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에 ‘그림 이야기’만큼 효과적인게 또 있을까.
벽화로 그려내는 청춘 – [아이고 I GO]
김낙호(만화연구가)
특정 특수 직종을 소재로 삼아 호기심을 끌어들이는 소위 ‘전문직 만화’가 주로 일본에서 발달하면서 만들어진 몇 가지 공식들이 있다. 장인 정신에 대한 끝없는 강조를 바탕에 깔고, 그 위에서 여러 서로 다른 접근법(초능력에 가까운 기술일 수도, 공법일 수도, 해당 업에 대한 자세일 수도 있다)의 소유자들이 서로 대결을 벌인다. 혹은 대결을 벌이지 않더라도, 결국 그것으로 누군가를 감동시켜서 어떤 인간적 교훈을 맺어주는 것으로 에피소드를 끝낸다. 쟁쟁한 대결을 통한 긴장감의 재미, 나름대로 훈훈한 해피엔딩 등 대중오락의 무난한 즐거움을 녹여내는 주류 공식인 셈이다.
하지만 약간 더 과감한 작품들은 한 발 더 나아가, 해당 직종의 이면에 있는 문제들을 끄집어낸다. 전문 직종이 독자에게 주는 낯설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부분들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해당 문제들의 디테일을 논하여 전문성을 보여주되 동시에 문제의 패턴에 담긴 보편성도 충분히 가시화시켜줘야 한다. 그것이 아주 성공적이라면, 아예 그런 이면을 통해 그냥 어느 사회 속에서 어느 세대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일반의 이야기를 담아내게 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재미있는 이야기로 녹여낼 수 있어야하고 말이다.
벽화 그리기로 서로 승부를 보는 미술가 패거리들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 사회 청춘 군상의 모습을 꽤 유려하게 이야기해내는 작품이 있다. [아이고 I GO](김우준 / 세미콜론 / 1권 발간중)는 벽에 그림 그려 넣는 작품이다. 그래피티로 저항의 메시지를 전하는 전위 해적 예술가들의 이국적 판타지가 아니다. 동네 상점가, 골목, 학교 인근의 벽을 캔버스 삼아 그림을 그리며 서로 패거리도 이루고 경쟁도 하지만, 알바를 뛰며 생활비를 보태고 이왕 유명세를 타면 동네 태권도 학원 인테리어 그림 발주를 받아 작업하는 식의 사람들 이야기다.
작품 제목인 ‘I GO’는 주인공이 속한 벽화 팀의 팀명이다. 이 작품에는 벽화 배틀이라는 가상의 (하지만 매우 있음직하게 디테일이 처리된) 길거리문화가 존재하는데, 바로 여러 벽화 패거리들이 동네에 존재하는 벽화를 그릴 만한 벽을 두고 영역 다툼을 벌이는 것이다. 동네 벽화이기에 영원불멸의 명작이 아니라 언제 또 페인트로 덮일지 모르는 생활의 공간 위에 서 그런 대결이 일어난다. 승부의 방법은 일정한 룰에 의거해서 벽화를 그려내는 것이고, 심판은 전문적 식견이 있는 제3자 및 구경꾼들이 한다. 이야기는 뛰어난 실력으로 소문났지만 구역은 작은 팀 아이고가 지내는 동네에, 고등어라는 낯선 새 팀이 도전장을 들이밀면서 시작된다. 아이고 팀과 고등어 팀이 주제에 따른 과제 부여, 여러 벽에 빨리 그리기 등 다양한 조건의 공개 배틀을 벌인다. 기발한 발상과 감각을 중시하는 ‘맛그림’과 구도의 탄탄한 기본기를 강조하는 ‘형태력’ 위주 그림 같은 접근법의 차이에서 오는 대결, 벽에 주어진 공간 맥락이나 주변 물품과의 조화 등을 활용한 기발한 승부수 등이 펼쳐진다.
그런데 처음부터 언급했듯, 이 작품은 승부로 승부하지 않고 그 다음 걸음으로 당연하다는 듯이 나아간다. 승부의 향배 자체나 기술의 향연 너머, 그림으로 정말로 먹고 살 수 있을까 걱정을 하거나 그런 걱정을 애써 외면하는 모습들이 태반이고, 생활비를 위한 알바로 인해 승부가 연기되는 것은 당연한 현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 생계의 문제 앞에서 거창한 실존적에 짖눌리느라 바쁜 것도 아니고, 적당히 이상적인 꿈도 늘어놓다가 진로도 논하다가 청춘에 관한 너무 감상적인 뜬구름은 아닌 정도의 인생 선배의 한마디도 나오는, 야밤의 가벼운 포장마차 술자리 같은 분위기를 이뤄낸다. 대결하는 팀들 간에도 용서할 수 없는 가치관의 차이를 두고 비극적 드라마가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같이 투닥거리다가 마음에 들면 서로 친구하고 연애하고 그렇게 되는 세계다. 비장한 무협의 문파가 아니라, 스포츠와 골목대장의 느슨한 결합에 가깝다. 배틀 오락이면서도 이런 현실감의 균형이 작품 내내 유지되고 있다.
이런 요소는 벽화 배틀이라는 소재를 활용하는 방식에서 특히 뚜렷하다. 팀들은 전문용어를 필살기처럼 휘날리는 전개가 아니라, 동세와 색감, 구도로 대결한다. 이 부분에서 작가의 시각적 표현력이 큰 힘을 발휘하는데, 그림의 접근법 차이나 완성도를 실제 그림으로 적절하게 표현해내기 때문이다. ‘자유’라는 주제로 두 팀이 승부가 붙는 대목에서, 상대 팀이 벽에 그린 독수리들의 날아가는 모습을 한 수 아래로 취급하면서 덧칠 몇 번으로 날개 위치만 살짝 바꿔서 훨씬 역동적인 그림으로 바꿔놓는다든지, 그림체, 시선 처리, 그림 속 소재 요소 등으로 대단한 미술 교육을 받지 않았더라도 웬만한 독자들이 손쉽게 알아차릴 수 있도록 차이를 해설자의 한마디만 더해지면 한 눈에 볼 수 있게 만들어낸다. 그렇기에 대단함을 표현하겠다고 해서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은 과장된 해설 표현과 관객들의 엄청난 반응이 전혀 필요 없다. 멋진 동네 벽화를 보고 잠시 멈춰서서 “오, 멋진데?”를 내뱉고, 그림 그리는 현장에 있다가 뭔가 완성되는 모습이면 박수도 좀 치는 그런 식의 현실감을 유지해도 충분히 재미있는 전개를 전달할 수 있다. 특히 이런 요소들은 원래 연재되었던 웹 공간의 화면 표시보다도, 종이 위에서 더 뚜렷한 질감으로 표현되는 면이 있다(정작 제작은 대부분 디지털 툴로 이뤄졌다는 점이 역설적이다).
배틀 환타지로 쉽게 빠져버리지 않는 현실 감각, 그리고 승부의 방식이 잘 전달되는 시각적 표현력 등으로 담아내는 것은 결국 그림을 통해 자신의 삶을 대하는 자세다. 그림 안에 이야기와 감정을 담아내는 것이 바로 그림쟁이고, 기술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건물 밖이든 안이든 벽에 그림을 그리는 일거리는 적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많다. 좋아하는 일을 계속 할 수 있다는 보장은 당연히 없고, 다들 알고 있는 상태에서 어쨌든 서로들 자극하고 자극받으며 오늘도 영역다툼이라는 이름의 실력 과시 또는 실력 향상 작업을 한다. 그렇기에 일정 정도의 방황은 당연한 것이다. 동시에 “인생은 난타전”이라서, 좀 맞더라도 끝까지 나아가는 쪽이 승자다. 몇 대 덜 맞겠다고 세상과 남을 비난해봤자라고 포장마차에서 넌지시 인생 조언을 듣는다. 희망을 가지면 잘될거라는 식의 ‘힐링’이 아니라, 한계가 당연히 있는데 할 수 있는 것은 해보라고 소주 한잔 따라주는 수위를 유지하는 이야기다.
물론 이런 장점이 반대로, 명쾌하게 과장된 감동의 오락성을 원하는 독자에게는 대결의 판타지를 즐길 찰나에 현실감이 끼어들어 방해하는 약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감상적인 청춘의 고뇌 폭발이 아니라, 청춘에 폭 빠지지 못하는 엄연한 현실과 그 안에서 청춘스러운 길거리문화와 대인관계들을 만들어 나아가는 것 사이 어딘가를 오가는 식의 매력이 필요하다면, 펼쳐들 만하다.
I GO 아이고 김우준 지음/세미콜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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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그러니까 지금 발간호):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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