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방식을 납득하기 -『나는 공산주의자다』[기획회의 274호]

!@#… 빨갱이덧칠도 주사종북질도 거의 기계적 관성으로 이어지는 지금에야말로 더 읽혀야할 책.

 

하나의 방식을 납득하기 -『나는 공산주의자다』

김낙호(만화연구가)

한국이 선진민주주의 국가라고 자처하기 시작한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남아있던 문제들은 하나 둘이 아니지만, 90년대 말이 되어서야 비로소 조금씩 개선되기 시작한 커다란 모순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상의 자유를 헌법으로 보장하지만, “사상범”에게 “전향서”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휴전중인 분단국가로서 이적행위를 엄벌한다는 행동에 기반한 상식적인 법적 차원을 크게 벗어나서, 사상 자체를 문제시하고 전향을 요구하는 무리수다. 이후 그런 문제를 인식하여 준법서약서로 바뀌었으나 그것도 사상 때문에 위법행위를 할 것으로 가정하는 전제를 내포하기 때문에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는 못했던 바 있다. 그런 제도적 틀의 와중에, 수많은 이들이 미전향 장기수이자 사상범으로 여느 흉악범들을 훨씬 뛰어넘는 수십년의 기간 동안 감옥에서 지냈다.

그런데 평생 감옥에서 썩을지언정 사상을 포기하지 않는다니, 무엇이 그들은 그렇게 강고하게 만들었을까. 어떤 이론적 깨달음, 어떤 혁명의 불꽃, 어떤 엄숙한 사명감이 있기에 그럴 수 있는가.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대답은 김이 빠질 정도로 단순하다. 바로 그것이 그들이 겪은 역사이자 당연한 삶이기 때문이다. 거대한 명분과 거시적 정치보다는 시대 속 현장들과 그 안을 살아가는 개인들의 삶을 볼 때, 이런 선택도 가능하겠다는 감이 잡힐 가능성이 생긴다. 놓치거나 잊고 살았던 사회의 모습들을 다시 보고, 인간을 다시 보고, 결국 우리를 다시 본다.

『나는 공산주의자다』(박건웅 만화 / 허영철 원작 / 보리 / 전 2권)는 비전향 장기수 허영철의 자서전 ‘역사는 나를 한 번도 비껴가지 않았다’를 만화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허영철은 남한과 북한에서 각각 지역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며, 국가보안법 위반과 간첩 미수로 무기형을 선고받고 36년간 복역한 후 91년 다시 세상의 빛을 보았다. 그리고 출소 후에 계속 보호 감시 하에 살면서도 끝내 전향을 하지 않았다. 작품은 출소 장면에서 시작하여, 그의 인생 과정을 취재하는 이들과의 대화 속에 하나의 시대씩 되짚어 가는 액자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제치하에 전라도 부안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고, 일본 북해도에서 탄광 노동자로 살고, 해방이 되던 45년에 남로당에 들어가고, 그저 자신이 생각하기에 당연하다 여겨지는 것들을 위해 하나씩 활동을 하다보니 인민위원회 위원장이고 일종의 혁명가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54년 다시 공작원으로 남파되어, 이듬해에 체포되어 그 이후 수십 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대단히 굴곡진 인생역정이지만, 개인의 삶이 영웅적인 무언가를 지니며 드라마틱하게 펼쳐졌다기보다는 원작의 제목 그대로, 역사가 그의 삶을 비껴가지 않았다.

역사에 뛰어들었다기보다 역사가 그에게 온 이런 삶 덕분에, 그는 그 모든 혼란과 격변의 와중에 계속 기층 민중의 눈으로 모든 것을 경험해왔다. 자본주의의 문제점도, 제국주의의 수탈도 그에게는 거대한 정치적 전략과 술수가 아니라 그저 좀 더 열심히 살아온 와중에서 보고 들은 경험담이다. 그가 한국전쟁에서 남쪽을 지켜준 혈맹으로서의 미국이 아니라 일제치하 이후 들어온 새 지배자로서의 미군정을 기억하는 시선은 부정적이다. 하지만 그것은 구호화된 ‘반미반제’가 아니라, 하나의 지배자를 밀어내고 다른 지배자가 민중의 삶을 어지럽히는 과정이다. 그가 남북한 분단을 바라보는 시선은 조국분단에 대한 추상적 울분도, 정치경제적 이해관계를 거시적으로 그리는 전략 기획도 아니다. 그저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고, 어찌되었든 실제 사람들의 삶이 그것 때문에 힘들어진 것이다. 그의 삶에서 보고 겪은 바가 역사와 항상 맞닿아 있었고, 그 속에서 그의 시선으로 그려낸 역사다. 추상적 집합체로서의 민중을 가정하고 그 시선으로 역사를 다시 서술하겠다는 거창한 목표가 아니라, 나는 이렇게 살아왔다는 한 시대, 한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렇게 접근하기 때문에, 개인사가 개인사를 뛰어넘어 역사 전체를 읽는 하나의 퍼즐 조각임이 뚜렷하게 드러나고야 만다. 그의 인생과정과 그 속에 개입된 수많은 역사적 순간들이 개인의 삶에 개입하는 모습들을 책을 읽으며 함께 지켜보면, 결국 납득하게 된다. 공산주의라는 사상이나 그것을 상당 부분 잘못 적용하여 실행에 옮기고 또한 그것에 대해 그릇된 방식으로 반발한 남북한의 역사적 행보를 납득하는 것이 아니다. 공산주의자를 자처하며 살아가게 된 어떤 사람의 모습을 납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민중으로서 어떤 역사적 맥락에 처했던 이가 열심히 살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당연한 방식일 수 있었다는 것을 납득하는 것이다. 옳고 그름, 우열이나 선악의 판가름 이전에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해준다.

『나는 공산주의자다』에서 작가 박건웅은 초기작 『꽃』부터 활용해온 목판화풍 그림을 계속 활용하고 있다. 주로 역사 회상은 80년대 민중미술을 연상시키는 간략화된 목판화를 사용하고, 현재 시점을 묘사할 때는 더 부드러운 잔선의 판화체를 구사하여 시대적 분위기와 느낌을 구분해준다. 격한 상황을 묘사할 때에도 흔들림 없이 유지하는 안정적 3단 6칸의 칸 편집은 기억을 활극으로 만들지 않고 주어진 상황으로 만든다. 모든 장면은 차분한 목소리가 느껴지며, 격정으로 무언가를 정당화하거나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내 경험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하나씩 담담하게 풀어나가는 수기로서의 질감을 구사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적절한 현재시점과 과거회상의 편집을 통해서 극적 재미도 충분히 만들어낸다. 특히 완급을 조절하는 타이밍 감각은 전작들에서 항상 아쉬웠던 부분을 상당부분 개선하여 더욱 반갑다. 원작 및 그것이 담고 있는 삶과 역사에 대한 존중, 그 속에 담긴 묵직한 내용을 제대로 전달하겠다는 성의가 가득한 작업이다. 주인공을 미화하며 감정이입을 시키는 식이 아니라, 기자들의 취재의 형식을 빌어 그가 그의 목소리 그대로 이야기하도록 하는 거리두기를 한다. 그 결과, 개인사와 사회 전체의 역사에 대해 재조합하는 독자의 능동적 몫이 그대로 남아있게 되는 장점이 생긴다 (즉, 편안하게 대리만족 쾌감을 느끼고자 만화를 읽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작품이라는 이야기다).

『나는 공산주의자다』를 읽고 해방정국 민중의 역사를 이해했다고 한다면 턱없는 과장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하나의 “불온한 삶”이 주는 울림을 통해 다양한 모순들이 넘치는 세상에서 어떻게 삶의 경험이 방향성을 만들고, 그 속에서 정말로 열심히 살아간다는 것이 자신에게, 서로에게, 사회에 있어서 어떤 의미인지 조금씩 더 고민하게 되었다고 한다면 이 작품을 읽은 가치가 있다. 공산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다. 공산주의자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납득하게 되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한 걸음을 디딘 것이다.

나는 공산주의자다 1
허영철 원작, 박건웅 만화/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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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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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thoughts on “하나의 방식을 납득하기 -『나는 공산주의자다』[기획회의 2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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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Pingback by 기픈옹달

    나름 재미있게 읽은 책. 다만 텍스트가 많았다는 점이 단점인듯. RT @capcold: 하나의 방식을 납득하기 -『나는 공산주의자다』[기획회의 274호] http://bit.ly/aTR6dm

  2. Pingback by Nak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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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Pingback by Fr. Joo

    "추상적 집합체로서의 민중을 가정하고 그 시선으로 역사를 다시 서술하겠다는 거창한 목표가 아니라, 나는 이렇게 살아왔다는 한 시대, 한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 via @capcold http://bit.ly/ddZCxI

  4. Pingback by Fr. Joo

    그래서 "개인사가 개인사를 뛰어넘어 역사 전체를 읽는 하나의 퍼즐 조각임이 뚜렷하게 드러나고야 만다. 그의 인생과정과 그 속에 개입된 수많은 역사적 순간들이 개인의 삶에 개입하는 모습들." via @capcold http://bit.ly/ddZCxI

  5. Pingback by 우냥

    RT @viamedia: "추상적 집합체로서의 민중을 가정하고 그 시선으로 역사를 다시 서술하겠다는 거창한 목표가 아니라, 나는 이렇게 살아왔다는 한 시대, 한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 via @capcold http://bit.ly/ddZCxI

  6. Pingback by Geeui Yu

    RT @viamedia: 그래서 "개인사가 개인사를 뛰어넘어 역사 전체를 읽는 하나의 퍼즐 조각임이 뚜렷하게 드러나고야 만다. 그의 인생과정과 그 속에 개입된 수많은 역사적 순간들이 개인의 삶에 개입하는 모습들." via @capcold http://bit.ly/ddZCx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