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하게 내려놓다 – 『고양이 장례식』[기획회의 277호]

!@#… 책내서평으로 들어간 내용의 확장판 같은 버전.

 

쿨하게 내려놓다 – 『고양이 장례식』

김낙호(만화연구가)

오랫동안 가졌던 집착과 미련을 털어내고 그 다음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매력적이다. 반드시 진취적이고 어떤 성공을 보여줄 것 같아서가 아니라, 과거에 사로잡혀서 내일은 커녕 오늘마저 놓치고 있는 갑갑함을 벗어던지는 쾌감 때문이다.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을 더 나은 오늘을 만들기 위한 기반으로 삼는가, 아니면 끝없이 아쉬워하며 되돌아볼 따름인가. 그것이 바로 추억과 미련의 차이다. 지나간 것을 억지로 잊어버리는 것도 억지로 와신상담하는 것도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당시의 경험이 오늘의 자신을 만드는 것에 기여했음을 인정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럴 때 비로소 오늘의 우연과 필연들, 새로운 만남과 오랜 만남의 재발견을 맞이할 수 있다.

『고양이 장례식』(홍작가 / 미들하우스)은 미련이 추억으로 바뀌는 특별한 계기를 맞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무언가를 내려놓는 사람들에 대한 3가지 느슨하게 서로 연결된 단편들이다. 첫 번째 이야기 ‘고양이 장례식’에서 헤어진 연인들은 함께 키우던 고양이의 장례식을 통해서 과거를 추억으로 만들고 지금 자신들이 다른 길을 가고 있음을 받아들인다. 고양이를 묻어주기 위해 산으로 올라가면서 겪는 어떻게 보면 무척 평범한 하루지만, 그 속에서 여러 기억들이 돌아온다. 처음 만날 때의 우연과 우연을 가장한 필연, 별것 아닌 것에 정성들였던 일, 어떻게 헤어졌는지 잘 모를 무언가 등 여러 감정들이 담담하게 흘러가며 정리된다. 그리고 하루가 끝날 때 즈음, 내려놓는다. 두 번째 이야기 ‘그때’에는 중년 부장과 그를 싫어해서 사표를 낸 전 부하직원이 등장한다. 뜬금없는 유럽여행 동행 제안에 둘은 같이 낯선 곳을 돌아다니며, 자신들이 각각 지니고 있던 옛 사랑에 대한 미련을 내려놓는다. 마음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집착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내려놓으니 다시 새로운 만남으로 열리는 길이 생긴다. 앞의 두 작품이 미디어다음에서 웹만화로 연재되어 이미 독자들과 만난 적이 있다면, 세 번째 이야기인 ‘오늘의 커피’는 세 이야기들을 함께 만나게 해주는 미공개 단편이다. 여기에서는 한 카페 점장이 뭔가 고민 많은 단골손님을 바라보고, 근처에 있는 파스타집 여주인과 만나게 되며, 병으로 누워있지만 삶에 대한 긍정적 시선을 지닌 카페 사장이 살짝 한마디를 건넨다. 두 다리쯤 건너면 사실 인연이 있고, 하지만 다시 보면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관계로 느슨하게 연결된 사람들과 사연들이 넌지시 펼쳐진다. 내려놓음에 성공한 이들이기에, 새로운 만남과 익숙한 재회 속에 모든 이들은 오늘을 살아간다.

『고양이 장례식』은 스타일면에서 작가의 전작 『도로시밴드』와 큰 차이를 보인다. 락밴드 판타지만화였던 전작에서 구사했던 과감한 앵글이나 빠른 칸 전환을 통한 역동적 연출이 최소화되었고, 실사풍에 가까운 기본 그림체를 변형시키는 대목도 적다. 나아가 등장인물 사이의 관계 역시 우정과 애증으로 엮인 사이라기보다 좀 더 평범하게 서로 인연이 닿은 정도로 바뀌었다. 하지만 발랄한 펑크적 감성과 차분하고 정적인 분위기라는 차이 아래로 한 꺼풀 들춰보면, ‘쿨’함의 정서를 공통되게 발견할 수 있다. 구차하게 얽매이던 어제를 넘어, 오늘 크게 중요하지 않게 된 것은 적당히 넘겨버리고 정리해버릴 수 있는 자세다. 여러 가지 기억과 섬세한 감정들이 오가더라도, 결국 깔끔하게 내려놓는다. 고양이 장례식에 온 두 예전 연인들이 혹시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것은 찰나일 뿐이고, 두 칸 만에 그런 미련은 넘어서버린다. 그리고 아쉬움에 슬퍼하며 눈물짓기보다, 다시 돌아오지는 않겠지만 당시 즐거웠던 어떤 순간을 살짝 떠올리며 혼자 미소를 짓는 것이 『고양이 장례식』의 쿨함이다. 세상 살아가는 인간사가 꼬일 수 있다는 것을 직면하면서도, 낙천적 인간관을 잃지 않는 자세다. 미련을 버리더라도 어떻게든 생존할 것 같다는 식이 아니라, 내려놓았기에 이제 다시 새로운 무언가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를 독자에게까지 전달해주는 것이다. 등장인물이 내려놓은 무거운 짐을 독자에게 전가하고 끝내는 여러 우울한 성찰적 작품들과 달리, 이 작품은 등장인물이 내려놓은 짐은 그 홀가분함을 독자도 함께 느낄 수 있게 만들어준다. 진득하게 겨우 헤어나오기보다, 쿨하게 털어내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런 쿨함이 뜬금없어지거나 비현실적으로 보이지 않게 해주는 것은 바로 세밀한 필력에 담긴 복합적인 표정, 단지 배경이 아니라 이야기의 정서를 담아내는 공간 등의 시각적 탁월함이다. 나아가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면서도, 그것이 중심이 되기보다는 현재 이 사람들이 어떻게 다음 발걸음을 내딛을 것인가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회상 등 과거 일들에 대한 노출을 연출해내고 있다. 그 결과 등장인물들의 현재 감정을 추론하게 만드는 이입의 힘이 상당하다. 90년대 성인향 순정만화에서 꽃핀 바 있으나 현재는 오히려 퇴색된 성찰적 감성이 이런 식으로 계승되어 업그레이드되어 돌아온 격이다. 물론 등장인물들이 지나치게 예외 없이 미형이라거나 하는 단점 아닌 단점도 함께 말이다.

반면, 아쉬운 부분도 없지 않은데, 예를 들어 3개 단편들이 진행되고 있는 시간대에 대한 설명이 친절하지 못하다. 3개 이야기에서 등장한 인물들이 서로 다른 시기에 느슨하게 만나는데, 계절의 표시든 유행 같은 시대적 지표의 변화든 시간의 흐름에 대한 단서가 따로 없기에 우연과 필연적 만남의 절묘함을 좀 더 제대로 즐기는 것이 쉽지 않다. 또한 ‘오늘의 커피’의 경우 다른 두 편보다 중심이 되는 두 사람 사이의 감정관계가 훨씬 일방향이라서, 자체로서의 완결성보다는 전체 이야기를 엮는다는 의의가 더 크게 부각되는 감이 있다.

하지만 이런 아쉬움 정도는 쿨하게 내려놓아도 좋을 정도로, 작품을 지배하는 전반적 감성과 읽는 맛이 뛰어나다. 비록 제목 때문에 호러물로 착각하는 이들도 생기겠지만 사실은 트렌디하게 들고 다니며 읽기에도 제격인 만큼, 오늘날 한국 독자들에게 좋은 호응을 얻어 마땅한 작품이다.

고양이 장례식
홍작가 글 그림/미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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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미디어다음에서 연재되었을 때 참 괜찮은 단편들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단행본으로 나왔군요.
    웹에서 연재되지 않았던 ‘오늘의 커피’가 궁금해지네요.
    얼른 구입해서 읽어봐야겠습니다. ^^

  2. 끝에서 두 번째 문단 시작부의 ‘아쉬운 부분도 없는데’ -> 오타 신고합니다.

  3. !@#… 뗏목지기님/ 3악장 마무리죠. 합쳐져야 진짜 완성.

    Lim님/ 허걱 황당한 오타가;;; 지적 감사드리며, 낼롬 수정합니다.

  4. 셋째 문단 둘째 줄의 ‘역동적 연출을 최소화되었고’ -> 수정이 필요한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