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코로스, 어머니와 삶을 찬양하다 [책내서평]

!@#… 대머리와 치매가 만발하는 휴머니즘 개그 일상물(…어라?) 페코로스 연작의 완결편 [페코로스, 어머니가 주신 선물]에 수록된 책내 서평. 뽐뿌를 유도하기 위한 일반공개. 출판사 소개는 여기로 클릭.

 

페코로스, 어머니와 삶을 찬양하다

김낙호(만화연구가)

인생의 다양한 시간대가 서로를 만나는 이야기들이 있다. 시간 속을 여행하는 방법은 실로 다양해서, 친구의 유령을 따라다니는 것일 수도, 존재가 시간축에서 벗어나버린 기묘한 현상일 수도, 그저 탐구의 편의를 위한 회상 순서 정렬일 수도 있다. 그렇듯 이런 이야기는 [크리스마스 캐롤]처럼 엇나간 현재의 나를 고쳐나가는 이야기로 흐르기도 한다. 혹은 [제5도살장]처럼 전쟁의 어리석음을 비판하기 위한 기법이 되기도 한다. 아니면 [재미난 집]처럼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한 집요한 탐구이기도 하다. 그 전에는 몰랐던 것, 당대에 느꼈던 것, 한참 나중에야 알게 된 것들을 병렬하며 결국 인생의 우여곡절에 대한 속 깊은 성찰을 던진다는 것이 이런 접근법이 보통 지니는 공통점이다.

[페코로스, 어머니] 연작은 이런 분류 안에서도 한층 더 특별한 느낌을 만들어내는 작품이다. 액면상 줄거리는 대머리 환갑 만화가가(대머리를 빗대어, 작은 양파라는 의미의 ‘페코로스’라는 별명을 지녔다) 치매에 걸린 노모를 돌보러 와서 겪는 크고 작은 일상이다. 그런데 작가는 단순한 관찰일기에 머무르는 것을 선택하지 않고, 치매라는 질환이 담아내는 정신적 혼란을 일종의 시간여행으로 이용하여 어머니가 살아온 인생과 그를 둘러싼 사람들이 만들어간 세상의 이야기를 펼친다. 이성적 규정의 속박에서 자유롭기에, 오늘날의 자신을 살아가기도, 예전 언젠가의 자신의 기억을 살아가기도, 현실과 상상의 경계가 희미한 어떤 중간 상태에서 새로운 시간을 살아가기도, 그 모든 것을 동시에 하기도 한다. 그 안에서 노모는 보살핌 없이는 지낼 수 없는 중증 치매에 걸린 노인이 아니라, 풍부한 삶을 살아왔고 그 연장선상에서 지금도 낙천적으로 살아가는 미쓰에라는 인간이 된다. 여러 시점의 과거를 다시 현재처럼 살아가고, 떠나간 이들을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만나며 그 때 진전하지 못한 감정을 좀 더 나누어간다. 그 안에는 개인의 삶, 사람들과 나눈 모든 것, 그리고 사회상까지 고루 담겨있다.

이 작품에서 치매가 만들어내는 여러 순간은 단지 예전 어떤 시간대를 회상하는 플래시백이 아니라, 당시의 세상을 다시 한 번 살아보는 경험이다. 여기에서 만화라는 매체양식의 독특한 힘이 십분 발휘되는데, 현재와 과거 여러 시점들이 풍경을 매개로, 단순함과 자유로운 실험을 자유롭게 오가는 칸 연결을 매개로, 카툰화법으로 간략화되어 쉽게 여러 연령대를 오가는 얼굴과 표정을 매개로, 기타 모든 것을 매개로 별다른 단절 없이 자연스레 수시로 전환된다. 그 속에서 어려웠던 생활, 원폭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동네의 풍경, 술 먹으면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과 그 와중에 아이들을 키워나간 생활력의 현장 등이 모자이크를 만들듯 조금씩 큰 그림으로 붙어간다. 다만 너무 멀리 자유로운 세계로 흘러들어 가버리면 인생을 돌아보는 여정이 너무 빨리 끝나고 이별이 오기에, 가끔은 다시 온전한 현실로 돌아오도록 돕는 등대가 필요하다. 둥글게 빛나는 그 등대는 바로 아들의 대머리다. 그 대머리를 쓰다듬으며 다 늙어버린 아들을 귀여워할 때, 여행에서 돌아와 다시 아들과 지금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치매라는 소재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도록 만드는 일등공신은, 경쾌하게 낙천적인 투병 생활을 보내는 귀여운 노인과 그 옆에 함께 있는 아들 노인의 생활을 동글동글하게 묘사해내는 뛰어난 유머감각이다. 연속된 내용의 네 칸 만화로 구사해내는 간결한 리듬감 속에서, 기억이 가물가물하여 같은 일을 되풀이하는 것은 애처롭기보다는 발랄한 일상을 반복하는 유머가 된다. 갈수록 사람을 못 알아보는 것조차, 다시 알아보는 순간을 위한 절묘한 긴장을 만들며 웃음을 준다. 치매에 대한 어설픈 희화화가 아니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어떤 희극적 순간들을 절묘하게 포착하고 사람들이 상황을 낙천성으로 포용하는 모습을 통해 빚어내는 선량한 웃음이다.

그렇듯 미쓰에 할머니가, 그리고 그것을 묘사해나가는 페코로스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선량하고 낙천적이다. 하지만 세상의 험난함을 애써 없는 듯 무시하는 거짓말에 빠지지도 않는다. 이 자세가 대표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바로 아버지에 대한 묘사로, 평소의 성실한 가장의 모습도 술을 먹고 어머니를 괴롭히던 모습도 숨김없이 함께 이야기한다. 그런 못난 모습을 미쓰에에게 제대로 사과하지 못하고 결국 세상을 떠났던 것도 유머러스하되 비극적으로, 담담하되 확실하게 드러낸다. 그런 전제가 있기에, 말년의 미쓰에가 사과를 건네는 남편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고 화해를 이루는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있다. 알고 보면 그 모든 폭력도 사랑으로 덮을 수 있다는 어설픈 봉합이 아니라, 제대로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켜야할 도리임을 치매를 빌어 상상된 희망의 현실을 통해서라도 보여주는 셈이다. 이런 접근법이 여전히 너무 무르다고 여길 독자들도 분명히 있겠지만, 이미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이에 대해서 멀지 않아 떠나게 될 이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착한 방식의 마무리다. 용서를 구한다면 그것을 받아들이고 사랑할 준비가 평생 되어있던 미쓰에는, 치매로 현실과 상상의 경계가 사라진 자신만의 세상에서 그렇게 남편의 손을 꼭 잡아준다.

현실의 험난함을 피하지 않는 것은 가족관계 뿐만이 아니다. 페코로스 가족이 살던 고향이 나가사키라는 점은, 그저 나가사키 사투리로 구수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히로시마와 함께 이차대전 와중에 핵폭탄의 피해를 받은 곳이고, 작가가 기억하는 전후 재건기의 어린 시절은 그 부분을 공란으로 남겨두지 않는다. 심각한 트라우마를 지닌 동네 아이들과 어른들도 당연히 있고, 그들은 그저 동네에서 함께 살아갔다. 동시에 작가는 그런 내용을 어떤 피해의식과 분노로 처리하지 않고, 재해의 흔적 속에서도 어쨌든 일상을 가꾸어 보고자 했던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소회한다.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현재에 대해서도 비슷한 접근을 하기에, 가볍고 귀여운 느낌의 명랑한 일상 너머 노령화 사회와 노인 복지의 현실적 난맥상들이 배치되어 있다. 어쨌든 간병이 일상이 되는 만큼 다른 부분의 일상이 바뀌는 현실이 있고, 관심과 비용이 무한정 가능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 또한 직접적인 신랄한 비판에 매몰되기보다는, 일상의 이야기에 고스란히 펼쳐놓음으로서 조금 더 나은 길을 찾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은근슬쩍 유도해낸다.

낙천적 유머와 피하지 않는 현실감의 균형 속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것은 삶에 대한 긍정이다. 결국 이 작품은 치매 걸린 어머니와 보내는 일상을 통해서, 필연적인 죽음을 앞두고 이별을 준비하는 짧지 않은 과정이다. 실제로 이 작품은 작가가 도쿄에서 편집자 일을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가서, 치매가 진행되는 어머니와의 일상을 지역 정보지에 네 칸 만화로 연재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후의 소규모 단행본 자비 출판, 높은 호응에 힘입은 정식 출판, 일본만화가협회상 우수상 수상, NHK 다큐 제작과 극영화 제작 등 성공가도를 달렸지만, 작품의 근간은 여전히 결국에는 오게 될 마지막에 대한 담담한 받아들임이다. 다만 그 전의 시간이 조금이라도 더 오래 지속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작가는 어머니가 치매를 타고 온갖 여행을 하는 것을 바라본다. 과거의 여러 순간으로 여행하고, 과거가 다른 모습을 통해 현재로 건너오기도 한다. 현실과 상상의 사이에서 남편의 사과를 받았듯, 그 느슨한 여정은 늘 가장 선의로 가득한 방식으로 하나씩 정리된다. 삶이란 항상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지만, 최소한 좋은 것을 기억하고 싶을 때 떠오르는 것이 꽤 있는 셈이다.

가감 없는 여러 시간대의 생활이 겹치며 펼쳐지는 것은 어머니의 인생 그 자체지만, 그 과정을 통해서 함께 돌아보게 되는 것은 작가 자신의 인생이기도 하다. 어릴 적 힘들게 살았던 동네의 자신, 아버지의 폭력을 알면서도 도망 나오듯 상경했던 예전의 자신, 대머리가 되어 어머니를 모시는 지금의 자신. 그리고 완전한 이별이 찾아온 이후에 삶을 추스르는 자신까지도 말이다. 험난한 구석도 적지 않고 아픈 이별도 많지만, 결국 삶을 살아가는 것은 삶을 긍정하는 그 마음만큼씩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어머니의 인생은 그 자체로 닫혀있는 것이 아니라 그 주변에 있던 모든 이들을 함께 엮어내고 있는 것이며, 당연하게도 작가의 인생으로 연결된다. 누구나 결국 언젠가 죽는 것으로 생명 현상은 끝나지만, 인간의 삶이라는 커다란 이야기만큼은 그렇게 다른 소중한 이들의 이야기와 이어지며 존재의 의미를 되새기게 만든다. 그리고 작가 또한 속 깊고 탁월한 방식으로 이 작품을 읽는 모든 독자들, 바로 우리들에게 이야기를 연결시켜주었다.

여러 해를 거치며, 페코로스는 “어머니를 만나러 갔”고 “어머니의 보물 상자”를 열어보고, 결국 떠나보내고 “어머니의 선물”을 받았다. 아니 그 선물은 오래전에 이미 받았던 것인데,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현재와 과거, 현실과 희망을 오가기 위해 치매를 매개로 삼아야 했던 어머니와 달리, 이제 작가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그 매개가 되어준다. 동네 곳곳에 남은 어머니의 기척이 있고, 그것을 언제든지 어머니와 다시 만나고 삶의 긍정이 담긴 희망으로 구현해내는 매개체는 바로 만화다. 만화의 담담한 유머와 분방하고 경계 없는 표현력을 통해서, 돌아가신 어머니의 기척은 아버지의 기척과 함께 돌아와서 다시 함께 나설 봄 나들이를 기약한다. 그렇게 외출한 벚꽃 날리는 자리에서, 어제의 나, 오늘의 나, 예전에 떠나버린 사람들, 아직 있는 소중한 사람들 모두가 당연하다는 듯이 왁자지껄하게 함께 그 선물을 축복한다.

“살아야지. 어떻허든 살아야지.”

페코로스, 어머니 만나러 갑니다 Gift Set (전3권(완결) + 스페셜 가이드북)
오카노 유이치 글.그림, 양윤옥 옮김/라이팅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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