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사는 것을 직면하는 청춘 / 습지생태보고서 [책내서평]

!@#… 이번에 개정판으로 다시 나온 [습지생태보고서](최규석)에 들어간 책내서평. 첫 출간 당시의 기획회의 서평을 바탕으로 일부 업데이트한 글. 본문에도 썼듯, 오히려 지금 더 많은 이들에게 요긴한 책이 되어버린 아이러니.

 

먹고 사는 것을 직면하는 청춘

김낙호(만화연구가)

알바라고 순화되어 표현되는 비정규직 노동은, 좋은 인연으로 이어지기 위한 중간 과정이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한 생계다. 사회 모순에 대한 비판적 의식은, 소비만능 자본주의 속 계급구조에 대한 도덕적인 성찰이 아니라 당면한 현존하는 불편에 대한 해소 욕구다. 옥탑방과 반지하방은, 남루하지만 낭만이 서린 청춘의 공간이 아니라 그냥 열등한 주거환경이다. 일반적으로 인기 있는 대중문화 작품들은 우리 현실의 반영이되 다소 미화하여 판타지를 만들어내지만, 판타지를 붙이지 않은 버전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모두에게 무조건 지옥 같은 것은 아니다. 깔끔하게 정돈된 양지의 세상도 완전히 모든 것이 허무하고 망해가는 다분히 위악적인 음지의 시궁창도 아닌 어딘지 좀 습한 곳에서, 여하튼 사람들이 비루한 현실에도 적응하며 살아간다. 그 쓰디 쓴 모습에 자조적 유머를 가미하고, 무엇보다 우리 자신들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살짝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관찰기의 모습을 취한다면 어떨까. 일종의 ‘습지’에서 나름대로 사람들이 맞물리며 살아나가는 하나의 ‘생태’가 이뤄지고 그것을 관찰하여 ‘보고’하는 식의 작품이 될 것이다.

[습지생태보고서]는 2004년부터 1년여 동안 경향신문의 만화 전문 주간 섹션 ‘펀’에서 연재되었던 작품으로, 반짝거리는 겉포장 따위로 넘치는 드라마들이나 일상성을 표방하면서도 작위적 낭만으로 일관했던 작품들과는 전혀 다른 접근법 덕분에 디씨인사이드의 갤러리들을 통해서 더욱 큰 인기를 얻었다. 그저 허름한 자취방에서 함께 생활하는 네 명의 그다지 풍요롭지 못한 대학생들, 그리고 한 마리의 의인화된 사슴이 주인공들이다. 이들이 펼치는 이야기는 소재로만 보자면 이런 연령대 주인공들을 다루는 청춘드라마에서 흔히 생각할 만한 연애와 우정 관계, 장래희망과 꿈에 대한 고뇌 같은 것들이 분명히 들어있는데, 내막이 조금(많이) 다르다. 연애는 막연하게 동경할만한 문화지만, 돈이 있어야 할 수 있고 없으면 뒷전으로 밀려나는 정도의 것이다. 우정 관계는 티격태격 드라마틱한 애증이 쌓이는 것이라기보다, 같이 학교 과제 수행하고 한 방에서 부대끼며 살면서 그냥 서로 함께 익숙해진 결과다. 장래희망과 꿈에 대한 고뇌는 당장 다음 학기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을까 결정해줄 장학금 수령 여부에 달려있다. 청춘군상의 생활을 유머러스하게 그려내는 만화에서 먹고 사는 것을 제거하는 행위를 거부했더니, 생활의 때가 가득 묻은 이야기가 된다.

먹고 사는 것을 직면하고 있기에, [습지생태보고서]에서 그려내는 자취생활의 모습들은 단순한 취향문화의 장식이 아니다. 돈이 좀 들어오면 우쭐해지고, 없으면 비굴해진다. 누군가 버리고 간 가구를 주워서 사람처럼 정을 준다. 가책을 느낄만한 중대한 것만 아니면, 살짝 양심을 접어놓는 것이 더 편할 때가 종종 있다. 당장 방세 내고 학비 내면 적당히 쪼들리는 생활비로는 여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기 때문에, 우아하고 고상한 문화생활이나 취미는 좀처럼 가꿀 수 없다. 소소하게 놀고, 소소하게 생각하며, 그 안에서도 외부 세상이 당연하다는 듯 강조하고 기대하는 모습들에 솔깃하기도 한다. 그런 현실감을 오히려 유머의 소재로 삼기에 이 작품은 더욱 빛날 수 있다.

4페이지로 이뤄진 각 짤막한 생활 에피소드에서 비루한 현실과 유머감각을 연결시키는 코드는 다채롭다. 주인공들의 별 볼 일 없는 상상력 속에서 이뤄지는 물건 의인화 개그가 있다. 남루한 생활 속에서도 엉뚱한 방식으로 허세를 부리는 모습에서 오는 자조적 반전 개그도 있다.

그런데 작품의 가장 중요한 뼈대를 이루는 것은 바로 그럴듯하게 반듯한 도덕적 위세와 솔직한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야기다. 특정한 상황에 부딪혔을 때 가장 덜 괴짜인 주인공이자 작가의 페르소나인 ‘최군’의 적잖게 관념적이며 복잡한 머리 속과,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모를 직선적인 괴짜 룸메이트들 사이의 마찰로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더 자주 일어나는 것은, 작가의 또 다른 페르소나인 의인화된 사슴 ‘녹용이’ 와의 마찰이다. 늘 관념적 도덕성으로 스스로를 제한하며 사는 최군과 달리, 녹용은 차가운 현실의 비열함 그 자체다. 곤란한 상황에 부딪혔을 때 최군과 동료들이 나름대로 낭만과 감성, 도덕적 응보를 생각하며 현실의 무게를 좀 덜어내고자 할 때, 녹용은 그냥 냉엄한 현실을 직설적 독설로 직면시켜 버린다. 희망의 지푸라기보다는 그냥 지금 얻을 수 있는 쾌락에 집중하기에, 자기 뿔을 잘라 녹용으로 팔아먹는 수준이다. 비굴함도 미안함도 없이 빈대살이를 하고, 사사로운 생활 속 욕망을 미래를 위해 유보하지 말고 그냥 질러버리는 것이 훨씬 현실적이라고 늘 설득하고 다닌다.

이런 역할을 해내는 녹용은 한국 만화사에 길이 남겨야할만한 기념비적인 캐릭터로, 귀엽고 둥글둥글한 눈과 ‘썩은 미소’의 절묘한 조화가 일품이다. [습지생태보고서] 이후로 작가는 더욱 완숙하게 직접적 혹은 우화를 통한 현실 고발 작품들을 장편과 단편에 고루 발표해왔지만, 이 작품의 녹용만큼 노골적으로 매력적인 성격과 역할을 지닌 캐릭터는 아직 등장하지 않고 있다. 눌러 사는 민폐형 빈대 캐릭터가 보통 주눅 든 눈칫밥, 정 많은 구박덩어리 역할로 쓰여온 것과 정반대로, 녹용은 가장 당당하게 모든 주인공들의 마음 속 어딘가에 있을 저열한 욕망을 그냥 꺼내 펼쳐버리는 주도적 빈대다. 그는 파우스트를 유혹하는 메피스토펠레스 같은 거창한 존재가 아니라, 비루한 현실은 그냥 비루한 현실로 인정하라는 자학적이지만 당당한 이죽거림을 보낸다. 그런데 그게… 너무나 재미있다. 욕설 따위로 시원하게 내지르는 식의 어설픈 “통쾌함”이 아니라, 둘러말하고 피해왔지만 우리들이 깊숙이 빠져있는 눅눅한 현실을 갑자기 확 드러내버리는 공감대의 쾌감이다.

다행히도 이런 이야기를 표현해 낼 시각적 표현력 역시 상당하다. 귀엽고 둥글둥글한 캐릭터나 화사한 색채와 거리가 먼, 극화체와 강한 카툰화 사이에 자리 잡은 정도의 캐릭터와 탁한 색조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자취방 안에 있는 여러 물건들이나 그 좁고 눅눅한 느낌을 묘사함에 있어서 결코 허투루 지나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모든 현실적 분위기에서 시각적으로는 혼자 동떨어져 있지만, 정작 캐릭터로서의 역할은 가장 현실의 비정함을 강력하게 압축시켜 놓은 녹용이 있다.

먹고 사는 것을 버리지 않고, 관념과 현실 사이의 갈등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만큼, 그 안에서 그래도 생겨나는 희망은 그만큼 더욱 값지다. 풍족할 것 없이 적당히 친구들이 좁게 모여 사는 그런저런 자취 생활이지만, 그래도 살아가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허세의 추구와 남은 생활비를 계산하는 것을 공존시키는 것도 큰 괴로움 없이 일상화되어 있다. 현실의 쓴 맛은 익히 알고 있지만, 그래도 실없는 낭만적 공상을 잠시 즐겨보기는 한다. 어쨌든 그것이 주어진 현실이고, 세상이다.

희망은 오늘의 고난을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낙담하지 않고 오늘을 살아남는 것이다. 청춘은 아픈 낭만이 아니라 찌질한 세상을 직면해 나아가는 과정이다. 편차는 있겠지만 많은 이들이 흔히 겪고 있는 경험이지만, 손쉽게 드러내고 살기에는 약간 구차하게 느껴지는 그런 현실이다. 그렇기에 이런 것을 모든 이들에게 끄집어내어 직면시키는 작품이 존재할 때, 그리고 하필이면 그 작품이 재미있을 때, 그런 현실은 약간 더 수월하게 살아갈 만한 것이 된다. 작품이 발표되던 2004년, 세상이 경제성장 호황을 이야기하는데 정작 청년 현실의 체감은 더 각박해져가던 당시에도 그랬다. 그리고 새 판본이 나오는 지금 2012년, 양극화라는 개념이 너무 흔해져서 따로 언급하기가 민망해지고 전력질주 무한 경쟁이 치킨런이 아닌 러시안룰렛이 되어버리고 있는 현실에서는 더욱 필요한 직면이자 위안이 되어 준다.

습지생태보고서
최규석 글 그림/거북이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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