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간의 확장, 감정과 현실 – 초속 5000킬로미터 [기획회의 309호]

!@#… 나라고 이런 감성 중심 연애물(…)을 딱히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핫핫).

 

시공간의 확장, 감정과 현실 – [초속 5000킬로미터]

김낙호(만화연구가)

인간 생활에서 시공간의 확장은 현대 사회를 파악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다. 매체기술의 발전과 기록은 개인적, 사회적 기억들이 보존되고 참조되는 시간을 비약적으로 늘였다. 운송수단의 발전 및 각 사회 단위들의 갈수록 촘촘해지는 협력관계는 생활권을 실로 국제적 차원으로 늘려놓았음과 동시에, 실시간 통신이 상호작용성을 보장한다. 이렇듯 교통 및 통신망의 발달이 근대적 국가개념의 형성을 이끌어냈다든지 하는 기든스 사회학 류의 분석을 할 수도 있겠지만, 좀 더 일상적인 화두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생활의 맥락이 된다고 여기는 시간, 그리고 삶의 무대가 된다고 생각하는 공간이 더 범위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데, 정작 기억과 생활은 여전히 물리적으로 제한된 범위라는 점이다. 인류는 역사의 흐름을 이야기하지만, 나에게는 살아온 기억과 당시의 감정, 그것이 때로는 옅어지고 혹은 다시 강해지며 조금씩 바뀌기도 하는 그런 시간이다. 사회는 노마디즘 같은 유행어를 만들고 지구상 여러 곳으로 흩어지며 활동하는 세계시민을 이야기하지만, 한 공간에서 같이 추억을 지녔던 사람과 소통하고 싶고 또한 지금 자신의 공간에서 누군가와 가까워진다. 기억하는 추억과 현재 생활로서의 감정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넓은 세계에서 실시간으로 가깝게 살아가는 듯하면서도, 그 안에도 역시 피할 길 없는 간극이 있다. 고향마을에서 이어진 사랑의 기억을 간직한 두 사람이 성인이 되어 이집트와 노르웨이에서 각각 활동하며 전화를 할 때, 5000킬로미터의 거리에서 전화를 할 때 발생하는 1초의 시차가 그런 간극이다.

[초속 5000킬로미터](마누엘레 피오르 / 미메시스)는 유동성이 큰 오늘날의 유럽을 살아가는 이들의 사랑의 기억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줄거리는 이태리의 전원적 소도시에서 시작한다. 두 친구 피에로와 니콜라, 그리고 이사를 온 소녀 루치아 사이에 감정이 싹튼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피에로와 루치아는 서로 사귀었으나 지금은 피에로는 이집트에서 고고학자로 일하고, 루치아는 노르웨이에 있다. 루치아는 그곳에서 새로운 사랑을 만나 가정을 꾸렸고, 피에로도 자신의 삶을 살고 있다. 니콜라는 여전히 이태리에 남아 일을 한다. 각자의 삶으로 시간이 흐른 뒤, 그들은 이전의 무언가를 그리고 현실을 받아들이며 살아나가고,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된다.

현재의 20-40세 사이 유럽의 젊은 성인층은, 비교적 풍요로운(서유럽의 경우에 한정해서) 경제조건과 좁은 사회 공간에서 안정적 생활을 하던 호황기를 살아가지 않는다. 한층 더 가깝게 통합된 연합경제권 속에, 많은 곳을 이동한다. 그만큼 다양한 기회를 찾아 나서며 여러 가능성도 있지만, 반면 삶의 기억들과 인연들은 여러 갈래로 흩어진다. 비슷하게 유동성 높은 미국과 함께 페이스북이 큰 히트를 친 것이 이상하지 않은 것이, 그런 소셜네트워킹서비스들은 마치 그 흩어진 인연들을 자신이 다시 관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효능감을 주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멀어진 각자의 시공간 속에서 서로의 기억과는 달라지고 있을 따름이라도 말이다. 이 작품은 이런 세상 속을 살아가는 이들의 섬세한 감정변화와 삶의 단면들을 그려내는 사랑이야기다.

[초속 5000킬로미터]는 사랑의 감정이 아니라 감정의 기억을 이야기한다. 감정이 깊어지는 과정을 연속으로 펼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감정을 알게된 어떤 순간의 기억을 되새김질 한다. 또한 멀리 떨어진 공간의 제약을 서로에 대한 마음으로 극복하는 식의 열정보다는, 각자의 공간 속에서 자신의 삶을 사는 모습을 보여준다. 시간의 속도와 물리적 거리 속에 각자는 크게 다른 식으로 삶을 살게 되고, 자신이 재구성하는 기억과 지금의 현실의 사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서 성숙한 삶의 활력이 될지 애틋한 집착이 될지 달라질 따름이다. 그렇기에 작품은 그들의 감정에 동참하기보다는, 그들의 삶을 엿보며 독자 자신도 가지고 있을 감정의 기억들을 돌아보게 만든다. 그리고 40대가 되어 인연이 닿아 다시 만난 피에로와 루치아는 그간의 추억과 현실을 서로에게 확인하고 동시에 받아들인다. 과거에는 모든 것이 덜 복잡하고 좋았다는 식의 노스탤지아 후일담에 빠지지 않고, 그저 그런 것이 오늘날의 삶이라고 그저 넌지시 던져놓는다. 영화로 치자면 두 남녀의 우연한 만남의 순간을 그린 95년작 ‘비포 선라이즈’와 그들이 또다시 우연히 만나는 04년작 ‘비포 선셋’, 그리고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후속작을 연달아 보는 듯한 느낌이다.

줄거리보다는 감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시대적, 사회적 분위기가 중심이 되는 작품인 만큼, 시각연출이 차지하는 몫이 크다. 그리고 그 지점을 이 작품은 색조를 엄격하게 조절한 수채화 기법을 통해 무척 탁월하게 해내고 있다. 노란 색감의 햇빛 찬란한 유년 추억의 이태리, 푸른 빛으로 표현된 아름답지만 차가운 루치아의 노르웨이, 갈색 색감의 신비롭지만 넓고 황량한 느낌의 이집트가 교차한다. 같이 한 기억의 따스한 색, 거리감 있는 현재의 차가운 색이 이야기를 이끈다. 선명한 외곽선보다는 색과 형체로 표현된 세상 속에서, 아련하게 미화된 기억일수록 자연스럽게 흐릿하게 그림으로 표현된다. 칸 경계선을 긋지 않고 윤곽을 흐리되 반듯한 네모 형식으로 만든 칸 구성은, 마치 오랜 폴라로이드 사진 혹은 환등기 슬라이드를 연상시킨다. 즉 낯선 여행과 기억의 시각적 풍경 말이다. 그런 잘 잡힌 틀 속에서, 칸 간 충돌의 실험이 풍부하게 이뤄진다. 특히 루치아의 샤워실 장면이나 다람쥐 장면 등은 전체적인 시적 정서를 전혀 흩트리지 않으면서도 에로틱한 상상력을 극대화시키는 명연출을 선보인다. 물론 그 모든 것이 효과를 발휘하는 것도 기억과 현실, 각자의 삶이라는 여러 다른 이야기들을 자연스럽게 접합해놓은 작가의 이야기솜씨 안에서 가능한 것이지만 말이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감정을 그림으로 잘 옮긴 화가 이상으로, 무엇보다 기본적으로 좋은 이야기꾼이다(비록 사건이 중심이 되는 “직선적” 시나리오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흔히 유럽만화에서 나오는 길고 설명적인 대사를 구사하기보다는, 짧고 현실적인 대사로도 충분히 밀도 높은 전개를 소화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물론 이 작품에서 그려내는 사회상들은 한국의 현실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집약도가 높은 좁은 공간과 지나치게 촘촘한 인간관계 속에 여전히 찌들어 있는 한국 현실은, 1초 차이가 날 정도로 거리를 두고 아련한 기억으로 서로 소통을 시도하는 세상은 아니다. 하지만 불안정한 현실기반에서 출발한 변화의 속도나 잦은 이동과 거리감 같은 것은 큰 틀에서는 충분히 공통적으로 적용된다. 인연이 멀어진 후 다른 삶을 살고 그것에 직면하게 되는 것도 그렇다. 감정의 기억도 현실도 오롯이 받아들이고, 다시 오늘을 살아갈 준비가 필요한 것은 사람사는 세상 어디든 마찬가지 아닐까.

초속 5000 킬로미터
마누엘레 피오르 지음, 김희진 옮김/미메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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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즉 이번 호 글): ‘지금은 없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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