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갈 가치 – 『자학의 시』[기획회의 264호]

!@#… SM성인에로물 아닙니다;;;

 

살아갈 가치 – 『자학의 시』

김낙호(만화연구가)

시사주간지 한겨레21의 작년 기획특집 가운데 ‘노동OTL’ 이라는 연재코너가 있었다. 마트 시식노동, 가구공단, 고깃집 종업원 등의 노동업종에 기자들을 한달씩 취직시켜서 체험 르뽀를 작성하는 방식이었는데, 일상적이면서도 의외로 잘 보이지 않는 그런 노동들의 이면에 담겨있는 실제 생활패턴과 사회적 함의 등을 집중 조명한 매우 우수한 저널리즘 기획이었다. 특히 시장 한 번 순례하며 오뎅 하나 뽑아먹고 덕담 던지며 불운한 사연 하나 듣고 눈물 한번 흘려주는 장면 인증샷 찍혀주는 사파리 기행이 아니라, 그런 노동방식과 그런 생활의 구체적 모습 및 그런 것이 쳇바퀴 돌아가듯 계속 반복되는 양상을 바닥부터 발굴해내기에 의미가 컸다. 그런데 그 특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그런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세다. 왜 계급적 이익을 배반하고 진보 정파를 지지하지 않는가 같은 거시적 정치경제 질문은, 여하튼 그 생활에서라도 살아갈 수 밖에 없기에 더욱 근시안적으로 상황에 대응하며 스스로의 인지조차 단순화시키는 구체적 적응력 앞에 무의미해진다. 그렇듯 주어진 환경은 사람을 만든다.

그런데 사람은 행복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오늘의 불행을 끝내줄 내일의 행복을 고대하며 투쟁을 하는 수도 있겠지만, 심지어 그런 경우라고 할지라도 그 내일이 올 수 있음을 확신하기 위해 현재에서 어떤 희망을 찾아내고 행복해한다.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것과 행복이 있어야 한다는 두 가지가 합쳐질 때, 사람은 험한 조건에서도 나름의 행복을 만들어가기에 살 수 있다는 평범하지만 심오한 교훈이 만들어진다. 그 행복에 취해 실제 생활조건을 개선하는 것을 잊어도 무방하다는 것이 결코 아니지만, 당장 살아갈 힘 정도는 어쨌든 필요하다는 말이다.

『자학의 시』(고다 요시이에 / 세미콜론 / 전2권)는 작가가 85년에서 90년까지 잡지 『주간 보석』에 연재한 다양한 인간군상을 소재로 한 4컷 개그만화 시리즈 가운데 가장 인기 있던 유키에 시리즈를 따로 뽑아 묶어낸 작품이다. 갑갑하게 순종적인 여주인공이 되먹지 못한 남자와 비루한 결혼생활을 하면서 겪는 불행한 일들을 희화화하여 독자들의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라는 첫인상을 주며 시작한다. 남편 이사오는 깡패 출신인 듯 뚜렷한 일도 없고, 허구한 날 도박이나 다니고 집에서든 밖에서든 화가 나면 밥상을 뒤엎는 말종이다. 여주인공 유키에는 가계를 책임지고 집안일도 도맡으면서 그런 남편에게 반항하지도 화내지도 않고, 엎어진 밥상을 묵묵히 닦을 뿐이다. 속으로 분노가 끓어올라 분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런 남편을 사랑하고 그 상황에 적응하고 따른다. 실로 제목 그대로 ‘자학’의 경지로 보일 정도로 말이다. 자학에 가까운 순종적 생활을 너무 노골적이고 부조리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은연중에” 순종적 여성상을 미화한다고 쉽게 비판하기조차 힘들 정도다. 그러다보니 독자로 하여금, 분명히 코믹한 그림체로 코믹한 상황들을 그려내고 있어서 웃음이 절로 나올 때도 주인공을 함께 괴롭히는 듯한 불쾌한 느낌을 지울 수 없게 만들곤 한다.

그런데 4칸만화의 짧은 에피소드들이 계속 이어지고 그 부부의 삶의 디테일이 하나씩 드러나면서 감상의 포인트가 서서히 바뀌어나간다. 여전히 유키에는 순종적이고 남편은 막장인 비루한 생활이지만, 왜 그들의 삶이 이런 식으로 유지될 수 있는지 조금씩 단서가 풀려나온다. 처음에는 독자는 물론이고 작품 속 주인공 부부의 주변인들까지도 그런 생활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납득하기 힘들지만, 유키에의 더욱 불운했던 과거라든지 이사오가 현재 상태에 이른 과정 등 여러 가지가 조금씩 밝혀지면서 지금의 상황을 다시 읽어내게 된다. 그래도 부부가 마음 속 깊이 서로 사랑하니까 사실은 행복한 생활이라는 것이 아니다. 밥상을 뒤엎을 때 배에는 닿지 않게 한다는 턱없는 배려를 배려랍시고 하는 남편이, 드러낸 폭력은 없으나 학창시절 못생긴 얼굴과 가난으로 따돌린 급우들이나 가족을 편할대로 이용하고 팽개치던 아버지보다는 나은 존재라는 것이다. 아니, 그냥 나은 정도가 아니라 유키에에게는 무엇보다 절실한 존재다. 자신의 비루한 삶 속에서 “나는 살아갈 만 하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촉매가 되어준다.

그런데 『자학의 시』의 접근법은 서민투어 방식이 아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정해진 드라마의 코스에 따라서 주욱 훑는 것이 아니라, 작은 디테일이 담긴 에피소드들로 모자이크를 한 칸씩 완성해나간다. 그리고 그들의 인생이 현재 진행되는 과정을 서서히 같이 경험시킨다. 동시에 극단적 상황이나 개그의 끈을 놓지 않음으로써, 이사오나 유키에에게 캐릭터로서 섣불리 감정 이입시키지 않는다. 마치 별로 친하지 않지만 가끔 오가다 보이는 동네 이웃이나 먼 친척의 이야기를 조금씩 꾸준히 듣게 되듯 그들이 처한 현실을 이루는 여러 상황들을 겹겹이 알아나가게 된다. 그 안에는 한심한 순간도 많고, 애잔한 순간도 많으며, 코믹한 순간도 많다. 특히 4칸 개그 만화의 가벼운 선 그림을 한 순간도 놓지 않기에, 더욱 개별 에피소드의 소소한 모습과 그 안에 담긴 여운의 대비가 뚜렸해진다.

물론 작품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남자가 착해지는 일은 없으며 생활이 피는 일도 없다. 아예 조금도 변하지 않는 것은 아니며, 아이도 낳는 등 조금씩 인생은 진행되지만 말이다. 그저 행복이든 불행이든 인생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주관적 결심이 생겨나는 것이 전부다. 그런데 그들의 삶의 디테일을 목격하고 나면, 바로 그 결심이 얼마나 크고 소중한 것인지 어느덧 같이 느끼게 되는 것이 이 작품의 절묘한 힘이다. 깊은 수렁 속에도 한 줄기 빛이 있다는 낙관이 아니라, 어쨌든 살아갈 수 있다는 긍정적 에너지에 관한 것이다. 그 깨달음은 독자들을 딱히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유키에의 행복을 납득시키는 것일 뿐인데도, 삶의 의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결심이 주는 감동의 크기는 남다르다. 결말에 이를 때면 유키에의 삶은 딱히 대단히 조건이 바뀌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자학으로 보이지 않게 된다. 그저 삶으로 보인다.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적응방법을 찾아 어떤 의미를 얻어낸, 비루하기보다 평범한 그런 삶 말이다. 그것은 인생의 높은 성취를 이루는 좋은 것도, 생활 조건의 실질적 개선을 가로막는 나쁜 것도 아니다. 그냥 그 정도 기본적인 의미를 확보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임을 먼저 알게 해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학의 시』가 이야기하는 삶의 가치다.

자학의 시 1
고다 요시이에 지음, 송치민 옮김/세미콜론

======================================
(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 Copyleft 2010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Trackback URL for this post: http://capcold.net/blog/5424/trackback
19 thoughts on “살아갈 가치 – 『자학의 시』[기획회의 264호]

Trackbacks/Pings

  1. Pingback by 당그니

    멋진 서평입니다.^^;; 꼭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capcold 살아갈 가치 – 『자학의 시』[기획회의 264호] http://capcold.net/blog/5424 | 찝찝하게 감동적인, 여하튼 살아가는 것에 관한 만화.

  2. Pingback by 세상을 보는 검은 눈, Skyjet

    「자학의 시」 – 나락으로 떨어져야 작은 빛을 본다…

    ※ 작품의 스포일러가 일부 들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주어진 환경에 적응한다. 그 환경이 자신이 원하든 것이든, 원하지 않는 것이든. 환경에 적응한 사람의 행동은 환경이 바뀌고 나서도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 오랜 검열에 찌든 한국 만화가 자체적인 검열에 시달리는 것이나 (그래서 ’19세 미만 구독 불가’ 만화가 전혀 19세 이상이 볼 만하지가 않다.) 인권보다 경제가 우선적으로 여겨진 사회에 익숙한 사람이 조금만 인권을 신장시키려는 노력에…

  3. Pingback by xmio

    http://bit.ly/bvYzM6 결국 이 시대에 연결시키는 고민이랄까요. 그런걸 좀 찾아보고 싶어서.. 만화기이기도 하고^^; RT: @moonji_books: @xmio 앗^^ 저는 <게공선> 꽤 침울하게 읽었던 @julymon

  4. Pingback by 세미콜론 공식 블로그

    ‘자학의 시’, 2년만의 역자 후기…

    모든 예술의 주요한 테마이긴 하지만,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란 주제에 대해 고다 요시이에는 천착한다. 자학의 시에서는 날백수 건달 남편 이사오와 바보같이 답답해 보일 정도로 남편에 헌신하는 아내 유키에의 삶을 그리면서, 그리고 고다 철학당(한국에는 영화 ‘공기인형’의 원작으로 조금 알려졌을지도…), 속 자학의 시 : 로봇 코유키 등에서는 인간이…

  5. Pingback by reretry

    RT @capcold: 살아갈 가치 – 『자학의 시』[기획회의 264호] http://bit.ly/bvYzM6

  6. Pingback by capcold님의 블로그님 » Blog Archive » 2010베스트: capcold 세계만화대상 발표

    […] 시 (고다 요시이에 / 세미콜론 / 리뷰 클릭): 이것 또한 삶. 삶은 살아갈 가치가 […]

Comments


  1. 말로는 참 표현하기 힘든 핵심의 작품인데 정말 훌륭하게 정리해 주셨군요.
    실은 요전에 친구들과 한양문고에서 만났을 때 [자학의 시] 정판 나온 것을 보고 추천할 생각으로 열심히 설명하려고 했는데 일단 ‘툭하면 밥상 없고 돈이나 뜯어가는 전직 야쿠자 남편과 그런 남자라도 좋다고 행복하게 사는 여자’라는 설정부터 (당연하지만) 혐오와 불신의 눈빛들이…OTL 다음에는 캡콜님의 정리를 인용…해도 역시 화술이 내용을 따라잡지 못할 것 같으니 정판을 빌려주는 수밖에 없겠군요;

  2. 자학의시를 읽고 여자친구에게 이사오 흉내를 내다가 두드려 맞았습니다

  3. !@#… 호민님/ 그런 무모한 시도를 하시다가는 ‘신과함께’ 골로 가시는 수가…;;; (핫핫)

    nassol님/ 만화책을 보고 나서 이 글을 다시 읽고 싶어지시면 더욱 좋죠.

  4. …책을 출간 소식 듣고서 바로 구매한 1인. 대산초어 님 블로그에서 접하고, 도대체 무슨 만화일까 궁금해서. 역시, 2권을 다 읽어야 작품을 제대로 읽었다는 말을 확인한 순간이었습니다.

    추신. 저는 그냥 아무런 생각없이 만화를 고르고 리뷰 기사를 쓰는데, 어느 순간 확인해보니 capcold 님과 저와 같은 만화를 리뷰한 적이 꽤 많더라고요;;;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까요, 아니면 취향이 비슷해서 (…) 일까요.

  5. !@#… Skyjet님/ 그것은 좋은 현상입니다! (핫핫) 취향보다는, 도서로서 추천하기 바람직한 책을 고르는 기준의 방향이 비슷한거겠죠 아마.

  6. 아직 2권 안 봤는데…. 애가 생겼군요. 보는 내내 제발 임신만은 하지 말라고 기도했었는데. 흑

  7. 허허허.. 이거 늘 좋은 책에 관한 정보를 얻습니다. ㅎㅎ
    이것도 사야겠습니다. 좋은 책은 늘 새로운 세계로의 여행을 하는 기분을 가져다 주는데, 캡콜드님은
    좋은 가이드이자, 역사학자,지질학자, 인문학자 같습니다.

  8. !@#… 망구스님/ 오오 과찬의 말씀을. 하지만 가장 중요한(핫핫) 세일즈맨 기능이 떨어진다능…;;;

  9. 오늘 자학의시를 다 읽었습니다.

    1권을 읽으면서 왜 이런 만화를 그렇게 극찬하는지..이해가 안가면서

    정말 괴로워하면서도 감탄하면서 보았습니다.

    (이렇게 만화가 괴롭기는, 정말 오래간만이었습니다. 아키야마 히데키와 모리타카 유지의 “어린 아내” 이후로… 딱 떠오르는 만화였네요.)

    감탄한 것 중의 하나는, 어찌된게 단순해보이는 네컷만화안에 정말 정밀한 연출로 시대나 생활의 다양한 소품들이 그려져있어서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배경과 배경속의 작은 도구들까지 독자가 쉽게 알아쳐릴 수 있게 처리되어있었다는거구요.

    정말 괴로운 와중에도 빠져들어갈 수 밖에 없는 주인공의 삶 그 자체의 묘사에 감탄하였습니다.. 이런 괴로운 코미디라니.

    이상하게 거부감이 들었던 책 날개 덕분에 올초부터 계속 피해오다가 최근 세미콜론의 트위터에서 계속적인 푸쉬(?)를 받고 결국 읽게 되었는데.

    후.. 이런 만화를 무작정 추천과 무작정 감동 식으로 리뷰한 글들속에서 짜증을 느끼다가 음..역시 캡선생이 당시 가장 공감가는 리뷰를 쓰셨었구만 하고 위안(?)을 받았습니다.

    무슨 네컷만화 모음이 이렇게 읽는데 오래걸렸는지. 이것도 참 경이롭군요.

    엄청난 만화였습니다.

    참 본문 초반에 유키에를 요시에로 두번 쓰셨다는..

  10. !@#… nomodem님/ 도대체 요시에가 누구야! 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오타군요 OTL (수정완료!) 여튼 원고 속성상 감성적 닥추보다는 “아 이걸 읽는 건 이런 매력이 있는거구나”라는 근거를 마련해주는 것이 목표인지라, 이 작품에는 이런 식의 글이 가장 합당하겠다 싶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