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에도, 그럭저럭 살아간다 – 가지 [기획회의 312호]

!@#… 뭔가 다른 작가에게 ‘오이’로 이런 식으로 프로젝트를 맡겨보면 어떨까하는 헛생각이 갑자기… OTL

 

그 후에도, 그럭저럭 살아간다 – [가지]

김낙호(만화연구가)

한 작품의 완성도를 평가하는 흔한 기준 중 하나는, 응집력이다. 어떤 핵심 요소를 중심으로 얼마나 작품을 구성하는 각종 크고 작은 이야기들과 소재들이 탄탄하게 연계되어 있는지, 그렇기에 얼마나 선명하게 주제 또는 감성을 전달해내는지 말이다. 이것이 부족한 작품에 내리는 평가는 바로 산만하다는 것인데, 무언가 열심히 그려내고자 한 것 같기는 한데 워낙 사방팔방으로 튀어서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는지 잘 이해하기 힘들 때 내리는 판단이다. 보통은 특정한 주제, 그 주제를 표현하기 위한 장르 선택이 그런 핵심요소가 되어준다. 그런데 어쩌다보면, 일견 사방팔방으로 튀는 이야기들 속에 아주 엉뚱한 방식으로 응집력을 만들어내어 다 읽고 나서야 다시금 심상이 밀려오게 만드는 특수한 작품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고 절묘한 퍼즐이 주는 해결의 꽉 짜여진 재미가 아니라, 느슨한 모자이크처럼 한 조각씩 붙여 넣다 보면 지극히 낮은 해상도에서도 어떤 풍경이 각자의 마음 속에 떠오르는 그런 느슨한 재미 말이다.

[가지](쿠로다 이오우 / 세미콜론 / 전2권)는 가지라는 소재만 등장하면 어떤 이야기든 상관없다는 컨셉트로 띄엄띄엄 발표된 연작 단편만화들을 묶어낸 책이다. 그렇다고 해서 가지를 재배하기 위한 몇 대에 걸친 농가의 고군분투를 그려낸다든지 하는 식으로 이야기의 핵심 소재로 쓰는 작품은 하나도 없다. 가지의 맛을 통해 사람들이 감동하고 하나가 된다는 식의 장르요리만화 같은 과장도 없다. 그저 여러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여러 장르에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고, 그 안에 가지가 스쳐지나간다는 정도다. 때로는 외계 생물의 침공이 나오는 SF 스릴러, 때로는 추억의 성장물, 아니면 성인들의 고즈넉한 후일담, 스포츠극, 또는 사무라이 시대극도 등장할 정도로 각 단편들은 다양하게 뻗어나간다. 그런데도 신기하게, 썩 구심력이 좋다. 느슨하게 연결될 수도 아닐 수도 있게, 인간사를 낙천적으로 바라보며 말이다.

몇몇 단편은 캐릭터들이 좀 더 명시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한 단편은 한 젊은 학생 커플이 가출하여 가지를 키우는 중년남 농부의 집에 하룻밤 신세를 지며 삶을 주도하는 것과 그저 바라는 바 없이 어디론가 흘러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펼친다. 그리고 다른 단편에서 그 농부와 사연이 있는 듯 한데 불면증 와중에 잠을 청하기 위해 농장을 찾곤 하는 사업가 중년 여성의 이야기가 나온다. 가지는 지나가는 요리다. 또 다른 작품은 고등학교 옥상에서 가지를 키우다가 동경하게 된 여학생을 만난 남학생의 이야기다. 다른 단편에서 그 여학생은 가지 농부가 있는 동네로 전학을 간다. 어떤 단편들은 전체적 연결은 없지만 후속편이 이어지는 식으로, 캐치볼을 즐기며 아르바이트 생활 속에 무언가 목표를 찾고자 혹은 찾을 필요 자체를 유보하는 젊은 남녀의 이야기라든지, 각각의 인간적 사연들을 가지고 있는 프로 자전거 선수단의 이야기 등이 있다. 혹은 가지 모양 외계생명의 습격으로부터 살아남아야 하는 과학기지 직원들, 주군에게 햇가지를 진상해야 하는 일본 중세 사무라이의 허망한 검술활극 같이 단독으로 묶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은근슬쩍 다시금 세계관들을 연결할 때도 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의 연결고리를 찾는 두뇌싸움과는 거리가 멀고, 그냥 은근슬쩍 어차피 다 우리가 사는 세계구나 정도의 감성으로 묶어내는 구심력을 발휘하는 식이다.

[가지]에 실린 단편들을 지배하는 정서는 사람들은 (종종, 가지를 먹으며) 그럭저럭 계속 살아간다는 낙천성 혹은 느슨한 인생찬가다. 엄청난 비극 속에서도 행복을 찾는다는 식의 처절함이 아니라, 확실히 세상과 인생은 흘러가고 가끔 곤란한 일들도 생기지만, 이렇든 저렇든 일상은 계속된다는 식이다. 연애사라면, 여기 작품들 가운데 맺어지는 것보다 맺어지지 않는 관계가 더 많다. 꿈이라면, 생각은 해보지만 고민까지 가지 않고 지금의 생활을 지속하는 경우가 많다. 외계인은 퇴치하지만 구조는 유보되고, 사무라이는 임무를 성공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쓸데없는 희생만 생긴 소소한 일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다음 날은 오고, 그 안에서 느긋하게 일상을 사는 것이 이득이다. 어떨 때는 지난 사연이 사람들 사이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오랜 우정이 되어 있기도 하고, 아련한 기억이 되어 앞으로 성장할 나날들의 여운이 되어주기도 한다.

느슨한 이야기와 낙천적 정서를 지루하지 않게 만들어주는 것은, 경쾌한 필체와 꽉찬 칸 속 구도다. 작품에 따라서 선 굵기나 캐릭터 조형 등 필체를 다양하게 활용하는 편이지만, 어떤 경우에도 경쾌한 붓선으로 흥미로운 구도를 창조한다. 요리를 준비하는 중년남 농부와 잠을 자러 농장을 방문하는 중년여성의 엇갈림을 그려낸 단편은 특히 이런 능력이 도드라지는데, 각각의 별 것 없어보이는 일상적 행동들을 미디엄샷으로 흘러 보내면서도 조금씩의 시선 변화들을 통해서 두 주인공들의 오랜 정서적 친밀감과 그 이상 애정으로 가까워지지 못할 어쩔 수 없는 거리감을 그려낸다. 화려한 효과 없이, 그렇다고 사물 클로즈업 등을 통해 노골적으로 정적 감성을 자극하는 일도 없이, 그냥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이런 장면들이 시큰둥하게 일상적이고 짤막한 대사들과 어우러지며, 격한 감동은 아닌데도 책을 덮은 후에도 계속 시퀀스들이 아른거리게 만든다. 과장하지도 억지로 정제하지 않은, 그저 자유롭고 생생한 감성으로 다가온다.

어떤 의미에서, [가지]는 격정적 청춘이 아니라 그런 것을 살짝 떠나보내고 그 다음을 맞이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가깝다. 심지어 가장 ‘청춘’의 코드에 가까울 듯 했던 가출학생 커플마저, 결국 그 중 한쪽은 청춘의 열정을 넘어 자기 길을 간다. 청춘은 지나고, 생활은 현존한다. 그런 생활에 딱히 찌들어가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아도, 그냥 일상은 일상이다. 언젠가 있었을 법한 청춘 그 다음에도 그럭저럭 다들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살다보면 만나기도 하고, 거리가 멀어지기도 하고, 다시 다른 방식으로 만나기도 하고, 못 만난 채로 수 백년이 흘러 지난 흔적만 유물로 발견되기도 한다. 시대활극마저도 열혈 정의와 배신의 파노라마가 아니라 중년 사무라이들의 일상화된 허무한 대결이다(어떤 의미에서, 어떤 장르를 통해서도 ‘청춘’ 그 자체를 그려내 버리는 마츠모토 타이요와 좋은 대립항을 이룬다).

[가지]는 책을 펼치면 롤러코스터에 올라타기만을 원하는 독자들을 위한 책은 확실히 아니다. 문학소년소녀의 감수성을 한껏 불사르고자 하는 이들에게도 더 적합한 책이 따로 있을 것이다. 하지만 느슨한 인연들과 일상의 즐거움과 고즈넉함을 마치 살짝 싱겁지만 계속 씹으면 쫀득한 가지요리를 먹듯 즐겨보고 싶다면, 두고두고 다시 조금씩 들춰볼 작품이다.

가지 – 상
구로다 이오우 지음, 송치민 옮김/세미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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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현재 발간호) 예고: ‘올라 치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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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창적인 그림, 깊이 있는 스토리 ‘가지’를 주제로 한 걸작 연작 단편집 일본 만화의 세계는 넓고도 깊지만, 소년/ 청년 만화가 아닌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한 작가들의 작품 중 상당수는 아직 국내에 정식 발매 되지 않고 있다. 구로다 이오우 역시 이번에 한국 독자들에게 첫 소개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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