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 [전자신문 091113]

!@#… 다소의 우여곡절을 거쳐서 결국 지난 주에 나간 전자신문의 ‘만화로 보는 세상’ 연재칼럼. 전자신문 게재버전은 여기로(클릭).

 

기억할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 -『남기한 엘리트 만들기』

김낙호(만화연구가)

어떻게 보면 철학적이고 어떻게 보면 실없는 질문 하나를 해보자. 과거는 어떻게 역사가 되는 것일까. “역사적 평가가 가능하려면 시간이 지난 후 차분히 뒤돌아봐야한다”는 핑계 하에 중고교 교육과정에서 조선조만 잔뜩 공부시키고 현대사는 대충 넘어가는 논리로 보자면, 좀 옛날이어야 할 것 같은 느낌도 든다. 하지만 그렇다면 언제부터 역사로 간주해도 된다는 것인가. 50년 전, 아니 100년 전이라고 어딘가에 학문적 기준이 잡혀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없는 것으로 보아, 그 논리는 금새 막다른 골목이다. 그렇다면 역사로서 다루는 어떤 사건의 강렬함, 즉 ‘역사적 사건’이라고 칭할 때의 그것이 기준이 되어야 할까. 소소한 요소들을 다루는 각종 미시사 연구가 한쪽에서 각광받는 것으로 보건데, 별로 그런 것 같지 않다.

그렇다면 오히려 초점을 반대쪽에 맞추는 것이 어떨까. 사건 자체의 특성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가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기억하는가”를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현재의 우리들에게 사회적 기억으로 남을 가치가 있기에 역사가 되는 것이다. 이런 인식 하에서는, 모든 과거의 사건들 가운데 현재에 대한 의미를 부여받아 기억 한 켠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바로 역사다. 십수년 밖에 지나지 않은 90년대라든지 별 것 없는 우리들의 경험인 일상적 생활상이라고 해도 만약 어떤 사회상을 보여주며 현재의 우리들에게 대화를 건낼 수 있기에 기억할 가치가 있다면, 역사다.

『남기한 엘리트 만들기』는 포털사이트 네이버에 연재중인 웹만화다. 내용은 2008년의 공무원시험 준비생인 주인공 남기한이 어느날 갑자기 타임슬립이 일어나서 92년 초반 초등학생의 몸으로 돌아가 겪는 좌충우돌 코메디다. 사실 ‘어른의 생각을 하는 어린이’ 라는 전형적인 소재에서 나올 수 있는 흔한 이야기로 치부할 수도 있는데, 흥미로운 부분은 이 작품이 90년대를 바라보는 다분히 향수 어린 시선이다. 서태지가 아이들과 함께 아이돌 데뷔를 하기 직전의 시대, 오락실용 대전액션게임 ‘스트리트파이터2’가 오락실 문화를 근간부터 바꿔 놓았으며, ‘여명의 눈동자’나 ‘모래시계’ 같은 선 굵은 현대사 드라마들이 퇴근시계로 작용하던 모습들을 구석구석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별로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고 현재와 크게 다를 바 없었던 듯 한 가까운 과거임에도, 어느덧 향수의 느낌으로 당시를 회고하는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의식적으로 역사를 서술하겠다는 포부를 풍기는 성격의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당대의 전형적인 모습들을 그 시대를 주인공과 동세대로 성장해온 작가의 기억과 시선으로 그려내다 보니, 살짝 더 큰 모습들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절반은 작품 속에 살짝 지나가고, 나머지 절반은 그 시대를 경험한 이들의 기억 속에 스스로 되살아난다. 90년대 초반이라는 시절은 국내의 군사독재도 세계의 동서냉전도 끝나서 사회 전반의 비장함이 사라지고 있으나, 온 사회가 브레이크 없는 먹고사니즘을 스스로 완전히 자각하기 전의 시대였다. ‘세계화’는 전지구적 실시간 분업과 무한경쟁의 일상이라기보다는 segyehwa라는 어설픈 캠페인 구호에 불과했다. 경제 호황과 소비 장려 분위기 속에 주변인의 어설픈 신규 사업에 혹해서 사기당하고 가산을 탕진하는 모습들이 심심찮게 보였다.

만약 그 당시 작게는 우리 자신이, 크게는 한국사회가 조금씩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지금은 어떤 모습이 되어있을까. 당시의 어떤 모습들이 결국 현재의 우리로 이어진 것일까. 작품을 읽는 독자가 서태지와 아이들이 빅뱅으로 이어진 아이돌 가수 흐름을 한번 다시 상기하면서, 혹은 그런 천진난만한 사회분위기가 훗날 IMF 구제금융 사태를 거치며 어떻게 현재의 괴상한 모습에 이르게 되었는지 슬쩍 떠올려보면서 90년대에 대한 단편적 시대 묘사는 ‘역사’가 된다.

동세대의 공감대에 호소하는 향수로서의 재미는 온전히 작품 자체에 담겨 있다.
하지만 그것을 현재 우리들의 모습에 대한 좀 더 많은 화두로 연결하여 더욱 큰 즐거움 혹은 성찰을 얻어내는 것은, 독자들의 몫이다. 작품을 능동적으로 즐김으로써, 기억할 가치를 부여해서 역사로 읽어내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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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전자신문의 ‘만화로 보는 세상’ 연재칼럼. 필자들이 돌아가면서 ‘만화의 사회참여’, ‘만화 속 역사’, ‘만화와 여성’, ‘웹툰트렌드’ 등의 소재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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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thoughts on “기억할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 [전자신문 09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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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Pingback by Nakho Kim

    [캡콜닷넷업뎃] 기억할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 [전자신문 091113] http://capcold.net/blog/5002 | 지면에 맞춰 만화와 테크문화로 연재하고 싶은데, 주어진 조건은 역사를 논하라는 것이라 결국 이런 글이 되버리곤 한다.

Comments


  1. 90년대에서 가장 생각하는 인물은 03탱이. 합당으로 민주/반민주 구도 희석시키고, 결국 imf로 금융 세계화를 확실히 달성시킨 삐—(자체편집). 이 만화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