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담한 부적응과 따뜻한 인간 관찰 – 아날로그맨 [아까운책 2000-2010]

!@#… “좋은데 안 알려져서 참 아까운 책”을 소개하는 서평들을 모아 단행본으로 출간하는 ‘아까운 책'(부키) 시리즈, 2011년에 출간된 ‘지난 10년 아까운 책'(2000-2010)에 실린 글.

 

담담한 부적응과 따뜻한 인간 관찰
아날로그맨
(김수박 / 새만화책)

김낙호(만화연구가)

아까운 책의 조건이라면, 큰 관심 속에 지속적인 히트를 기록하기 보다는 금새 절판된 것을 흔히 떠올린다. 하지만 그보다 더 아까운 경우라면, 그런 과정 속에서 아예 작품 자체가 완성되지 못하고 중단되었을 때다. 연재공간이 아예 매체 통째로 사라지고 출판사 역시 절판 후 작품의 완성을 보고자 하지 않는다면, 아까움을 넘어 안타까움으로 올라선다. 다만, 작품을 한 번 실제로 읽어본 사람들에게만은 계속 기억 속에 어른거리는 좋은 작품이어야만 한다. 한번 큰 재미를 주는 식의 오락성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네 실제 삶의 어떤 부분을 건드리며, 스스로와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다른 관점을 제공하되 손쉬운 해답은 주지 않는 무엇인가여야 한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다수의 삶의 방식이 되어버린 분주한 도시 속 삶은 어떨까. 모든 것은 엄청난 속도로 ‘발전’을 자처하는 변화의 와중에 있고, 저마다 안간힘을 써서 그 고속 열차의 난간을 부여잡고 있다. 왜냐하면 어제와 오늘의 사회적 경험상,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한 순간이라도 낙오된 이들을 다시 건져 올려주지도, 기다려주지도 않기 때문이다. 극히 일부의 사람들이 초인적인 노력으로 한번 떨어졌다가도 다시 올라서면, “거봐, 개인이 노력하면 되는 것이고, 너희들은 노력이 부족할 뿐이야”라는 잔인한 훈계로 서로를 최면시킬 뿐이다. 미친 속도전을 강요하는 거대한 사회적 힘은, 어떤 음모꾼들이 외부에서 만들어 강요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 개개인이 바로 그런 힘의 일부다. 그런데 이런 공고한 흐름 속에서, 만약 어떤 이가 ‘발전’이 제공하는 편의를 스스로 포기하고, 그것에 좌절하고 슬퍼하기보다는 담담하게 관찰하고 기록해본다면 어떨까. 마치 과학실험이 실험집단과 비교집단을 놓고 비교하며 새로운 지식을 찾아내듯, 다른 선택을 통해서 우리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아날로그맨](김수박 / 새만화책 / 2006 / 1권 발간 / 절판)은 바로 그런 만화다. 작가 자신을 모델로 한 가상의 주인공 헐렝이는 돈벌이가 시원치 않은 만화가다. 그는 자신의 돈 없음을 딱히 부끄러워하지 않지만, 도시생활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여러 편의들을 포기하고 살아야 한다. 돈을 내지 않으면 전기도, 가스도 하나씩 끊어진다. 거주하는 공간인 자취방 역시 결국 없어질 운명이다. 그렇게 해서 그는 건설 일용직, 소위 ‘노가다’ 현장에 나간다. 자취방을 결국 잃은 후, 신축 아파트 현장에 숨어살기도 한다. 그런 와중에 사회를 버리고 숲속에서 살고 있다는 친구 칠칠이의 편지를 받고, 다소의 차비를 모아 기차를 탄다. 하지만 줄거리는 틀거리일 뿐이고, 그 안을 채우는 것은 여러 편의를 버린 헐렝이가 바라보는 도시의 모습, 건설일용직으로 지내며 만나는 여러 사람들의 일화, 그리고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는 사람들의 사연과 꿈들이다.

무일푼과 막노동과 여정이라는 경험 속에서, 헐렝이는 자기 자신과 사람들을 끝없이 관찰한다. 편의를 위해 돈을 벌고, 벌리지 않으면 빚을 지는 삶의 방식을 버렸을 때, 즉 돈이 없음을 스스로 받아들일 때, 도시는 괴상한 곳이다. 같이 달리고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맹목적 질주의 모습들이 확연히 드러난다. 그리고 다들 각자의 구차한 사연 속에 서로를 속박한다. 월세를 독촉하는 주인집 아저씨 역시 형편이 딱히 나을 바 없고, 현명하게 이들을 조율해주는 사람도 “마담 언니”다. 굶어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담담하게 시작하는 건설 일용직에서 만난 사람들은, 위만 바라보고 어디론가 뛰어가는 순간에는 보이지 않지만 언제나 이 사회를 함께 살아왔던 그런 이들이다. 요령 좋은 이, 낯선 땅에 와서 돈을 벌어야 하는 이, 해탈한 듯한 이, 순박한 이들이 자신들의 하루벌이 생활과는 거리가 먼 고급 신형 아파트를 만드는 현장에서 만난다. 각자의 사연은 대단히 선정적인 비극이라기보다는 일상적으로 비루하다. 물질적 성장에 대한 강박으로 가득한 도시 생활와 그것의 정점에 있는 아파트 신축 건설 난무의 현장을, 그 속도와 동떨어져버리게 된 이들이 채워 넣고 있다. 그리고 결국 올라탄 기차에서, 헐렝이는 어디론가 가고 싶어 하는, 무언가 꿈을 꾸는 여행객들을 바라본다. 정지하다시피 속도를 늦추자 비로소 보이는 여백, 그곳에 사실은 언제나 있었던 스스로의 삶을 관조하는 감성을 재발견할 수 있다. 발견의 순간 역시 급격한 감격이 아니라, 사소하고 담담한 방식으로 어느덧 앞에 놓일 따름이다.

이렇듯 [아날로그맨]의 가장 큰 미덕은, 바로 절제된 담담함이다. 도시의 편의에서 밀려나자 반대로 그것을 스스로 버린 자신의 사연, 멈춰서서 바라보면 이상한 사회의 모습, 다른 사람들의 사연 등은 결코 평범하지 않기에, 극적으로 열변을 토하며 꼬집어낼 수도, 드라마틱하게 펼쳐낼 수도 있다. 하지만 헐렝이는 그런 모습들을 담담하게 바라보며 곱씹어보거나, 독자에게 말을 건넨다. 작가의 전작 [사람의 곳으로부터 – 지하철 1호선] 역시 지하철이라는 공간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함으로써 틈새에 숨어든 삶의 감성들을 끄집어내고자 했지만, 과도하게 비튼 그림체와 직설적 메시지 전달 시도 때문에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했던 바 있다. 하지만 작가가 어깨와 손목에서 힘을 빼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집중하기 시작하자 비로소 돌아봄을 말하는 내용을 독자들 역시 쉽게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과장된 그림체를 줄이고, 정적인 칸 내부 묘사와 칸 간 구도를 활용하며, 억지로 많은 것을 보여주려고 하기 보다는 각 사람들의 ‘말’을 들려준다. 기본 스타일을 담담하게 가져가며 현실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작품 속에서 간혹 한번씩 ‘꿈’을 이야기할 때 갑자기 과장된 스타일의 초현실적 장면등이 등장할 때 그 아련함이 더욱 효과적으로 전해진다. 담담한 스타일과 느긋한 전개속도, 극적이기보다 소소한 사연들로 이루어졌기에, 이런 작품이 정서적 울림을 전달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부분인 현실적 디테일 역시 눈에 잘 들어온다. 주인공을 위시한 도시빈민들의 생활이란, 피상적으로 바라볼 때 동정이나 충격 같은 것을 반사적으로 불러일으키는 자극이 된다. 하지만 현실적 세부묘사가 살아나고 그 속에 인간적 감성들이 묻어나올 때, 각자 그것과 비교하여 자신의 삶과 사회를 다시 성찰해보는 시발점이 되어줄 수 있다.

도시부적응자의 시각을 통해 우리를 성찰시키는 [아날로그맨]은, 광복60주년추진기획단 등이 참여하여 온라인 한글사랑 등 민족주의 캠페인을 벌이는 것이 목적인 사이트 ‘누리코리아’에서 연재되었다. 연재 매체의 성격과 쉽게 연결할 수 없는 작품이었을 뿐만 아니라, 매체 자체가 한시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매체가 없어지면서 작품 연재 역시 끊어졌는데, 다행히도 첫 단행본을 묶을 정도의 분량은 축적되어 있었다. 그렇게 출간된 1권은 헐렝이가 기차를 타고 도시를 떠나, 결국 칠칠이가 살고 있다는 집에 도착하는 대목에서 끝난다. 도시적 생활방식을 벗어난 칠칠이는 과연 어떤 식의 삶을 살고 있을 것인가. 도시 안에서 자발적 부적응을 하며 바라보는 시각과, 아예 도시 밖에서 그것을 되돌아보는 시각은 어떻게 다를까. 혹 도시가 만들어낸 삶의 방식이 도시라는 공간을 넘어 어디에나 보편적으로 존재하고 있지는 않을까. 무엇보다, 그런 삶의 조건 속에 또 어떤 다양한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사연을 이 작품 특유의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통해 들려줄 것인가. 만약 당시 다른 온라인 또는 오프라인 연재지면이 이 작품의 매력을 알아보고 나서주었더라면, 독자들은 이미 위의 질문들을 작품을 읽으며 해소하고 있었을 것이다. 혹은 출판사가 좀 더 끈기 있게 작품의 속행을 위해 힘을 발휘해 주었더라도 그렇다. 하지만 지나간 것보다 앞을 바라보고자 한다면, 지금도 이 작품이 준 여운을 기억하며 그 다음 이야기를 궁금해 하는 독자들이 다시 [아날로그맨]을 화제에 올려야 한다. 1권에서 멈춰서고 절판된 아쉬운 작품으로 머물지 않고, 다시 연재지면과 출판사가 생겨서 계속 우리를 돌아보게 만드는 지금 늘 유의미한 작품으로 지속되도록 하려면 말이다. 작품이 나왔던 5년전보다 더욱 빠르고 맹목적으로 움직이는 오늘날이라면, 더욱 느리고 모든 것을 둘러보는 [아날로그맨]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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