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가 물에 잠겨가도 계속되는 것 – 『수혹성연대기』[기획회의 258호]

!@#… 스피릿오브원더 완전판(북클럽 해적판 말고)을 제대로 내줄 용자는 어디 없을까.

 

지구가 물에 잠겨가도 계속되는 것 – 『수혹성연대기』

김낙호(만화연구가)

사실, 인간이란 보기보다 적응력이 뛰어나다. 자신들이 처한 매우 억압적인 상황이 제도적이든(예: 신병훈련소, 감옥, 한국의 고등학교) 물리적이든(예: 극단적 자연환경, 전쟁의 폐허), 바로 코 앞에 죽음이 다가온 생명의 재난만 아니라면 어떻게든 주어진 제한된 조건 속에서 나름의 기술적 생존방식과 나아가 사회질서도 만들어낸다. 특히 그 상태가 일정 기간 이상 장기적으로 지속되리라는 예상을 하게 되면 심지어 소위 “인간적 감정”의 일상들도 영위하기 시작한다. 우정과 신뢰, 그리움과 설레임, 남녀 간의 사랑 같은 것 말이다. 아마도 흔히 우리가 ‘멸망’이라고 상상하곤 하는 전지구적 환경변화가 닥쳤다 할지라도, 그럭저럭 느리게 진행되어주기만 한다면 결국 사람들의 이런저런 흔한 감성적 인생사로 가득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수혹성연대기』(오오이시 마사루 / 대원CI / 2권 발매중)은 원래도 물이 많은 별인 지구가, 온난화로 더욱 물에 잠긴 미래를 무대로 하는 작품이다. 어느 정도 기술은 발달하였기에 로켓 없이도 우주로 나갈 수 있는 궤도 엘레베이터도 만들어졌고 달 표면에 사람들이 몇몇 정착하기도 한 시대지만, 본격적으로 인류가 지구를 벗어나 우주 콜로니에 살아가는 정도는 아니다. 환경변화로 인해 아마도 여러 국가들은 멸망에 준하는 쇠퇴를 겪었을테지만, 전체적인 세계 정세나 사회구조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물론 크고 작은 변화가 없지야 않겠지만, 적어도 사막화된 벌판을 펑크머리 폭주족들이 질주하고 가죽점퍼 차림의 근육질 히어로들이 개인의 우월한 폭력으로 헐벗은 인민을 구제하는 그런 멸망의 풍경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냥 지구는 매우 물이 많아졌고, 우주는 점점 일상공간으로 연결되며, 사람들은 조금은 다른 그 풍경 속에서 별 다를 것 없이 연애를 한다.

『수혹성연대기』는 거창한 SF대하서사극의 느낌을 주는 제목과 달리, 미래 어느 시점을 오늘로 삼아 살아가며 그저 사람들 사이의 감정을 나누는 평범한 사람들의 에피소드다. 궤도 엘리베이터의 정지위성 궤도라는 무중력 공간에서 근무하는 어떤 여주인공의 사연은 오늘날 사막 한복판 건설현장에서 근무하는 노동자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 없는 평온한 일상과 원거리 연애의 이야기가 되며, 천문학에 관심 많은 소년과 전교 1등 소녀의 연애담은 우주적 스케일이 더 커지고 구체적이 되었을 뿐 오늘날 여느 고등학교의 풋풋한 동아리 러브스토리라고 해도 위화감이 없다. 어떤 세상이 되었든지 간에, 남녀간의 소소한 사랑의 마음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여전할 것이라는 긍정적인 따뜻함이 모든 에피소드들을 지배한다. 덕분에 이 작품은 하염없이 따뜻하다. 연애를 주된 테마로 다루되 드라마틱한 치정극은 사실상 철저하게 배제하고, 사랑하는 마음 그 자체를 핵심에 놓고 있다. 물론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 꽤 대범한 기술들을 만들고 우주에서 돌아오는 등 드라마틱한 행동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사건이 주는 쾌감보다는 마음이 만들어내는 따스함이 항상 우선순위에 놓인다.

작품의 형식은 독립된 단편 에피소드들이 연작으로 묶이는 식이다. 그런데 각 단편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다른 에피소드에 얼굴을 내밀기도 하고, 가끔 이전 단편의 후속편이 또다른 단편으로 등장하기도 하는 등 자유로운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든 작품을 관통하는 공통점은 같은 세계의 공간, 시간, 그리고 연애 분위기다. 그리고 하나쯤 추가하자면, 각 에피소드의 여주인공은 거의 예외 없이 소위 ‘누님’ 분위기의 성숙하고 다부진 여성이라는 점이다. 덕분에 철없는 귀여움으로 점철된 낭만의 환상보다는 대등한 인간들 사이의 섬세한 감정에 집중하는 효과를 더욱 강화시킨다(실제로는 작가의 여성 취향이 강하게 반영된 것에 불과한 경우라고 할지라도). 덕분에 꽤 여러 가지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작품으로서 일관된 통일성과 구심력을 놓치지 않는 편이다. 따뜻한 분위기를 더욱 강조하는 부드러운 선의 스케치풍 그림 역시 적절하게 쓰이고 있다. 작가의 전작인 『물빛러브』가 전형적인 주류 소년만화 러브코미디풍의 그림체를 구사했음을 생각하면, 작품의 성격에 맞추어 필체를 이 정도까지 바꿔낸 것은 꽤 대단한 일이다. 여성 주인공들의 몸매를 은근히 육감적으로 만들어 놓거나 간혹 한번씩 등장하는 노출신 등이 작가의 출신 장르의 흔적으로 남아있지만 말이다.

물론 좋은 작품의 유일한 평가 기준이 독창성이었더라면, 굳이 주목할 이유가 급격히 줄어드는 작품이기는 하다. SF 소재에 대한 접근방식이나 그림체, 옴니버스식 에피소드 구성 등에 있어서 츠루타 켄지의 명작 『스피릿 오브 원더』를 떠올리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혹은 수몰로 인한 종말기를 사람들의 일상사가 그대로 있는 고즈넉한 모습으로 풀어내는 접근법은 『카페 알파』의 직계 후손이라는 느낌을 준다. 몇몇 대목은 단순히 강한 영향력을 넘어 직접적 오마주로 보일 정도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사람들의 연애사가 핵심에 놓인다는 점에 있어서, 발랄한 낙천성으로 꿈을 꾸는 사람들을 찬미하는 『스피릿 오브 원더』, 포근한 관조로 저물어가는 풍경을 바라보는 『카페 알파』와 초점을 달리 한다. 결국 다른 모든 것을 떠나서, 초여름의 분위기를 담아내지만 가을에 어울릴 법한 본격 연애물인 것이다. 어떤 환경과 분위기든, 사람들은 연애를 하리라고 긍정적으로 믿는 분위기만큼은 이 작품의 직접적 선조에 해당할 다른 어떤 작품보다 굳건하다.

한국어판의 경우 일본식 조어로 만들어진 원제를 그대로 가져오는 바람에 뉘앙스가 다소 이상해진 감이 있다. 물의 행성, 혹은 물의 별 연대기 정도로 옮겼으면 작품의 감성적 분위기와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따른다. 또한 표지 역시 원래 표지그림의 여주인공의 모습을 지우고 모호한 풍경 그림만을 남겨놓아, 소소한 연애담이라는 느낌을 전혀 전달해주지 않고 있다. 평범한 소년층 대상 러브코미디로 오해받고 싶지 않다는 의도는 충분히 알 수 있겠지만, 거창한 제목과 결합될 때 오히려 SF 대사서사물이라는 다른 의미에서 엉뚱한 방향의 오해를 사게 된다는 점을 좀 더 염두에 두었으면 어땠을까.

『수혹성연대기』의 세계처럼 미래에 지구가 물에 잠겨가도, 생활공간이 우주로 확장되어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한 소소한 연애사들이 결국 가장 중요한 일상으로 지속된다. 아니, 그렇게 되리라 믿는 것이야 말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더 행복하기 위한 근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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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수혹성 연대기 1
오히시 마사루 지음/대원씨아이(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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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thoughts on “지구가 물에 잠겨가도 계속되는 것 – 『수혹성연대기』[기획회의 25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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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개인적으로는 까페알파+2001년 밤 이야기정도 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음 작가의 데뷔작을 생각해보면 딱히 누님 취향이라고는…..(물빛러브가 좀 두드러지긴 했지만요.)

  2. 정말 하소연이라도, 어디 고래고래 소리라도 지르고 싶군요.. 어여 캡콜드님의 캡콜드가 필요합니다..
    미디어법 발표 순간 공허, 허탈 -> 욕지기 -> 허탈로 가고 있습니다.

  3. !@#… 정말님/ 안그래도 황당착잡한 심정으로 한마디 적고 있었는데, 한끝차이로 이쪽에 리플하셨군요 OT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