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만화의 한 가지 완성형태 – 『크레용신짱』[기획회의 257호]

!@#… 그냥 “서울문화사 아이큐점프에 연재된 배금택의 Y세대 제갈공두”라고 명시하려다가, 본문의 초점이 흐려질 것 같아 익명처리…를 했는데 결국 이렇게 이야기해버렸다!

 

가족만화의 한 가지 완성형태 – 『크레용신짱』

김낙호(만화연구가)

흔히 가족물이라고 하면, 대체로 어린이 눈높이에 맞춘 작품인데 어른도 그럭저럭 즐길만한 것을 칭하곤 한다. 그렇지 않고 애초부터 어른을 겨냥하는 소수의 경우라면 지나간 과거에 대한 향수, 즉 어른 속에 있는 옛날 한 때의 어린이를 노리는 식이 많다. 물론 후자의 경우는 현재의 어린이들은 그다지 재미있어하지 않는 것도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여하튼 가족물이라고 해도 어느 한쪽은 재미를 희생당하는 것이 숙명이다(아니면 전혀 다른 요소에 집중하거나).

그런데 명백하게 현대 성인물인데 어린이들도 진심으로 즐기고, 그것도 서로 완전히 다른 요소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사건과 소동을 보면서 박장대소도 감동도 할 수 있는 극소수의 작품이 있다. 그런 작품들은 평론가들이 따로 의미부여를 해줄 필요도 없이 순식간에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아, 하나의 작품을 넘어 일종의 일상 풍경이 되어버린다.

『크레용신짱』(우스이 요시토 / 학산문화사 / 48권 발매중)은 90년대 중반 즈음 한국에 처음에는 『짱구는 못말려』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바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이 일본에서 대형 히트로 자리매김한 뒤 국내 유명 중견작가가 국내 주류 소년만화잡지에 노골적인 표절작을 연재했는데, 그 후 그 출판사에서 바로 정식 라이센스로 출간한 바 있다. 그리고 마치 ‘도라에몽’을 ‘동짜몽’으로 성공적으로 번안했듯, 한국 가족이라는 바뀐 맥락과 짱구라는 이름으로 한국에서도 크게 성공했다. 하지만 불미스러운 일로 인하여 라이센스 출간이 중단되었다가, 다른 출판사에서 라이센스를 새로 획득하여 이번에는 번안하지 않은 버전으로 다시 나온 것이 바로 『크레용신짱』이다. 주인공 이름 ‘짱구’로 대표되는 잘 된 번안이 주는 친근함이 사라진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인데다가 TV 애니메이션 시리즈가 여전히 번안 이름을 활용하고 있기에 브랜드 연동성 측면에서도 아쉬운 일이지만, 큰 문제 없이 독자들도 적응한 듯 하다.

작품 줄거리는 이미 널리 알려졌듯, 신노스케(짱구)라는 꼬마와 그 가족이 벌이는 일상의 이야기가 주종을 이루며, 가끔씩 환상 모험활극이 특별편으로 추가되어 있다. 작품의 핵심 매력은 신노스케라는 개구쟁이의 엉뚱함인데, 자각 없는 성적 호기심, 끝없는 낙천성, 어린이의 범주마저 쉽게 뛰어넘을 듯한 단순한 사고방식, 크고 작은 소동을 불러일으키는 활기찬 성격 등이 화려하게 펼쳐진다. 행동의 모습과 순진한 실상 사이에서 나오는 성적 개그, 꼬마들의 세계와 어른들의 세계의 병렬이 주는 웃음, 풍부한 슬랩스틱 등은 그 자체만으로도 완성도 높은 개그만화를 이룬다. ‘엉덩이 외계인춤’이나 ‘코끼리’ 같은 습관적인 돌발행위가 주는 코미디 효과만 해도 실로 탁월하다.

하지만 이 작품이 한 꼬마의 좌충우돌 소동에 그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은 신노스케가 속한 가족, 그 가족이 속한 동네가 지니는 소시민적 현실감이다. 물론 다큐멘터리식 리얼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소시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소소하지만 소중한 디테일을 다루는 방식 말이다. 꾸물대다가 유치원 버스를 놓쳐서 고생하며 애를 자전거로 데려다주는 것, 슈퍼에서 할인품 경쟁에 뛰어드는 것, 회사에서 시달리다가 구린 양말냄새를 풍기며 집에 돌아와 저녁식사를 하며 맥주를 따는 것, 회전초밥집 정도로도 외식을 표방하며 가족에게 생색내는 것, 얼굴이 험악하게 생겨서 유치원 원장으로서 소소한 자괴감에 시달리는 것 같은 접근이 살아있다. 현대 일본의(물론 현대 한국의 모습과도 상당히 유사하다) 소시민 가족 문화, 동네 단위의 이웃 문화가 구석구석 베어 있다. 일종의 현대 표준 가족을 상정하고 그 속에 말썽 많은 주인공을 배치해서 일상성과 파격의 재미를 같이 추구하다가 보편적 인기를 얻게 된 것은 미국의 ‘심슨 가족’에 비견할 만 하다. 어떤 황당한 상황을 거치더라도 결국 변하지 않는 하나의 가치가 주인공 가족의 인간적 결속력이라는 점도 동일하다.

사실 『크레용신짱』은 본래 성인용이었다. 일본 현지에서도 한국에서도 성인용 잡지를 통해서 데뷔했고, 초반에 선보인 개그 코드 역시 어린이의 행동을 통해 난감한 성적 상황을 만드는 방식이 자주 사용되었다. 하지만 연재가 계속될수록 등장인물 가족들의 캐릭터간 팀워크가 공고해졌고, 신노스케가 단순히 사고를 일으키는 극중 장치가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로서 자리를 잡아갈수록 온 가족이 재미있어 할 만한 요소들이 늘어났다. 그리고 엉망진창 사건들을 통해서 소소한 일상의 순간들이 쌓일수록, 가상의 이웃들에게 각자 이입할 구석도 점점 더 늘어났다. 애들은 그 이웃의 아이들의 세계로, 어른은 어른의 모습들에 말이다. 덕분에 이야기 중심이 아니라 캐릭터 중심인 일본 주류 만화의 흔한 성향과도 조금 달라서, 일정 분량의 내용이 지나고 나면 캐릭터 중심이라기보다는 이웃 동네 자체가 중심이 된다. 시작은 성인유머였으나 삽시간에 가족만화로서 하나의 완성 형태에 도달한 셈이다(여기에는 물론 높은 시청률로 십수년째 지속중인 TV애니메이션 시리즈의 역할도 컸다). 시리즈가 초장기화되면서 종종 동어반복과 관성에 빠지기도 하지만, 담겨있는 에피소드의 분량을 놓고 보자면 전반적 품질이 매우 고른 편이기에 그런 것이 가능했던 측면도 있다.

『크레용신짱』의 매력을 이야기할 때, 그림을 빼놓을 수 없다. 엉성하고 열린 느낌, 소위 ‘미형’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그림체지만, 오히려 어린이 장난 같은 떠들썩함이 있는 전반적 이야기 분위기와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간다. 그리고 평면적인 느낌의 시각화가 만들어내는 순간순간의 빠른 비약은 개그효과에 효과적이다. 스페셜로 등장하는 화려한 활극에서는 확실히 심각한 표현의 한계가 있지만, 일상의 소동을 짧은 페이지로 담아내는 일반 에피소드에서는 빛을 발한다. 그리고 주요 캐릭터들의 디자인 측면은 전혀 헐렁하지 않다. 특히 주인공 신노스케의 모습은 만화사에 길이 남겨야할 정도로 탁월한데, 고구마 얼굴, 송충이 눈썹, 호기심과 생각 없음을 동시에 담아내는 커다란 눈 등이 이루는 성격 표현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본 지면을 통해서 이미 인기작으로 자리잡은지 꽤 지난 작품을 후속권 발매를 빌미삼아 다시금 다루는 것은, 완결이든 무엇이든 내용상 큰 분기점이 나타났을 때 뿐이다. 아쉽게도 『크레용신짱』 역시 최근 큰 분기점에 도달했는데, 우스이 요시토 작가가 등산 중 실족사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로써 일본에서만 십수년간 5000만부를 판매한 인기시리즈가 50권을 채 못 채운 상태에서, 완결을 보지 못하고 끝났다. 그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서, 이 작품을 하나의 일상으로 만들어준 그 따뜻한 왁자지껄함을 1권 처음부터 다시 펼치며 즐겨볼 것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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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크레용 신짱 48
요시토 우수이 지음/학산문화사(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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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thoughts on “가족만화의 한 가지 완성형태 – 『크레용신짱』[기획회의 257호]

Comments


  1. 2ch 에서 누가 그러더라구요. 짱구 연재초기에는 그냥 소시민 가족 이야기였는데, 장기 침체를 겪고 보니 이제는 짱구네가 중산층 가정이더라.

  2. “국내 유명 중견작가가 국내 주류 소년만화잡지에 노골적인 표절작”을 리얼타임으로 본 어린 마음에 참 착잡한 심정이었죠;; 말씀하신대로 그림체와 캐릭터 디자인은 천재적.

  3. !@#… 다시다님/ 게다가 그 가족은 정리해고도 안당하고 이직 소용돌이에 휘말리지도 않고… 뭐랄까, 유능한 가장, 생활력 넘치는 주부, 건강하기 그지없는 2세들. 막강한 가정파워군요!

    시바우치님/ 그 괴작은, 결국 끝내면서 엔딩도 괴이했죠. 아저씨의 방송중 정면노출사고 에피소드를 베껴와서는, 그래서 가족이 야반도주했다는 마무리를(…)

  4. 작가의 전작들은 그저 짧은 성인개그에 일본식 우스개소리들이 주종이었죠. 그림도 단순하고 …..
    그런 상태에서 새로운 시도로 어린 아이가 포함된 개그… 약간 시니컬하기도하고 어른들도 좋아하지만 아이들도 볼수 있을정도의 개그로 새로이 나온것이 크레옹신짱. …흠.
    천진난만한 … 해보이는 주인공이 도리어 사회나 어른들에게 일침을 놓는 내용이 …둘리와 비슷해보이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