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연한 불안감에서 진지한 성찰로 – 체르노빌의 봄 [기획회의 341호]

!@#… 공포와 불안이 아닌, 과오에 대한 직면의 힘.

 

막연한 불안감에서 진지한 성찰로 – [체르노빌의 봄]

김낙호(만화연구가)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겠지만, 핵에너지는 지난 수십년간 계속 첨예한 논란의 대상이었다. 효율적인 첨단의 기술이자,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사고가 날 경우 다가오는 엄청난 재앙에 대한 우려가 대비되며, 나아가 핵폭탄과 핵발전의 이미지가 하나로 뒤섞여있는 것도 불안을 가중시킨다. 실제로 핵발전은 그간 기술의 발전과 위험에 대한 높은 인식 때문에 화석연료 발전보다 환경오염 유발 요인들에 대해서 더 엄격하게 관리되는 영역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비행기 사고가 더 큰 비극으로 대중적으로 인식되지만 사실 훨씬 많은 사상자를 내는 것은 자동차 사고인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그러다보니 적절한 수준의 인식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면서도 그만큼 쉽지 않다. 에너지 기술의 현행 수준을 놓고 볼 때 단순한 구호로서의 절대적 반핵이라면 곤란하지만, 더 강한 안전조치 및 효율성을 갖춘 다음 단계 대안에너지 개발에 대한 투자를 부르짖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든지 말이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핵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것이다. 특히 큰 사고가 일어났을 때 더욱 그렇다. 80년대 중반, 체르노빌의 핵발전소에서 대형 사고가 났을 때 직접적 방사능 영향권에 놓이게 되었던 서유럽의 두 나라가 그런 의미에서 선명하게 대처가 대비되었다. 당시 독일은 시시각각 세부적 피해상황 집계와 공공매체를 통한 생중계 속에 각종 안전 조치로 온갖 물류 과정을 정비하고, 반핵 분위기 속에 초중교에서 ‘핵폭발뒤 최후의 아이들’ 같은 책이 독서토론 필독서가 되고, 녹색당이 정치 지형도에서 급부상했다. 반면 국경 하나 건너 있는 프랑스는 당시에 이미 원자력 발전에 전력 의존도를 올리고 있었던 상황 속에, 그렇게까지 심하지 않음을 정부 차원에서 홍보하며 무마하는 방향을 취했다. 그런데 공식 채널이 그렇게 나오는 것에 대한 반대급부로 체르노빌에 대한 모호한 대중적 두려움은 커져나갈 따름이었다.

[체르노빌의 봄](엠마뉘엘 르파즈 /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 / 길찾기)은 그 당시 프랑스 분위기를 기억하는 작가들이 20여년이 지난 시점에 체르노빌 현장을 실제로 찾아가서 그 거대했던 인간의 과오의 결과를 되짚어보려는 이야기다. 원자력 나빠요, 같은 손쉬운 구호를 외치는 정도가 목표라면 현장에 찾아가 그곳의 모습을 그림으로 담아내겠다는 의지는 없어도 된다. 하지만 그 때 체르노빌은 무엇이었고 지금 그곳에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무엇인가 화두를 던져보겠다면, 아직도 그리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치사량의 방사능 오염이 남아있는 그곳에 취재를 떠날 각오가 필요하다. 이 작품은 행동하는 예술가라는 표어로 뭉친 일군의 작가들과 함께 체르노빌을 방문하여 작업을 한 작가의 묵직한 기행문이다. 다양한 재료를 사용한 탁월한 그림 표현으로 작가가 현장에서 얻은 느낌들을 무리한 과장 없이 전달한다.

작가는 체르노빌 참사의 사건 브리핑을 전달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 아니다. 안전을 도외시한 차폐벽 없는 설계 방식의 취약점과 무모한 실험을 강행하다가 사단을 낸 당시 관리책임자의 인재를 드라마화하여 자세히 풀어내느라 지면을 낭비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체르노빌이 프랑스인인 자신에게 사건 당시에 무엇이었는지를 진솔하게 회고하고, 지금 그곳에 찾아가는 준비과정에서의 불안감과 사명감의 대비, 현장을 가는 여정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그들의 삶의 모습, 그리고 결국은 20년이 지난 현장에서 바라보는 쇠락한 인간문명과 어떻게든 새롭게 자리를 잡는 자연의 풍경들을 전한다. 그리고 여정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다시금 사람에 대해, 삶에 대해 생각을 해보게 된다. 독자에게 훈계를 던지기보다는, 그저 자신이 보고 느낀 풍경과 얼굴들을 계속 보여줌을 통해서 말이다.

여정을 준비하는 과정은 두렵고 불안하다. 왜냐하면 애초에 체르노빌에 관해 기억하고 있는 이미지가 두렵고 불안한 무엇인가였기 때문이다. 방호복의 가면 덕분에 얼굴 없는 사람들이 TV화면 속에서 끝없이 회색의 풍광에서 불을 끄고 잿더미를 옮기는 기이한 풍경, 그리고 프랑스에는 큰 위험이 없을 것이라고 화면을 가득채우는 정치인의 얼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고 그 후 방사능으로 어떻게 기형이 넘치게 되었다는 식의 정보들이 바로 그런 기억이다. 그 한복판으로 들어가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손에 통증이 오고 마비될 지경이다. 물론 그런 공포가 거짓이고 실제 현장은 안전한 곳이었다는 식의 반전 스토리는 나올 리 없다. 현장에서 풍광을 스케치해오는 작업은 늘 시간과의 싸움이다. 방사능 측정 장비에서 점점 크고 빠르게 울려퍼지는 틱틱틱하는 신호음은 마치 “피터팬에서 후크 선장을 뒤쫒는 시계 악어”처럼 마음을 옭죄어 온다. 몇 분 이상 현장에 머물지 못하게 하는 현지 가이드, 온 몸에 두른 마스크와 비닐 방호장비는, 기억 속의 모호한 불안이 아닌 현실의 공포다.

그런데도, 그 안에는 단순한 죽음의 폐허가 있는 것이 아님을 그림 작업을 매개로 발견해나가게 된다. 죽음과 삶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있고, 사람도 자연도 대참사 위에 어떻게든 자리를 찾아가고자 한다. 막연한 불안의 공간이 아닌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이기에, 얼굴 없는 방독면의 사람들이 아닌 동네 주민들 하나하나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한다. 방사능의 위험이 있고 그 때문에 아직 전기와 수도망도 부족하지만 그곳에 돌아와 다시 사는 주민들이 있다. 그 안에서 태어나고, 자급자족 농사를 지으며, 폐허 사이에서 쓸만한 물건을 찾아낸다. 자신들이 사는 곳의 위험성을 자각하면서도 한쪽으로는 받아들이며, 보드카 여러 잔으로 프랑스에서 온 손님들을 맞이한다. 사람이 그렇듯, 자연 또한 그렇다. 발전소가 있던 현장에는 다시금 나무와 풀이 자라나며, 거대한 초록의 힘으로 인간의 과오를 서서히 뒷정리해주고 있었다.

그 와중에 작가는 방사능 노출에 대한 불안과 동시에 그런 자연과 인간의 생명력에 대한 경이를 동시에 느껴나간다. 비극에 대한 경각심과 생명에 대한 찬사는 둘이 아니다. 한 쪽으로 다른 쪽을 상쇄하는 것도 아니라, 생명의 강함 때문에 더욱 참사에 대해 경각심을 보내며, 그 큰 비극마저도 어떻게든 넘어서고자 하는 생명이 더욱 빛난다. 자신이 스케치를 하던 숲길이 사실은 버스가 지나던 도로길임을 깨닫는 순간이 그런 흐름의 가장 극적인 순간 중 하나다. 준비과정과 여정 내내 이어지던 회색의 풍경이, 작가의 깨달음 속에서 문득 화려한 자연의 총천연색을 되찾는다. 자연의 생명력, 살아가는 인간의 표정을 담아낼 때마다 말이다. 그것이 바로 작품 속 주인공인 작가가 체르노빌을 바라보는 인식의 변화이기도 하다.

대형 참사를 일으킨 인간의 과오에 대한 반성은, 막연한 공포를 무한히 확대함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나에게,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기억하고 현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참사의 흔적과 그 사이 새롭게 찾아가는 희망을 함께 바라보는 성찰을 통해 이뤄진다. [체르노빌의 봄]은 바로 그런 작업을 해내는 작품이다.

체르노빌의 봄
엠마뉘엘 르파주 지음, 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이미지프레임(길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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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그러니까 지금 발간호): 달콤한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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