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개인들의 괜찮은 선의와 기본적 이기심이 사회적으로 뭉쳐가며 뭔가 엉망진창이 되는 류의 이야기가 은근히 취향에 맞기에 더욱 즐거웠던 작품.
번듯하지 않아도 괜찮다 – [예술애호가들]
김낙호(만화연구가)
작가적 상상력의 폭이라는 측면에서 언젠가는 벗어나야 하는 반면, 이왕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를 끄집어낼 수 있는 확실한 조건이 갖춰진 소재라면 무엇일까. 바로 자기가 몸담고 있는 분야의 ‘판’이 돌아가는 모습에 대한 풍자적 관찰이다. 드라마 제작 현장의 외화내빈을 꼬집는 드라마, 영화 제작 과정의 복마전을 그려낸 ‘제작자들’ 같은 영화, 만화 연재의 과도한 열정노동을 드러내는 만화 같은 것들이 좋은 예다. 서사예술이 아닌 분야라면, 가급적 그 장에서 이뤄지는 성취과정들을 효과적으로 표현해낼 서사양식을 취하는 것도 합리적이다. 미술판을 이야기한다면, 미술적 감성을 고스란히 담아내면서도 이야기를 펼칠 수 있도록 만화라는 양식을 선택한다든지 말이다.
[예술애호가들](브레히트 에번스 / 박중서 역 / 미메시스)은 미술 전시행사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아니, 그런 장에서 전형적으로 겪게 되는 여러 개인적 그리고 체계적 문제들로 인하여 결국 서로 충돌하다가 엉망진창 위기를 겪는 이야기다. 주인공 가운데 하나인 페테르손은 엄청난 슈퍼스타는 아니지만 일각에서 그럭저럭 알려진 화가로, 베르풀이라는 마을의 비엔날레에 참가하여 명성을 본격적으로 날리고 싶은 희망이 있다. 그러나 정작 그 행사는 실제로는 동네 예술 애호가들의 아마추어적인 방식과 취향으로 준비되어가고 있었다. 이 행사를 통해 제대로 유명해지고 싶은 페테르손은 행사가 번듯하게 치뤄져서 자신이 유명해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준비를 주도하게 되고,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그럴듯하다고 생각하는 틀거리로 행사를 몰아간다. 급기야 마을의 온갖 예술애호가들이 함께 만드는 거창한 공동 예술품을 기획하게 되고, 각자의 소박하고 독특한 미술 취향보다는 획일적이고 틀에 박힌 화려함으로 대외적 인정을 쉽게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방향으로 간다. 하지만 한쪽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예측불허의 사건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벌어지고, 서로의 생각은 당초 짐작한 것보다 훨씬 간극이 크다. 갈등은 쌓이고, 모든 것은 원하는 대로 굴러가지 않고 소동이 이어진다.
이야기 속에 가장 극명하게 전달되는 주제는, 자만심에 대한 경계다. 번듯한 것으로 위세를 추구하는 페테르손이 마을 애호가들의 소박한 개성과 바람을 무시하고 질주하는 모습, 그로 인해 결국 모든 것이 어긋나고 망가지는 과정이 주는 교훈은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명쾌하고 통렬하다. 가장 자만심으로 가득했던 그지만, 다양한 소동 속에서 결국 아무것도 해내는 것이 없어질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또한 그럴싸한 포장으로 따내는 공공 예술 후원 기금과, 급조한 지역축제 정책으로 점철된 그 쪽 미술계에 대한 풍자는, 벨기에가 아니라 한국으로 대입해도 공감의 폭이 넓다. 번듯하지만 경직된 기준으로 영감과 개성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획일적인 결과물을 만들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정작 예술을 사랑하도록 하는 동기마저 상실하게 만든다.
만약 경직된 번듯함을 강변하는 페테르손이 그저 자신들 방식으로 미술을 사랑하겠다는 축제마을 주민들 사이에서 겪는 갈등을 무거운 인간적 고뇌로 가득 채웠더라면, 이 작품에서 말하는 예술의 즐김에 대한 예찬과 어긋날 것이다. 다행히도 작가는 이 과정을 경쾌하고 떠들썩하게, 난감한 상황들이 설상가상으로 더해지는 점층적 코미디의 묘미를 제대로 살려내며 전개한다.
그렇다고 코미디 효과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단순화하는 것과도 정반대의 길을 간다. 점점 엉망이 되어가는 프로젝트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모든 주요 인물들은 겉보기만큼 단순한 성격들도 아니고, 마냥 착하게 서로 어울리지 못함이 드러난다. 당장 행사 준비 대표인 크리스토프만 해도, 애호가로서의 소박함과 유명 화가를 손님으로 모셔왔다는 허영심이 함께 있을 정도다. 마을민들의 예술 취향은 그저 애호가이고자 하지만, 회관을 만들어 마을의 발전을 얻고자 하는 욕망은 결코 가볍지 않다. 게다가 그들의 아마추어적 예술 취향은 알고 보니 숨겨둔 진주라기보다는, 정말로 그저 일상적인 미의식일 따름이다. 함께 거대한 예술 작업을 만들기 위해 원래 있던 공동체로서의 유대는 깨지고, 열정과 허영은 수시로 교차한다. 누구 하나 온전히 감정이입하고 좋아할 만한 사람 없이, 다들 각자의 성격적 결함이 있는 평범한 인간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벌이는 소동이기에, 더욱 재미있는 것이다.
미술에 관한 이야기인 만큼, 만화의 표현 전반이 미술적 감성으로 가득하다. 모든 장면은 수채화로 그려졌는데, 경계선을 흐린 칸들로 이뤄진 이야기 시퀀스, 그리고 그로 인해 생겨난 전체 분위기를 압축한 기묘한 구도와 형상의 큰 장면 그림이라는 전개 호흡이 반복된다. 그 장면 그림들을 계속 접하다 보면, 아마추어 애호가의 장난스럽지만 독특한 개성으로 보일 때도, 경직되었으나 번듯한 회화 구도를 차용한 것으로 보일 때도, 그 중간 어디쯤에서 갈등하는 모습으로 보일 때도 있다. 이런 시각적 쾌감은 이야기의 흐름을 절묘하게 반영해낸다.
색의 활용 역시 재미있는데, 주요 등장인물의 성격을 반영하여 고유의 색을 모습의 테마는 물론이고 말풍선에도 활용한다(한국어판 역시 완성도 높은 식자 작업을 통해서 이런 측면을 성실하게 반영했다). 목소리 크고 풍채 있는 크리스토프는 빨간 색, 도회적이고 살짝 기회주의적 흐릿함이 있는 페테르손은 누릿한 초록색이다. 이 밖에도 검은 색, 파란 색 등 사람들 간의 갈등과 화해의 과정이 색의 부조화와 융합 속에 표현된다. 이런 팔레트는 수채화라는 형식과 만나며 한층 자연스럽게 강조된다. 특히 이런 측면은 각종 기하학적 패턴의 활용 속에서 더욱 빛난다. 그 속에서 완성되는 것은 번잡한 혼란 속 묘한 질서와 조화의 모습이다.
소박하되 어설픈 독창성과 경직된 번듯함 사이, 공동체의 느긋함과 목표를 위한 열망 사이, 즐김과 전문성의 자만심 사이에서, 사람들은 서로 부대끼며 서로의 세계에 간섭한다. 그렇게 사람 세상은 굴러가고, 그 모든 소동에도 결국 예술이라는 나름의 커다랗고 모호한 공통분모를 안식처 삼아가면서 그럭저럭 다시 즐거움을 되찾으며 함께 나아간다. 꼭 당초에 원한 만큼 대단히 번듯하지 않아도, 그래도 너무 엉망으로 무너지지 않는 법도 한편으로 학습하여 조금 어설프더라도 일정한 활력과 열정을 지니고 계속 예술을 애호할 수 있다. [예술 애호가들]은 바로 이런 낙천적인 여정을 시각적 쾌감으로 가득 채워 경쾌한 코미디로 풀어내는 수작이다.
예술 애호가들 브레흐트 에번스 지음, 박중서 옮김/미메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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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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