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혀 다른 장르로 뻗었지만 비슷한 장점이 있기에, 다소 이례적으로 두 작품을 묶어서 소개.
디테일과 비약의 결합이 재미 있을 때 – [피크], [들어는 보았나! 질풍기획]
김낙호(만화연구가)
최고로 재미있는 허구의 이야기를 구상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재미있는 작품으로 실제로 완성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현실성이다. 회화로 치자면 시각적 충격을 주는 최고의 장면을 떠올렸다고 해도, 어느 정도 이상의 현실성을 담은 색조 구성과 광원효과를 갖추어 완성하지 못한다면 의도적으로 부조리를 의도하는 것이 아닌 한 부족해 보이기 쉽다. 음악이라면 최고의 멜로디라도 깔끔한 편곡의 완성도가 없으면 미완의 대기에 머문다. 서사물의 경우는 이것이 세계관의 내적 일관성과 실세계 요인에 대한 충실한 반영이라는 두 가지로 나타난다. 특히 완전히 새로 구성해낸 판타지 세계가 아니라 현실세계를 무대로 하는 작품일수록 후자가 중요해진다.
그렇기에 스토리에서 제작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의 ‘팩트 체킹’ 단계가 완성도를 위한 관건 가운데 하나인데, 상당한 사전투자와 분업이 가능한 제작방식이라면 아예 별도의 인력이 담당하기도 한다. 일본 만화의 경우 ‘담당기자’가 그런 기능을 보조하곤 하고, 미국 드라마는 팀제 창작을 통하거나 아예 별도 팀을 기용해서 해결하곤 한다. 즉 작가는 재미와 의미가 있는 이야기를 창조하고, 체커가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고 점검하여 말이 되는가를 확인하며 함께 수정하는 식이다. 한국의 경우 이런 체계가 다소 부족한 편이고, 특히 만화에 있어서 그런 편이다(즉 편집부의 담당기자가 다수의 작가들을 대상으로 실질적 공동제작자가 아닌 원고 생산 관리에 특화되는 식이다). 그만큼 빠르고 거침없이 작가의 상상력의 속도만큼 비약이 가능하기도 하지만, 디테일이 어긋나서 완성도에서 한계를 보이는 경우도 허다하다.
팩트 체킹을 편집인력이 소화해주지 못할 경우, 작가의 경험을 살리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물론 작가가 개인적으로 매우 성실하게 취재를 축적하는 다른 방법도 있지만). 딱히 색다른 경험이 없다고 생각해서 결국 고양이 키우는 이야기나 일상 관찰담 밖에 할 것이 없다면 심심한 노릇이지만, 오히려 자신이 지나온 길과 해온 일을 허구의 이야기에 디테일을 부여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에 성공하면 비약과 디테일을 겸비한 멋진 오락물이 탄생할 수도 있다. 전문 분야 활극에서도, 과격한 개그물에서도 말이다.
디테일을 잘 살린 전문 분야 활극의 모범이 될 만한 작품이 바로 [피크 Peak] (홍성수 글, 임강혁 그림 / 영상노트 / 2권 발매중)다. 이 작품은 무용수 출신 주인공 연성이 군 입대를 하여 북한산 산악구조대에 배치받는 것으로 시작해서, 부대 내에서의 인간관계, 사고당한 등산객들을 구조하는 에피소드들을 빼곡하게 펼쳐낸다.
그런데 [피크] 최대의 매력은 산이 살아 숨을 쉰다는 투의 철학적 성찰이나 인간관계의 심오함에 대한 통찰이 아니라, 바로 너무나 그럴듯한 현실감 넘치는 사고발생과 구조과정, 그리고 그것에 강렬한 만화적 박진감을 통한 비약이 자연스레 합쳐진 재미다. 유려한 그림체와 연출력이라면 그림을 맡은 임강혁 작가의 전작 [슈퍼우먼]의 연장선에 놓이지만, 그 작품이 SF세계관의 적절한 디테일의 완성도 있는 제시에 실패하여 뒤로 갈수록 뜬금 없는 전개가 되었던 문제를 깔끔하게 극복했다. 등반 사고가 일어나는 과정과 그에 따른 부상, 부상자를 구조하는 과정에 필요한 내용들이 부족도 과잉도 없이 뚜렷하게 제시되고, 그 안에서 주인공은 박진감 넘치도록 뛰어나게, 하지만 너무 초인적이지 않게 활약하며 독자들을 쥐고 편다.
디테일과 비약의 이런 성공적 결합의 바탕에는 스토리를 쓰는 홍성수 작가의 실제 구조대 복무 경험이 있다. 그렇기에 단순히 전문용어들을 차용하는 수준이 아니라, 산을 타는 등반객들이 어떤 식으로 산을 우습게 보다가 다치는지, 구조 장비와 기법들이 어떤 식으로 구조원들에게 부담을 주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생사기로의 상황들도 있다는 것까지 세부적으로 짚어낸다. 이런 탄탄한 디테일이 있기에 그 위에 표현되는 활극에 위화감 없이 몰입할 수 있는 것이다. 덕분에 이 작품은 탄탄한 고정팬을 모았고, 종이출판 단행본이 아닌 웹툰 연재분 묶음 온라인 유료상품 실험을 미디어다음 포털사이트가 시작할 때 첫 번째 선정작이 되었다.
현실성을 강조하는 작품만 현실적 디테일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님을 잘 보여주는 또 다른 작품이 바로 [들어는 보았나! 질풍기획!] (몰락인생 / 재미주의 / 전 5권)이다. 이 작품은 광고회사의 일상적 업무과정들을 그려내는 만화인데, 열혈 활극 장르만화의 코드를 가득 채운 격렬한 과장법을 통해서 끊기지 않는 밀도 높은 개그를 구현한다. 신입사원 병철이 광고기획팀의 다른 팀원들과 함께 광고주 비위를 맞추고, 프레젠테이션을 해서 수주를 받고, 스토리보드를 만들고 촬영을 하는 평범한 업무가 소재가 되지만, 실상은 그 안에서 문자 그대로 피 튀기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초인적 괴력, 말도 안 되는 흉흉한 광고 상품, 그리고 무엇보다 도저히 제정신으로 만들 법하지 않은 광고내용들이 개그의 주요 내용인데, 이런 개그 코드가 단발성 효과로 끝나지 않고 작품 내내 지속적으로 생명력을 발휘해낸다. 그리고 그것은 역설적으로, 그런 황당한 오버액션이 디테일 풍부한 현실적 상황들 위에 서있기 때문이다. 시안을 만들어 온 것에 대해 당장 수정을 요구하기에 야근에서 벗어날 수 없는 피폐한 회사생활은 판타지가 아니라 현실이다. 작품은 그 위에 좀 더 과장해서 수정요청의 자잘함을 말하고, 새 시안을 전달하는 과정의 격렬함을 극단적으로 과격하게 각색할 따름이다. 광고주 비위를 맞추기 위해 온 팀이 근무시간 외에 노래방 끌려가서 감정노동 강요당하는 장면도 현실의 시궁창이다. 그 안에 팀원들이 서로 나만이라도 조금이라도 일찍 빠져나가겠다고 두뇌싸움을 벌이는 것도 그렇다. 다만 그런 싸움의 내용을 확실하게 희화화하고, 무엇보다 스케일을 엄청나게 키워내는 것이 개그가 될 뿐이다. 이 작품 역시 아니나 다를까, 작가가 광고회사 근무 경력이 있기에 이런 식의 광고회사 근무 현실의 애로사항에 대한 디테일이 살아있다.
[피크], [질풍기획] 두 작품은 각각의 분야에 대한 충분한 디테일을 바탕에 깔아 놓고, 다큐멘터리나 인간드라마로 풀어나가기보다는 그 위에 장르적 활극을 입혀서 재미있는 작품을 완성해낸 긍정적인 사례다. 꼭 작가의 직접경험에 한정될 필요는 당연히 없지만, 장르적 활극의 가상적 모험담이 재미를 얻기 위해서도 결국 현실성의 디테일이 중요함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Peak 피크 1.2 세트 – 전2권 임강혁 그림, 홍성수 글/도서출판 영상노트 |
들어는 보았나! 질풍기획! 세트 – 전5권 몰락인생 지음/재미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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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 은수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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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ngback by Nak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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