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해 나온 책 가운데 “좋은데 안 알려져서 참 아까운 책”을 소개하는 서평들을 모아 단행본으로 출간하는 ‘아까운 책'(부키) 시리즈, 2012년판에 실린 글.
전투적 인권 운동가의 맥락
– 검은 혁명가 맬컴 엑스 (앤드류 헬퍼, 랜디 듀버크 / 박인균 옮김 / 서해문집)
김낙호(만화연구가)
작품의 내용적 우수함에 비해 많이 팔리지 않은 것으로 느껴지면 아까운 책이다. 혹은 이야기 거리가 많음에도 널리 이야기되지 않았다고 느껴왔으면 아까운 책이다. 그런데 최고봉은 역시, 위의 두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올해의 아까운 책’을 선정하기 위해 자료를 찾아보다가 비로소 그 책이 작년에 나왔다는 사실을 겨우 뒤늦게 알게 되는 경우다.
만화 분야에서 [검은 혁명가 맬컴 엑스]가 바로 그런 책이다. 제목에서 쉽게 짐작할 수 있듯, 미국의 흑인 인권 운동가이자 전투적 방향성으로 인해 같은 시대에 같은 분야에서 활동했던 평화적 운동의 마틴 루터 킹의 그늘에 종종 가려졌던 맬컴 엑스에 관한 이야기다. 책은 맬컴 엑스가 살해당하기 직전의 순간에서 시작하여, 그의 생애를 탄생부터 훑어내는 전기물이다. 인종차별이 아직 극심했던 시절, 수상한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와 미쳐버린 어머니, 예의바르지만 내재화된 차별을 지닌 백인 양부모 가족 밑에서의 성장, 백인여자와 사귀는 잘 나가는 멋쟁이 노릇을 하던 젊은 시절과 불법 행위 가담, 투옥 등의 과정이 시대맥락에 대한 각각의 설명과 함께 주욱 이어진다. 그렇게 감옥에서 이슬람국가단(Nation of Islam. 무슬림 교리를 느슨하게 채용한 흑인우월주의 단체)을 접하고 독학으로 단체의 대변인으로서 종교지도가 겸 시민운동가가 된다. 그리고 일련의 과격한 투쟁 독려와 흑인 정체성 회복에 관한 계몽적 연설로 명성과 악명을 쌓다가, 단체를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암살당한다.
그런데 작품은 주인공 개인에게만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그를 둘러싼 환경을 최대한 드러내는 쪽을 선택한다. 미국 역사 속 흑인 차별의 과정을 노예시절부터 60년대의 상황까지 간결하지만 풍부하게 주욱 훑어내는 초반부터 그렇고, 맬컴의 부모의 사연을 먼저 다루는 방식도 그렇다. 맥락을 풍부하게 전달하는 것에 초점을 두기 때문에, 이 작품은 상황 재연 드라마를 단선적 이야기로서 활용하는 전기물 만화가 일반적인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 인종차별 모순의 와중에 있는 소년 맬컴 리틀(백인들이 부여했다는 성을 스스로 버리기 이전의 이름), 억압받고 그 안에서 개별 출세를 꿈꾸며 탈선하기도 하는 젊은이, 그리고 네이션 오브 이슬람의 전국 대변인 맬컴 엑스로 변신하는 모든 과정에서 그를 주인공으로 전개하기보다는, 다큐멘터리처럼 그를 관찰한다. 그가 당대 사람들에게 보여준 사고방식과 카리스마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단순히 그렇다고 전제하기보다는 시대적 맥락으로 보여주는 방식이다.
이를 위해, 이야기는 거의 내레이션 위주로 전개된다. 말풍선을 통한 극중 대화는 최소한도에서만 구현되며, 대부분은 캐릭터에 대한 이입보다는 관찰자의 시점으로 풀어간다. 저절로 흘러가는 캐릭터 극으로 전개하느라 하나의 상황만을 기정사실화하는 식이 아니라, 상황과 맥락을 나레이션으로 설명하고 그 장면을 바라본다. 이런 바탕 위에, 작가는 맬컴의 진실을 둘러싼 서로 상충하는 내용이나 본인의 모순 등을 있는 그대로 제시해준다. 중심 참고자료로 삼은 맬컴 엑스 자서전과 기타 자료들 사이에 있는 엇갈린 기억들이 어느 하나의 극으로 통일되기보다는 모두 제시된다. 과연 맬컴의 어머니가 그를 낳기 전에 인종차별주의자들과 맞섰는가. 일개인의 경험이기에 기록이 없는 이런 일은 그럴 수도 있고, 나중에 붙어서 신화성을 만들어낸 기억일 수도 있다. 극화한 일반적 전기와 달리, 이런 상충하는 여러 버전이 있음을 그대로 명시한다.
좋은 전기가 그래야 하듯(하지만 너무나 자주, 그렇게 하지 못하듯), 선과 악의 이분법 또한 버렸다. 이 책은 젊은 맬컴 리틀의 마약거래나 기타 탈선의 불명예스러운 현장에 관해 숨기지도 경멸하지도 않으며 건조하게 보여준다. 멋진 젊은이라면 백인 여자를 사귀고 흑인 특유의 곱슬머리 쯤은 펴버려야 하는 당대의 유행과 그것을 앞장서 추구하던 치부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과격한 폭력주의자로서 악으로 묘사하기에는 너무나 그가 그런 선택을 내리기까지의 과정이 절절하며 개연성이 충분하다.
이렇듯, 풍부한 맥락의 미덕은 그의 활동기를 묘사하면서 본격적으로 빛을 발한다. 그가 감옥에서 접한 이슬람국가단이 어떤 부분에서 여타 무슬림종파와 다른 변종으로 분류되는지, 왜 그런 과정에서 맬컴이 그쪽을 인생의 잣대로 선택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나중에 결국에는 다시 결별하여 배신자 취급을 받으며 스스로의 암살을 부르게 되는지 단서들을 제공한다. 그 과정에는 엘라이자 모하메드 의장과의 만남, 그에 대한 신뢰와 불신의 흐름도 자세하게 설명된다. 그가 나중에 앞장서 발표하는 과격한 흑인문화 회복과 전투적 대항 주장 자체만 놓고 보더라도 충분히 복합적 메시지를 담아낸다.
이 책의 매력은 격한 인권운동의 시기에서 어떤 식으로 시대 환경 속에 개인과 사회가 운동으로 움직였는지, 단순화하지 않은 큰 그림을 그려주는 것에 있다. 사실 사회운동의 모습에 관해서는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곳에 관해서도 영웅과 선악으로 단순화시켜서 인식하기 쉬운데, 하물며 다른 나라의 사례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그렇기에 다른 사회의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지금 우리 사회에 배워와야 할 교훈들을 제대로 잡아내기보다는, 그냥 적당하게 피상적인 감동만 받고 끝나기 쉽다. 일정 정도 이상의 형식민주주의가 같춰진 현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인권운동 가운데 하나였던 미국 흑인인권운동에 관해, 마틴 루터 킹의 “내게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 정도나 알고 좀 더 관심 있으면 로자 파크스의 버스운동까지만 아는 경우들이 얼마나 흔한가. 하지만 운동은 그렇게 단선적인 감동으로 움직이지 않고, 체계화된 사회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여러 운동 분파들이 있고, 각자 대변하는 집단과 이해관계가 있고, 분파끼리 그리고 단체와 시민들, 정계가 같이 상호작용하면서 구체적 움직임도 좌절도 생겨난다. 그리고 그 복잡한 과정 속에서, 우연과 필연이 겹치며 한발짝씩 역사는 진보한다.
작품에서 그려내는 그 사회에는, 굵직한 이념을 통해 경도되는 이들의 모습도, 그저 교육 못받은 순진함으로 인생관을 결정하는 이들도 넘친다. 인권운동의 불타오르던 시대적 맥락, 맥카시즘의 마지막 위세, 무슬림 정파와 이슬람국가단 사이의 갈등, 서로 다른 접근법으로 각각의 집단을 대변하던 리더들인 맬컴 엑스, 마틴 루터 킹, 그리고 백인 주류질서의 안정성 안에서의 인권 신장을 추구하던 케네디 등이 협력하고 갈등하는 모습들이 나온다. 단순화시키지 않은 이런 갈등들이야말로 이후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역사적 교훈들을 담아낸다. [검은 혁명가 맬컴 엑스]는 개인의 영웅담이 아니고, 거시적 역사의 흐름으로 개인들을 지워버리지도 않는다. 사실 그것이 바로 우리 현실세상의 모습이기도 하듯 말이다. 감동적 사연 몇줄로 박제된 흑인 인권운동의 현장과 시대적 맥락을, 최대한 풍부하게 보여주는 그런 책이다.
시각적 표현 역시 이런 접근법에 최적화 하고 있다. 유려한 선보다는 흑백의 면을 대비시키며 그려낸 그림체가 마치 흑백으로 된 역사 자료들을 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게다가 그런 흑백대비의 세상이야말로 당시 맬컴 엑스가 바라보았던 전투적 흑백대립의 세계관과도 일맥상통한다. 나아가 스타일리쉬한 감정 표현과 클로즈업 연출을 최대한 배제하고, 마치 뉴스 취재를 하듯 일정한 거리에서 사람들을 관찰한다. 칸 속을 가득 채우는 거리의 풍경들은 당시 사료들을 정밀하게 재현하고 있고, 초반의 플래시백 연출 외에는 현란한 시간이나 시점 이동도 배제한다. 이미 충분히 복합적인 구도와 맥락을 가득 설명해내는 내용이기에, 정서적으로 몰입하여 볼 여지를 적극적으로 통제하는 방식이다.
결국 대부분의 해석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는, 질문 위주의 책이다. 맬컴 엑스의 길은 옳았는가? 만약 어떤 특정한 분기에서 그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자신의 행로는 물론 흑인인권운동 전반이 어떤 식으로 다르게 흘러갔을 것인가. 그저 타국의 가상역사 놀이의 즐거움을 위해서가 아니다. 복합적으로 얽혀있는 구도 속에서 각각의 선택이 어떤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사고실험을 하고 지금 우리 현실을 돌아보기 위해서다. 노동 현장에서도 시민권 일반의 사안에서도 혹은 철거 같은 지역 개발 사안에서도, 각종 불복종의 운동 흐름이 만만치 않게 굵직하게 이어지고 있는 오늘과 내일의 한국사회 말이다. 과연 우리는 사안의 여러 측면들을 직시하고 있는가. 편들기를 하기 위해서는 단순하게 한쪽 이야기만 수긍해도 상관없지만, 해결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가 얽힌 그 구도를 직면해야 한다. 그리고 그 첫걸음은, 우선 여러 가지가 얽혀있고 각각에는 생성 맥락이 있다는 점에 대한 인식 자체를 하는 것에 있다.
[검은 혁명가 맬컴 엑스]는 바로 그런 것을 돕기에 좋은 책이다. 잘 짜여진 차분한 다큐멘터리며, 더 관심 있는 이들에게는 풍부한 참조자료와 더 읽을 거리를 연결시켜주기도 한다. 이왕이면 하나의 무용담보다는 풍부한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이런 책을 한 번씩 펼쳐보면 좋지 않을까.
*같이 읽으면 좋을 책들:
– 만화 체 게바라 평전 (시드 제이콥슨, 어니 콜론 / 이희수 옮김 / 토트)
– 태일이 (박태옥, 최호철 /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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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간은 매우 마이너한 관계로, 여러분이 추천을 뿌리지 않으시면 딱 여러분만 읽게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