겹치고 변화하는 이야기 – 아스테리오스 폴립 [기획회의 287호]

!@#… 출판사측 카페에 전재된 버전에는 관련 도판(!)도 삽입되어 있음. 다음 작품은 ‘에식스 카운티’던데, 미메시스(열린책들)의 라인업이 바람직하게 전개중.

 

겹치고 변화하는 이야기 – [아스테리오스 폴립]

김낙호(만화연구가)

세상사라는 것은 서로 다른 성격의 사안들과 사람들이 서로 엮이며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크고 복잡한 사회에서는 뭇 독재자들이 꿈꾸는 단일한 “국론”이 자리 잡는 깔끔한 파시즘 같은 것들은 엄청난 폭력이라도 동반하지 않는 한 근본적으로 무척 정착시키기 어려울 정도로 말이다. 그저 사람들끼리 서로 만나서 사귀고 헤어지며 인연을 맺는 일상적 상황, 틀에 박힌 생활과 다른 관점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도 마찬가지다. 억지로 자신만의 통일된 방향을 고집하는 것이 오히려 어렵다. 여러 가지가 겹치는 지점에서 예상하지 못한 변화가 일어나고, 그 과정을 잘 소화해낼 때 성장이라는 것도 이루어진다. 사람들의 성격이든 추상적 가치든, 인생에서 마주치는 대립항들은 충돌하여 승부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새로운 방향을 찾게 해준다.

최근 한국어판이 출간된 [아스테리오스 폴립](데이비드 마주켈리 / 박중서 옮김 / 미메시스)는 크리스웨어의 [지미코리건]과 맞먹을 정도로 만화예술의 형식적 실험과 내용의 문학적 깊이를 동시에 충족시켜주는 보기 드문 작품이다. 이미 09년 미국에서 출간된 후 유수 언론의 호평 속에 각종 상을 휩쓸며 미국의 여러 영문학과에서 참조자료로 삼을 정도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제목은 칭송받는 설계실력이지만 한번도 작품이 실제 세계에 만들어진 적 없는 건축가 주인공의 이름이다. 작품은 그가 자신이 고수하던 세계를 떠나는 이야기, 세상의 본질적 대립항들에 대한 관념과 추상에 대한 논의, 그리고 그의 갑갑했던 과거 삶의 이야기 등 세 가지가 수시로 교차하며 전개된다.

이 작품은 여러 관념을 통한 세상인식과 현실의 접합에 관한 이야기이다. 대립항의 양면성, 철학적 논의와 그리스신화를 거치지만 결국 일상적 생활과 맞닿게 되는 패턴이다. 이런 전개는 폴 오스터의 히트작들이 떠오르는 줄거리를 머금고, 율리시즈 등 상념에 푹 담구는 작품들의 느낌을 담아낸다. 추상과 현실, 사유와 줄거리, 감성과 이성 등의 대립항들이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맞물린다. 플라톤의 ‘향연’을 인용하는 대목에서 이야기하듯, 대립항들은 원래 하나에서 분리되어 불완전한 부분들이 되어(심지어 주인공의 이름도 이민국에서 반토막이 난 것이다) 서로와 교차한다. 그 과정에서 한 중년 교수가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삶의 다른 부분들을 찾아나가며 새롭게 성장하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 과정은 그저 단순한 삶에 염증을 느낀 중년남의 갱생기 따위의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단순할 수 있는 줄거리 밑에 근본적 질문과 해답을 체계적으로 짚어나가는 구도의 자세가 담겨있다. 그리고 그것은 이질적인 이들이 서로 동선이 겹치고 영향을 주는 과정이다.

그런데 단순히 줄거리에 담긴 내용 이상으로, 삶에 대한 질문들이 시각적으로 전달되는 쾌감 또한 이 작품의 탁월한 장점이다. 애초에 만화는 이야기를 시각으로 치환하는 표현양식인데, 가장 기본적으로는 상황의 정지된 순간들을 연쇄로 보여준다. 하지만 좀 더 모험심 있는 이들은 이야기를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각종 단서와 감성들을 여러 시각적 요소들에 삽입하여 더 깊은 감성을 만들어낸다. 물론 그런 시도는 자칫하면 작가 혼자만의 자의식과잉에 빠져서 전달 불가능한 혼란만 낳지만(실험적 독립만화에서 흔히 저지르는 실수다), 이 작품은 절묘함을 잃지 않고도 잘 전달될 수 있을 만큼 명료한 균형점을 잡는 드문 작품이다.

예를 들어 작품에 등장하는 한 파티장면에서는 다양한 서로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이 각각 다른 미술사조로 묘사된다. 서로 다른 기법으로 그려진 캐릭터들이 한 공간에서 같이 돌아다니는 그 장면은 어떤 말로 된 설명보다도 더 서로의 근본적인 다름을 효과적으로 느끼게 해준다. 혹은 지향하는 가치관의 다름을 인쇄용 4원색을 각각 따로 사용해서 표현하는 대목도 있다. 또 평면적 성격인 주인공은 2차원적 옆모습만 보이는 얼굴로 묘사된다. 목소리의 흐느적거림과 경직성, 설명조와 대화체를 다양한 글꼴과 글자 크기로 보여주는 것은 기본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성장과 변화를 그런 요소들의 섞임과 변화과정으로 보여준다. 가치관의 변화에 따라서 캐릭터를 묘사하는 그림의 사조가 함께 섞이며 바뀌는 대목이 등장한다. 빨간 색으로 상징되는 사람과 파란 색으로 상징되는 이가 서로와 관계하면서 두 색이 겹쳐나간다. 마치 인쇄에서 원색들이 섞여서 다양한 색들이 만들어지듯, 두 사람의 세계가 새로운 색과 패턴을 낳는 모습이 시각적으로 전달되는 것이다. 그리고 주인공의 2차원 얼굴은 그가 자신의 경직된 마음의 벽을 허물고 다른 종류의 인간사 체험에 마음을 열면서 점점 입체적인 얼굴이 되어간다. 그저 실험적인 겉멋이 아닌, 이야기의 흐름을 이끄는 시각연출인 것이다. 나아가 그림으로 표현된 세계관, 인쇄의 기본요소, 글과 그림의 대비 등은 만화라는 내용에서 다루는 주제이면서 동시에 만화라는 매체 자체에 대한 탐구로도 읽을 수 있기에 더욱 풍부한 감상을 가능하게 해준다. 여기에 각 챕터의 첫 페이지에 하나의 칸을 복선으로 제시한다든지, 이야기의 필요에 따라 수시로 칸 배치방식(특히 여백의 연출효과)을 바꾸는 등 공간 연출을 통한 감성 전달도 뛰어나다. 이런 요소들은 다른 어떤 매체로도 이식되기 힘든, 만화로 읽어야만 하는 이야기라는 독서의 기쁨을 준다.

이런 요소들의 중요성을 한국어판의 출판사도 다행히 잘 인식하고 있었는지, 원작에 거의 근접한 감상이 가능한 성의 있는 완성도로 나왔다. 수년 전에 같은 출판사가 작업했던 작가의 전작 [유리의 도시]에 대해서는 필자가 작품 자체는 칭송했으나 통짜 단일 글꼴 식자 등 출판품질에 대해서는 불만을 표시한 바 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같은 출판사로 보기 힘들 정도로 편집에 들인 노력이 전혀 달라서, 글꼴, 효과음 삽입, 번역품질 등 모든 곳에서 매우 충실한 이식이 보인다.

서로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 만나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예상하지 않았던 성장을 한다. 겹치고 변화하며 새로운 것이 만들어진다는 내용과 형식에 걸맞게, [아스테리오스 폴립]은 여러 번 다시 읽어볼수록 또 다른 이야기들이 드러난다. 직선적이고 드라마틱한 줄거리의 스릴이 없으면 곤란해하는 다소 성미가 급한 독서법만을 고수하기보다, 읽는 것와 스스로 사색하는 것을 함께 겹치며 읽을 때 가장 진가를 드러내는 작품이다.

아스테리오스 폴립
데이비드 마추켈리 지음, 박중서 옮김/미메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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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즉 현 발간호 게재중인 글): 신과 함께. 서평지면이다보니, 종이 단행본이 나온 뒤에야 글을 써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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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thoughts on “겹치고 변화하는 이야기 – 아스테리오스 폴립 [기획회의 2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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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 예전 캡콜드 님의 서평 http://t.co/P4Ep9Ifw 보고 벼르다가 이제야 구입 http://t.co/ybbeEIl4

Comments


  1. 흠- 미국인지라 원판을 뽐뿌받아서 읽고 있습니다. 훌륭하네요. 근데 중간에 폴립이 처음으로 정비소에서 일하게 되는 장면에 차 범퍼에 붙어있는 스티커가 재밌네요. “I still miss my ex. But my aim is improving” ^^ (구글링 해보니 진짜로 있는 스티커네요)
    한국어판에는 이게 어케 번역이 되었는지?

    저걸 내가 번역하면 어떻게 할까 생각해보니…번역은 제 2의 창작이라는 말이 새삼 느껴집니다.

  2. !@#… phlip님/ 방금 다시 찾아보니, “난 아직도 예전 여친이 보고싶다 하지만 내 목표는 더 나아가는 것”으로 되어있더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