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성숙해지기 – 『무슈 장』
김낙호(만화연구가)
원래 남자라는 존재는, 성숙이 좀 늦어서 손해를 보곤 한다. 여자들보다 사춘기가 몇 년씩 늦게 오는 탓에 또래 여자들에게 업신여김 당하기 일쑤인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치더라도, 남성에게 부여된 사회적 역할로 인하여 허세를 부리며 애써 어른인 척까지 하기란 정말 힘들다. 그러다가 서른 즈음이 되면, 도대체 인생의 목표가 뭐였는지, 사랑에 대해서 어떻게 할 것인지 제대로 정리해본 적도 없이 세상 틈바구니에서 수년 정도 끌려 다니다가 이제 그것마저 익숙해져서 다시 스스로의 일상을 돌아보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일상이 사실 별로 대단할 것도 없다는 것이다. 여전히 약간의 소중한 물건들, 속 썩이는 친구, 일 관련으로 맺어졌으나 좀 더 개인적이 되어버린 다소 귀찮은 인간관계, 헤어진 여자 친구와의 우연하고도 어색한 대면, 시끄러운 이웃 같은 귀찮은 일들… 게다가 아직 미혼이라면, 결혼하라는 부모님의 압박도 슬슬 들어온다. 누군가 다른 이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자신에게만큼은 인생 그 자체인 요소들로 가득하다.
『무슈 장』시리즈 (뒤피 & 베베리안 / 세미콜론 / 3권 발매중)는 파리에 사는 서른 살 생일을 맞이한 독신 남자의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그 남자, 소설도 쓰고, 번역일도 좀 하는 그리 잘나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명도 아닌 작가다. 즉 화려한 프로도, 궁상을 떠는 가난한 예술가도 아닌 셈이다. 그다지 쿨한 독신주의자는 아니고 사랑을 갈구하며 스스로를 자학하는 낭만가도 아닌 적당한 수준의 사고방식으로 산다. 다소 구식취향이라서 빌리 할리데이의 음반을 모으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문적인 음악 수집가도 아니다. 구차하거나 비루하지 않으면서도 어딘가 어중간한 인생인 것이다. 그런데 직업 자체가 조직생활이 아니기 때문에 만약 그 어중간함을 극복해볼까 하는 마음 역시 주변의 외압이 아니라 자신의 일상과 의지에서 나와 주어야 한다. 하기야 ‘장’이라는 이름 자체가 한국으로 따지자면 철수 정도에 해당하는 평범무쌍한 이름일 만큼, 평범한 어중간함이야말로 이 작품의 근간이다. 벌어지는 사건들 역시 그냥 평범한 것들로, 성질 고약한 아파트 관리인 아주머니와 싸운다든지, 만성적인 불면증에 걸린다든지, 빈대 기질 다분한 친구가 애를 맡겨놓는다든지, 헤어진 여자친구와 다시 만난다든지 하는 것 말이다. 물론 작가들의 실력은 무척 뛰어난 편이라서 그 평범한 사건 들 속에 담기는 다양한 인생의 아이러니들이 세심하게 배치되고, 덕분에 그 자체만으로도 즐거운 에피소드들이 되어주곤 한다. 장을 보러 갔다가 지갑을 잊어버리고 상품 계산이 잘못되어 음식이 너무 많아져서 친구들을 불러 파티를 연다는 소소하면서도 낙천적인 진행은 정말 작가들 스스로가 자신의 일상을 사랑해본 경험이 없다면 결코 나올 수 없는 경지의 짜임새다.
그런데 단순히 평범하다고 해서 독자들을 휘어잡을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어떤 작품 속 공감의 코드라는 것은 스스로가 놓치고 있던 무언가를 돌아보게 만드는 기능이 있어야만 호소력이 생기니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출판사가 아마도 마케팅 포인트로 잡고 있는 듯 한 (즉 보도자료에서 대단히 강조를 하고 있는) 미국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가 전문직 여성들의 독립적 생활에 대한 동경 속에서 젊은 성인 여성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에 성공한 것과는 달리, 『무슈 장』이 지니는 공감의 코드는 바로 ‘성숙의 속도’다. 작품의 주인공 ‘장’은 특별히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피터팬 같은 존재가 아니라, 주변의 설레발이 없을 때 평범한 남자가 성숙해질 수 있는 보통의 속도로 성숙해져가는 존재일 뿐이다. 너무 서두르지도, 그렇다고 마냥 느긋하지도 않게 말이다. 느리지만 자신의 페이스로 성숙해지고 있는 ‘장’씨의 생활을 보며, 독자들은 사회적 압박과 자신의 성숙 사이의 괴리 사이에서 자신의 내면이 지니는 진짜 성장을 다시 돌아볼 수 있는 셈이다.
열린 선 위주의 둥근 그림체, 부담스럽지 않은 색상, 남용되지 않는 대사는 작품 내용의 매력과 만화적 표현의 우수함 사이에 좋은 조화를 이루게 한다. 부담스러울 정도의 예술적 자의식 가득한 표현으로 가득해서 한국 독자들에게 부담을 주었던 여느 유럽 예술 지향 만화들이나 장르에 대한 거부감을 주기 십상인 딱딱한 유럽식 극화체와 달리, 보편적 호소력을 지니는 편한 그림체를 구사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미 장 자크 쌍페의 작품들에서 검증되었다시피, 도시 공간을 차가운 메트로폴리스가 아니라 도회적이면서도 어딘가 여유로운 매력이 있는 사람 사는 공간으로 묘사하는 접근 역시 이러한 필치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나곤 한다. 형식이 주가 되는 작품이라고 딱 잘라 말하기는 무리겠지만, 형식과 내용의 이러한 조화가 있기에 지금의 매력을 지니는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매력을 잘 살려주기 위해서 국내판의 출판 품질 역시 선도 색상도 뭉개지지 않은 성의가 돋보이는 편이다. 나아가 번역도 다소의 번역체가 눈에 들어오기는 해도, 크게 독서에 방해되지 않게 필요한 정보를 주는 주석들이 돋보이는 성의 있는 결과물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한국에서는 한 번에 책들이 나오기는 했지만, 현재까지 한국에 출판된 분량이 프랑스에서 나온 것은 약 10여년에 걸쳐서 천천히 진행되었다. 한마디로, 독자들 역시 장과 같은 속도로 성숙해간 셈이다. 한꺼번에 봐도 성숙의 속도가 아주 느긋한 정도인데, 오랜 시간에 걸쳐서 진행되었다면 오죽할까. 사랑을 고민하고, 옛 애인과 재결합하기도 하고, 애도 낳고. 그 모든 과정이 천천히, 실시간으로 독자의 성숙 속도와 발맞추어 진행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난데없이 커다란 깨달음이 생기고 극적인 반전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젊은 방황과 지금의 무력함이 대비되는 것도 아니다. 즉 이 작품은 현재 자신으로 이어져오는 어린 시절을 회고하는 식의 성장물이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현재진행형으로 조금씩 성숙해지는 식이다. 커다란 스케일의 세상사들을 밀린 숙제 풀듯이 압축해서 한꺼번에 읽을 수 있는 것이 즐거운 작품들도 물론 많지만, 가끔은 이렇게 딱 같은 속도의 걸음걸이를 걸어주는 작품을 읽는 것이 무척 즐겁다. 저 위 어딘가에 놓여있을 위대한 걸작이 반열이 아닌, 날마다 한 번씩 쳐다보면서 미소를 한번 지어볼 수 있는 수작, 바로 욕실에 걸어놓은 거울 같은 존재로 말이다. 일상 속, 천천히 진행되는 성숙의 과정은 소중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즐겁다.
======================================
(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무슈 장 1 필립 뒤피 외 지음, 황혜영 옮김/세미콜론 |
본문과는 상관없지만, 세미콜론의 그림소설 시리즈중에 좋은게 많더군요.
내년엔 ‘지미코리건:세상에서 가장 똘똘한 아이’도 출판할거라고 하고마링죠 =3=
!@#… 세미콜론에서 책을 내주는 것은 정말 대환영이지만, 당장 제목의 번역센스부터 ‘똘똘한’ 으로 번역하는 레벨이라면 좀 당혹스럽습니다. 원래 지미 코리건의 캐릭터는 애크미노벨티라이브러리 시리즈의 1호부터 문자 그대로 상상력 넘치는 천재소년의 이미지로 나왔던 것이고, 단행본에 묶인 이야기에서도 (어차피 반어적으로 쓰이고 있지만) 요령이 좋다는 의미가 아니라 상상력 풍부하고 머리가 잘 돌아간다는 의미에서의 ‘smartest’ 입니다. 즉 작품 내용상 smartest kid on earth 는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아이”가 되야 합니다. 90년대에 주간동아에 연재되었던 성완경 교수의 글에서 처음 ‘똘똘한’이라는 부적합한 번역을 본 후 그것이 마치 정설처럼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고 참 거시기했는데, 설마 이제 실제 출판도 그런 식으로 된다면… 글쎄요. 하지만 사실 제목 차원보다, 각종 뜬금없는 세세한 설명체 말장난이 가득한 이 책의 본문 내용 자체가 좀 제대로 번역되어 주었으면 하는 제 바람이 충족되지 못할까 걱정입니다.
http://cafe.naver.com/graphicnovel/234
http://blog.naver.com/narcisse78?Redirect=Log&logNo=80030462103
세미콜론 카페 글이나 출판사 관계자분 블로그를 보니 ‘똘똘한’이나 ‘영특한’으로 나올듯하 네요.
‘수많은 표현들이 거의 번역 불가능한 수준의 말장난과 문화적 코드로 뒤범벅된’ 이 작품이 어떤식으로 나올지 기대반 걱정반 상태.
p. S. 방명록은.. 낚인겁니까(퍼덕퍼덕)
!@#… ‘똘똘한’이면 명백한 아웃이지만, ‘영특한’이면 세이프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웨어의 말장난을 제대로 뉘앙스를 살려 번역하고 식자를 앉혀넣지 못했을때 얼마나 썰렁해질 수 있는지는 이전에 현문에서 나온 ‘호롱불'(Little Lit)의 권말부록 보드게임 만화에서 본 적이 있는지라… 과연 어찌될지.
똘똘한과 영특한 2가지 단어로 글을 쓰고있는 두분들…
세상이 무서워요.
안녕하세요, 세미콜론 관계자입니다. –; 어찌 검색을 하다 여기에… 지미 코리건 제목은 아직 잠정적으로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저 블로그 링크하신 분은 보셨을 수도 있겠는데, 실은 똘똘-이 제 별명이라 재미삼아 넣어본 면이 강합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보니 회사 카페에도 그렇게 썼나보네요. 공식적으로 쓰는 글을 별 생각없이 쓰면 안되는데 이거 참… 게다가 회사에선 정작 다르게 불리고 있었습니다만. –; 암튼 좋은 견해 잘 보고 갑니다. 참고하겠습니다. (하지만 똘똘이 그냥 ‘요령좋은’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건지는!!! ^^;;)
아참! 무슈 장에 대한 좋은 글도 감사드립니다~
!@#… 세미님/ 좋은 책 내주시는 것에 제가 더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