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지 않으면 멸망하는 세상 – [설국열차] [기획회의 350호]

!@#… 사정상 예전 현문코믹스판의 기억 기준으로 쓰느라 적잖이 가물가물했음(..)

 

달리지 않으면 멸망하는 세상 – [설국열차]

김낙호(만화연구가)

필자는 한국사회에 대해서 촌평을 할 때, 종종 달리는 차의 비유를 들곤 한다. 전속력으로 달리기에 바빠서, 덜컹거리다가 승객들이 몇 명쯤 바닥에 떨어진다 한들 돌아보지 않고, 그저 아직 남은 승객들에게 더 강하게 무언가를 붙잡고 있기를 종용하며 질주하는 모습으로 말이다. 전진이라는 심상 때문에 이런 식의 상상은 여러 사람들이 이미 했을텐데, 그것을 가지고 아예 온전한 줄거리 담아낸 서사작품을 만들어낸 경우도 있다.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하염없이 달려가는 열차는 세상에 대한 노골적인 비유며,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우리들 자신에 대한 풍자다. 사람들의 행동방식에 대해 따뜻한 상상력을 섞어 넣으면 ‘폴라 익스프레스’ 같은 희망찬 동화가 될 수 있고, 상상력은 딱 세계설정까지만 발휘한 후 그 속 사람들의 행동은 현실과 가깝게 가져가면 섬뜩한 우화가 된다.

최근 봉준호 감독의 영화 덕분에 한국어판이 재출간된 [설국열차](장 마르끄 로셰트, 자끄 롭, 뱅자맹 그르랑 / 세미콜론)는 명백한 후자의 작품이다. 이야기의 무대는 새로운 빙하기의 지구고, 살아남은 인류는 1001량의 긴 열차에 타고 있는 탑승객들이 전부다. 무한동력 엔진으로 움직이지만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는 열차에서 사람들은 평생을 살아간다. 원래 SF란 기본적으로 과학적 정합성을 표방하는 가상의 세계를 상정하되, “이런 세계가 있다”와 “우리 세계가 이렇게 되었다”사이에서 한쪽으로 무게중심을 잡곤 한다(중심을 잡는 것에 실패하면 독자들이 이야기에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설정의 오류만 신경쓰다가 끝난다). 이 작품은 왜 이런 세상이 왔는지, 누가 어떤 기술로 이런 것을 만들었는지 세세하게 설명하기보다는, 이런 것이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현재 속으로 독자를 끌어들인다. 이야기에 중요한 것은 이 세계가 굴러가는 법칙 자체인데, 탑승객들이 얼어 죽지 않기 위해서는 열차는 끊임없이 달려야만 한다. 식량 등은 일련의 기술에 의하여 제한적이나마 공급이 이뤄지는 곳이기에, 사람들은 생존 자체를 위한 만인 대 만인의 경쟁보다는 하나의 사회 체제를 만들어내었다.

하지만 열차의 사회는, 한 줌 살아남은 인간들의 따듯한 마을공동체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다. 어느 정도 물질 조건이 갖춰진 열차 안의 모습은 딱 우리 현대 사회의 일면을 축소해놓았다. 명백하게 나뉘는 계급이 있고, 탐욕과 범죄가 있고, 불안하고 불공정한 세상에 대한 불안을 다른 방향으로 비틀어내는 사이비 신앙 등이 고루 갖춰져 있다. 열차라는 명쾌한 공간에서, 에너지원인 무한동력 엔진과 가까운 곳들이 상류 계급의 사람들이며 꼬리칸으로 갈수록 사회적 계급이 낮아진다. 어떤 환경이든, 결국 일정한 물질조건에서 사람들이 모여서 사회가 만들어지면 비슷한 귀결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번에 출간된 한국어판은 3편으로 이루어진 연작을 합본하여 냈다. 1권(부제: 탈주자)의 줄거리는 한참 뒤쪽의 승객인 프롤로프라는 사람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지 않고 도망길에 나서는 이야기다. 그는 계급차별을 철폐하고자 하는 인권단체 운동가인 아들린과 만나서, 일련의 사건 속에 점차 열차의 앞으로 이동하며 다양한 계급과 직업의 사람들을 스쳐지나간다. 그리고 엔진이 점차 힘을 다해가고 있으며, 그것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앞칸 승객들이 무게를 줄이기 위해 꼬리칸을 떼어내고자 한다는 비밀을 목격하고 그것을 막고자 나선다.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이것은 성장 동력이 둔화되는 세상에서 사회적 연대보다는 하층계급의 수탈과 배제라는 방법을 만지작거리는 80년대 프랑스 사회 현실의 반영이다. 그리고 얄궂게도, 10년대 한국 사회현실에서 한층 절절하게 와닿는 비유이기도 하다. 상류 계급의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하위 계급의 참상을 무시하는 것을 넘어, 아예 잘라내는 비정한 모습이 이 세계에서 ‘질서’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한다고 해서 둔화되는 엔진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그저 잘려나간 칸 바로 앞 칸이 새로운 꼬리칸이 되어, 그렇게 하나씩 잘려나갈 위험에 처할 따름이다.

첫 번째 이야기의 서늘하게 후비는 풍자에 비하면, 2권에 해당되는 ‘선발대’와 3권의 내용인 ‘횡단’은 좀 더 직선적인 모험서사극의 모습을 지닌다. ‘선발대’에서는 2호 설국열차가 등장하는데, 이 열차가 사실은 우주 그 자체라고 설파하는 우주교라는 종교가 있다. 이곳의 승객들은 1호 설국열차와 언젠가 충돌할 것이라는 막연한 공포 속에 살고 있으며, 열차가 잠시 정차하는 동안 인류문명의 파편을 수집하는 ‘선발대’가 활동한다. 그리고 여러 사건 속에 우주교가 반란을 일으키고, 좌절한다. ‘횡단’은 영원히 어디론가 목적 없이 달릴 것 같았던 설국열차에 무전신호가 들어와서, 결국 그 신호가 오는 곳이 인류가 살아남은 곳이리라 판단하고 대서양을 횡단해 그곳까지 가고자 한다. 온갖 희생 끝에 도달한 그곳은 그러나, 그저 무인 라디오 중계시설일 뿐이었다.

계급 같은 노골적 구도는 아무래도 덜하지만, 이 역시 다른 사회(국가 등)이 행사할 것이라 믿는 위협을 자양분 삼아 움직이는 또다른 사회의 일면을 보여준다. 그 속에서 결국 믿음은 근거 없는 광신이 되고 감정의 에너지는 파멸적으로 분출될 따름이다. 그리고 종극에는 결국 어딘가 있을 것이라 확신을 얻은 이상향을 찾아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듯 달려가지만, 결과는 허무할 따름이다.

활극의 즐거움보다는 우화의 묵직함이 작품 내내 강조되는데, 차분하게 가라앉은 흑백의 그림과 개별 캐릭터의 섬세한 정서보다는 기차 속 세계의 모습을 한발짝 뒤에서 관망하는 구도 등이 그런 효과를 살려주고 있다. 사건들은 결코 떠들썩하게 연출되지 않고, 설국열차라는 세계의 다음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계기로서 제시될 따름이다(어떤 면에서 마치 기차여행과도 비슷하다). 도전이 있는 여행의 과정에서 성장을 겪는 식의 로드무비 구성이 아닌, 늘 살아오고 있었는데도 전모를 알 수 없었던 세상을 조금씩 발견해나가는 탐험의 방식을 따라간다. 이런 요소는 박진감 넘치는 재미와는 거리가 있지만, 우화적 상상력을 즐기는 것 자체에는 오히려 방해 요소가 제거된 듯한 느낌을 준다.

[설국열차]는 어떤 교훈적 메시지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이런 식으로 눈 먼 상태에서 온 사회가 계속 달리다 보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라는 허망한 현실을 넌지시 던져주는 작품이다. 직면하게 된 커다란 문제 앞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궁리하기를 그만두는 자들에게, 달콤한 세상이라는 열매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설국열차
자크 로브.뱅자맹 르그랑 글, 장 마르크 로셰트 그림, 이세진 옮김/세미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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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 영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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