읽은 책들 중 가장 좋았던 것 하나 골라서 추천하는 것이었음. 원래 한국에 출시도 안된걸로 작품평쓰는 짓거리는 되도록이면 안하는 주의지만… 이번에는 그냥 큰맘먹고 관철. 이 평을 보고 삘받은 사람이 있으면, 아마존에서 주문하시길(사실, 예전에 나왔던 ‘딜버트의 법칙’은 유머라는 관점에서 볼 때, 한국 번역의 수준이 심히 민망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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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동안 읽은 모든 책을 통틀어서 가장 감동 깊게 읽은 것 한 권만을 뽑는다는 것은 무척 당황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굳이 선택을 해야 한다면, 그리고 장르에 상관 없이 선택해도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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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스식 예측불능의 법칙>
좋은 트렌드가 발생하면, 예상치 못했던 무언가가 그것을 꼭 망쳐놓고 만다. 몇가지 사례:
좋은 트렌드 예상치 못한 악재
컴퓨터 덕분에 일 처리가 100% 더 빨라졌다 컴퓨터 때문에 일이 300% 늘었다
여성에게 더욱 많은 정치권력이 주어졌다 여성들도 남자만큼이나 멍청하다
대중음악이 날로 발전하고 있다 내가 너무 늙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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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분명히 사회과학 서적은 아니다. 아니, 아예 작가가 대놓고 통계는 어차피 사기치려고 가져다 붙이는 것에 불과하니까 피차 귀찮은 짓 하지 말자고 넉살 좋게 넘어가 버린다. 하지만 통찰의 깊이는 농담의 깊이 만큼이나 끝이 보이지 않는다. 98년, 즉 인터넷과 초고속 통신의 대폭발이 일어나기 전에 쓰여진 책이면서도 “누구나 뉴스 기자가 될 것이다”, “사람들은 필요없는 뉴스를 적극적으로 무시해야 할 것이다” 같은 전형적인 인터넷 시대의 모습들을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다. 물론 ADSL의 보급화 이전이라서 ISDN을 최신기술로 소개하고 있다든지 하는 기술 특유의 빠른 시대변화상에 따른 격세지감은 어쩔 수 없지만, 가장 단순한 인간 본성에 대한 비관론 위에서 펼쳐내는 현란한 디스토피아의 향연은 박장대소를 금할 길이 없다.
사실, 이 책이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전작 <딜버트의 법칙>만큼 일관성 있는 흐름과 핵심적인 결론으로 수렴되는 구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사의 각종 토픽들이 챕터로 잘게 나누어져 있다. ‘애완동물’, ‘사교생활’, ‘건강’ 뭐 이런 식으로 구분하여, 각각에 대해서 이런 트렌드가 발생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중구난방이라는 것이다. 물론 앞에 소개한 인간본성의 3대 법칙이라는 구심점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기는 하지만, 다 읽고 난 뒤에 각각의 것들이 잘 기억이 안 난다거나, 뭔가 끝까지 독파했다는 느낌이 부족한 감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마지막 부분을 ‘미래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으로 이름 짓고, 뉴에이지 운동을 연상시키는 극단적인 상대주의의 손을 들어준 것은 전체 책 구성이나 시니컬한 감성에 있어서 상당한 마이너스 요인이 되고 있다.
하지만 이 정도는 대충 넘어가도 대세에 지장은 없다. 마지막 챕터라 할지라도, 그냥 챕터 통째로 안 읽어도 되는 구조니까 말이다. 여전히 전체적인 책의 인상은, 이 작가는 천재라는 것이다. “미래에는 아무리 쓸모없고 멍청한 상품이라 할지라도 무조건 사들일, 귀가 무지 얇은 고객을 찾기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쉬울 것이다” 같은 자신만만한 예측을 만날 때 더욱 더. 그것을 매니아 마케팅이라고 부르든, 명품족이라고 부르든, 천민 졸부라고 부르든, 이미 우리에게는 현실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그리고 아무래도 더욱더 이런 경향이 강해질 듯 하지 않던가.
어떤 훌륭한 출판사가 한 훌륭한 번역가를 고용해서 내준다면 참으로 좋겠지만, 사실 차기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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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2004년 추천도서 5권
– 안전지대 고라즈데 (조 사코 / 글논 그림밭)
– 널 좋아한적 없어 (체스터 브라운 / 열린책들)
– 남쪽손님/빗장열기 (오영진 / 길찾기)
– 일지매 1-5 완(고우영 / 애니북스)
– 불의 검 1-12 완 (김혜린 / 대원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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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 요새, 굶어죽은 다섯살 아이와 360만원짜리 아이 생일 파티 기사가 돌면서 사람들이 열심히 분노를 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 가운데, 정말로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다.
…당신들. 시장개방과, ‘분배보다는 성장’정책과, 노동자에게 불리한 고통분담을 인내할 것을 미덕으로 주장하던 것 아니었나? 이런 막나가는 빈부격차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신자유주의적 천민 자본주의 질서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 즉 ‘좌파적 정책’을 펼칠려고만 하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던 게 바로 당신 자신들 아니었나? 그래서 40%가 한나라당에 표를 던지고, 70%가 노무현 정부가 분배와 복지의 정책을 하겠다니까 반대를 한 것 아니었나? 당신들이 늘 되뇌이던 그 방향으로 가면 당연히 이렇게 된다는 것을 정말로 몰랐단 말인가. 당신들이 이런 세상이 되도록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놓고는, 이제와서 이미 굶어죽은 아이에게 싸구려 동정이나 5초 정도 보내고, 가진 자들을 미워하기만 하면 만사해결인가. 분노하고 화풀이는 하되, 사태예방이나 해결은 신경쓰지 않는다… 라는 건가.
내 상식으로 생각한다면, 지금 게시판에서 날뛰는, 막나가는 빈부격차에 분노하는 사람들의 절반 이상은 민주노동당에 당장 가입해야 할 터이다. 나머지 절반도 분배정책과 복지를 확충하라고 여당에 쓴소리를 하고, 친기득권층 야당에 대한 모든 지지를 철회해야 할 터이다. 하지만 세상은 내 상식 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보다 커다란 거대한 원칙이다. 그 공식은 E=mc^2 만큼이나 근본적이고 포괄적이다. 바로, “대중은 돼지다“.
…뭐, 현대사회에서는 누구나 다 대중이라서 희망도 절망도 모두 그 속에서 찾아야 하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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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본질 – <루쿠루쿠>
정의의 주인공이 사악한 악당을 물리친다는 설정은 확실히 매력적이다. 사람들은 선과 악이 명백하게 잘 나누어져 있고 그 중 결국 선이 승리하기를 바라며, 그 ‘선’이 하필이면 자신들을 위해주는 자들이기를 원한다. 그리고 이런 선악 구도를 가장 확실하게 상징화시킨 이야기 가운데 하나는 바로 기독교 신앙이다. 천사와 악마, 각각의 군단의 대격돌, 그리고 예언되어 있는 천사군의 승리. 이야기의 역사만큼이나 오래 동안 사랑받아온 권선징악이라는 주제의 궁극적인 구현인 셈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의 풍속도는 이런 명쾌한 이야기와는 꽤 거리가 멀다. 선악의 경계선은 어디며, 선은 과연 어떤 경우라도 선인가? 뭐, 꼭 머리를 쥐어뜯으며 엄청나게 철학적으로 접근해야할 필요는 없다. 위트와 풍자, 뼈있는 농담으로 이런 지점들을 꼬집어내는 것이 더 핵심을 짚어낼 가능성이 크니까 말이다. 일본 작가 아사리 요시토의 <루쿠루쿠>(3권 발행중 / 북박스)가 좋은 사례인데, 여기서는 ‘지옥의 공주’로 불리우는 강력한 악마가 귀여운 소녀의 모습을 하고 남자주인공의 집안일을 해주는 역할로 등장한다. 지옥이 너무나 과밀인구가 되어버려서, 악마들이 나서서 인간들이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선도해주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저의를 수상하게 여기는 천사들 역시 인간계로 내려와서 이들과 맞서려고 하는데, 스님의 몸에 빙의되어 인간계로 내려온다든지 하는 등 좌충우돌 투성이다. 악마들이 쓰레기를 줍고 할머니가 길 건너는 것을 도와주는데 천사들이 악마의 ‘계략’을 막으려면? “쓰레기를 버리고 할머니를 넘어트려야지! 에에…자, 잠깐만!” 이런 식으로 말문이 막히는 천사의 모습이 주는 촌철살인의 블랙유머가 일품이다. 학원 코미디물에나 어울린다고 생각할 법한 둥글둥글하고 귀여운 그림체와 연출 속에 담겨져 있기에 그 울림은 더욱 크다.
어이없이 웃다보면, 뜨끔해진다. “우리는 정의를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아! 폭력을 막기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하지!”라는 천사의 대사가 이상하게도 낯익기 때문이다. 전쟁을 입에 물고 다니는 어떤 미국 침팬지를 떠올리든, 아직도 좌파공세 따위가 잘만 통하는 어떤 후진 사회를 떠올리든, 인터넷 게시판에서 뛰노는 악플러들을 떠올리든 말이다. 선과 악을 나누고, 하필이면 자신이 서있는 쪽이 선이라고 굳게 믿는 자들. 사실관계 확인과 토론이나 근거제시에는 인색하면서, 타인비방과 자기미화에는 놀라운 정열을 보여주는 자들. 이 복잡한 세상에서 단 하나 확실한 ‘악’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기 이외의 모든 것들을 악으로 몰아붙이는 행위 그 자체다. 바로 그런 악이 뿌리 뽑히는 권선징악 정도는 꿈꿔 보아도 좋지 않을까.
[경향신문 04.12.03]
(* 주: 원출처는 경향신문 금요 만화 전문 섹션 ‘펀’의 칼럼인 <만화풍속사>입니다. 격주로 박인하 교수와 번갈아가면서 쓰고 있는 일종의 태그팀 같은 것이니 만큼, 같이 놓고 보면 더욱 재밌을 겁니다. 여기 올라오는 것은 신문편집과정을 거치지 않은 ‘원본’입니다… 별 차이 없지만;;)
—- Copyleft 2004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 솔직히 말해서…
(1) 나는 아직도 간첩조작이나 하는 한나라당 꼴통들보다, 그런 놈들을 지지하는 40% 이상의 자칭 자유민주주의 시민들이 더 무섭다.
(2) 그들 중에서도 치매끼 다분한 늙다리 수구 꼴통들보다, 젊고 패기넘치는 찌질이들이 더 무섭다.
(3) 그 중에서도 겉으로 드러내놓고 깽판치는 머저리들보다, 조용히 침묵하며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면서 스스로의 무지와 무관심을 무럭무럭 키워나가는 것들이 제일 무섭다.
!@#… 솔직히 말해서…
(1) 밀양을 ‘강간의 왕국’으로 만들어준 그 쓰레기들도 쓰레기들이지만, 적당히 훈방조치 시키고, 피해자를 오히려 지역이미지 나빠진다고 나무라고, 보도제한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어겨버린 3류 경찰 공무원들이 더 쓰레기다.
(2) 여론재판은 방향성이 잘못 나가기 쉽고 헛소문도 빨리 퍼지는 등 부작용이 많지만, 정식 절차가 졸라게 부실해서 도저히 기댈 구석이 없으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될 수 밖에 없다.
(3) 남자가 죄의식 안가져도 되는 사회 좀 만들어보자, 젠장할(멍청해서 안가지는 것 말고, 정말로 떳떳해서 안가지는 것 말이다). 아니 남자 이전에, 그딴 것들과 같은 ‘종’이라는 것 자체가 죄책감이 든다. 온 영장류의 망신이다, 그 놈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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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정글이다” 라는 말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 같은 용어들이 자연스럽게 삶의 지표로 교육되고 있을 지경이니 말이다. 특히 변화의 속도가 거의 매트릭스급인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그 급물살의 흐름에 같이 뛰어들지 않고 잠시라도 다른 생각을 해본다는 것은 도태라는 험악한 말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만든다.
근래 나온 국산 SF(?) 개그만화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몬스터즈>라는 작품에서, 작가는 이 문제에 대한 꽤 날카로운 통찰을 해학적으로 던져주고 있다. 이 작품은 ‘세계정복 일상물’이라고 불리우는 범주의 작품인데, 세계정복을 꿈꾸는 거대한 악의 조직과 말도 안되게 강한 정의의 히어로들이 사실은 우리들의 아주 평범한 생활세계 속에서 적응하면서 살아가며 몰래 세계의 운명을 좌우할 엄청난 싸움들을 벌이는 내용들을 다루고 있다. 당연히 이런 설정에서는 엄청나게 하드한 스릴러물이나 대놓고 웃기는 개그물 중 하나로 흘러갈 수 밖에 없는데, 운 좋게도 <몬스터즈>는 후자에 속한다(진지한 SF를 표방하기에는 어딘지 헐렁한 그림체, 패러디와 반전이 몸에 베인 연출력은 개그물이 얼마나 탁월한 선택이었는지를 증명해준다).
이 작품에서 세계정복을 노리는 오메가 박사는, 광화문을 점거하고는 시민들에게 생중계로 동화 한편을 들려준다. 한 노인이 원숭이들에게 팔찌를 주고 팔찌의 개수에 따라서 먹을 것을 퍼주었더니 원숭이들이 인간들처럼 아귀다툼을 하며 앞다투어 주인에게 복종하였다는 우화. 인간의 우매함, 사회의 무질서함에 대한 통찰력을 동원한 것이다. 자, 이제 악의 박사는 깨끗하고 통제된 신세계를 주장하며 세계정복을 선언하겠지? 아니다. 이 만화는 뼛속까지 개그만화니까. 오메가 박사의 목적은 원시사회로의 회귀다. 단순하고 행복한 사회로 돌아가는 것이 인류에게 주어진 유일한 갱생의 길이다! 무릎을 탁 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발상의 전환이다. 이렇게까지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건전무쌍한 악의 화신을 본 적이 있던가.
권력의 차별화, 그것에 따른 물질의 불균등한 분배, 다시금 소유물에 따른 권력획득으로 이어지는 나선 구조는 섬뜩하다. 어떻게 그 말도 안되는 폭주를 멈출 수 있을까. 주류 정치경제나 교육에서 여기에 대한 고민을 완전히 멈춰버린 지금 이 시대, 아직도 꿋꿋하게 딴지를 날리는 것은 오히려 가장 일상적이고 사소한 즐김의 영역들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뼈있는 농담이야말로 최고의 힘을 지닌 것이다. 지금 우리들의 기이한 세상사 속에서, 만화라는 절대고수가 그 역할을 맡아서 강호를 평정해줘야 할 타이밍이다.
/김낙호·만화연구가·웹진 ‘두고보자’ 편집위원/
[경향신문 / 2004. 10. 8일자]
(* 주: 원출처는 경향신문 금요 만화 전문 섹션 ‘펀’의 칼럼인 <만화풍속사>입니다. 격주로 박인하 교수와 번갈아가면서 쓰고 있는 일종의 태그팀 같은 것이니 만큼, 같이 놓고 보면 더욱 재밌을 겁니다. 여기 올라오는 것은 신문편집과정을 거치지 않은 ‘원본’입니다… 별 차이 없지만;;)
— Copyleft 2004 by capcold. 이동자유/수정자유/영리불허 —
전쟁의 이유를 유머로 캐묻다: 십자군 이야기
김낙호(만화연구가, 두고보자 편집위원)
“독으로 독을 치유한다” – 사담 후세인 이라크 전 대통령이자, 수많은 전쟁범죄을 자행한 자의 초라한 말로가 뉴스를 타고 있는 지금 생각나는 구절이다. 현역 석유재벌인 부시라는 자가 세계 최강대국의 대통령이라는 위치를 이용해서 마음대로 남의 나라를 침략해서 사람들을 학살해도 용납이 되는 이상한 시대지만, 적어도 자기들끼리의 심오한 이해관계 충돌 덕분에 이 세상에서 독재자가 한명 쯤 줄어들었다.
전쟁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고 반복되는 패턴이 있다. 최근 출간된 <십자군 이야기>(김태권 작, 길찾기 출판사 / 전6권 예정 / 현재 1권 발매중)는, 전쟁의 이유를 직시하고 있는 교양만화다. 이 만화의 시각은 처음 몇 페이지에서 이미 명확해진다: “문명의 충돌? 문명끼리 어떻게 충돌합니까… 문명인들이라면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해주죠.” 서로 다르기 때문에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충돌해야 할 어떤 필요성에 의해서 상대방을 완전히 미개한 것으로 탈바꿈시키는 과정. 그것이 바로 로마시대 이래로 내려온 세계의 역사라는 말이다. 무지의 씨앗을 뿌려놓을 때 사람들은 충돌과 오해의 악순환 속으로 빠져들며, 그 와중에서 어떤 세력들은 살며시 미소지으며 자기 잇속을 챙겨나간다.
<십자군 이야기>의 주된 줄거리는, 중세 서양의 십자군 전쟁의 과정의 소개다. 하지만 이 작품의 초점은 전쟁의 스펙터클이 아닌, 다양한 이해관계에 대한 풍자에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속에는 현재 21세기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동방과 서방, 이슬람의 정치권력 관계의 패턴이 재현되어 있으며, 지금 TV를 틀면 화면에 나올 법한 뻔한 정치인들과 그들의 행태가 그대로 이전에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뭔가 팍팍하고 계몽적인 느낌 – 다시 말하자면, “재미없는” 만화일 것이라는 걱정은 처음부터 접어놓기를 바란다. 작가가 매 순간마다 언어유희와 상황 개그를 일삼으며 독자들에게 말을 건네오는 실력은, 마치 지금까지도 이 분야의 고전으로 남아있는 <고우영 삼국지>과 <먼나라 이웃나라>의 장점을 섞어놓은 듯 하다. 무엇보다도 그 이전에, 아마도 부시의 선조인 듯한 호전적인 나귀와, 서방과의 우호관계와 자주적 실리 사이에서 희극적인 고민을 계속하는 동방의 어떤 황제, 각자의 잇속을 위해서 경주하는 여러 기사들이 벌이는 난리판 그 자체가 이미 일류 코미디인 것이다.
의도적으로 중세 서양화 풍으로 구사된, 단순하면서도 미려한 그림은 이 작품의 또다른 미덕이다. 묘하게 왜곡되어 있는 시대를 묘하게 왜곡되어 있는 그림들의 연속으로서 연출해나가는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시각적 연출 덕분에 설명 부분과 드라마 부분의 경계선이 한층 희미해지면서, 이야기로서의 재미와 유익한 교양정보의 전달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종시에 훌륭하게 충족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본서 작가서문의 마지막은 한 인용구절로 끝나고 있다: “기억은 약한 자들의 마지막 무기다”. 필자의 생각에는 이것이 바로 <십자군 이야기>가 개인이든 대여점이든 도서관이든, 모든 서가에 꼽혀있여야만 하는 충분한 이유다.
[으뜸과 버금 200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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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원출처는 YMCA에서 운영하는 ‘으뜸과 버금’의 월간 소식지입니다. 좋은 만화를 소개받고자 하는 업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 지면의 성격상… 분량도 capcold답지않게 짧고, 주례사 느낌이 강합니다;; 닭살이 돋더라도 참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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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pyleft 2003 by capcold. 이동자유/수정자유/영리불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