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관한 만화들 [도서관저널 1301-02]

!@#… 신년합본호 칼럼으로 죽음을 소재로 내용을 풀어가는 것도 참 악취미인 듯.

 

죽음에 관한 만화들

김낙호(만화연구가)

인류 문명 보편적으로 생명의 소중함에 관한 인식이 공유되는 것의 반대편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유전 형질을 이어가기 위해 가급적이면 살아서 활동하는 쪽을 찾도록 프로그램된 것이 생명이라는 현상이다보니, 그런 것을 정지당하는 죽음이라는 상태는 지극히 불편한 무엇이다. 가족이든 더 큰 단위의 무엇이든, 사회적 공동체에서 함께 하는 타인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타인의 죽음은 우선 그 사람의 모든 것이 정지한다는 측면에서 정서적 슬픔과 이성적 애도를 낳으며, 자신이 죽을 수 있음을 상기시킴으로써 여러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렇듯 죽음은 개인 뿐만 아니라 사회적 삶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사안이고, 그것을 어떻게 다루는지가 살아있는 자들이 만드는 문화의 성숙함의 잣대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다. 억압받은 계층에 소속된 이의 절망에 찬 죽음을 사회의 물질적 풍요를 위해 어쩔 수 없는 것 취급하는 천박한 사회도 있고, 죽음으로부터 늘 교훈을 찾으며 더 나은 삶을 위한 조건을 고민하게 만드는 좀 더 품격 있는 사회도 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죽음은 어떤 식으로든 살아있는 자들에게 어떤 교훈을 상기시켜줄만큼 커다란 소재라는 점이다.

그런데 실제 죽음은 거리감을 두고 여러 교훈을 생각해보기에는 정서적 충격이 만만치 않으니, 가상의 상상력을 발휘하는 작품들을 보며 그 대신 느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싶다. 죽음이 남기는 교훈에 관해 이야기하는 만화들을 한번 펼쳐보면 어떨까.

받아들이는 것

죽음을 받아들이고 ‘승천’한다는 것은, 그간 관계의 성찰이다. [아버지 돌아오다](최덕규)는 한 노년의 아버지가 막 오랜 투병 끝에 수명을 다하고 혼이 되어, 자신의 장례 절차를 바라보며 죽음을 받아들이고 승천하기까지의 이야기다. 승천하기 전, 살아 있는 이들이 그의 죽음에 대처하는 모습을 보며 그간 모든 인간 관계를 성찰하게 된다. 그저 사위만이 그 혼백을 볼 수 있지만, 대화는 할 수 없다. 고인은 세상을, 사위는 고인을 지켜보며, 그저 원래 해야하는 성찰과 정리를 할 따름이다. 회상으로 투병과정에서 가족이 겪어온 일들, 감정의 흐름들이 담담하게 흘러가고, 결국 모든 감정과 고생과 후회를 되새긴 후 장례식이 끝나며 살아있는 사람들은 그 다음을 살아가게 된다.

삶에 대한 반추라는 방향에서 좀 더 극적으로 다가가는 방식으로, 아직 단행본으로 출간되지 않았으나 웹툰 연재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작품인 [죽음에 관하여](시니, 혀노)가 있다. 이야기는 에피소드 구조로 되어 있는데, 막 죽은 사람이 평범한 아저씨의 모습을 한 신이 저승으로 데려가기 전에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는 내용이다. 어처구니 없는 죽음도 있고, 자신이 죽은지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선한 피해자로 스스로를 인식하다가, 죽고 나서야 자신의 악을 깨닫는 경우도 있다. 먼저 간 사람이 나중에 올 사람을 꾸준히 기다리는 경우도 있다. 다만 이 작품에서는 어떤 죽음이라도, 결국 저승길 앞에서 자신의 삶의 일면을 결국 깨닫게 된다. 이 작품에서 다루는 사후세계는 이렇듯 깨달음의 중간 공간이고, 그 뒤 어디로 어떻게 가는지는 열린 상상력에 맡긴다.

그런데 죽음이 단순히 끝이 아니라, 그 너머에도 계속 무언가가 이어진다는 것은 수많은 신화에서 반복되는 이야기다. 그것이 생명의 연속성에 대한 집합무의식인지, 그저 죽음의 공포로부터의 회피인지는 다른 논의의 장에서 다툴 일이고, 한가지 흔하게 드러나는 공통점은 바로 삶에 대한 심판이다. 죽은 직후, 사자는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한 댓가를 치룬다. 심장과 깃털을 저울에 놓고 재든, 그간 쌓인 업의 양에 따라서 곧바로 분류가 되든 말이다. 불공평하고 억울하기 짝이 없는 현세와 달리, 죽은 후 가는 세상에서는 그간 삶에서 행한 일들에 대한 인과응보가 일어나서 뒤늦게나마 나쁜 짓은 벌 받고 좋은 짓은 상을 받는다.

하지만 그런 해소의 쾌감을 바란다고 해도, 현세가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기에 그 평가의 과정 또한 결코 간단할 수는 없다. [신과 함께: 저승편](주호민)은 한국 전통신화와 불교적 세계관에서 이야기하는 망자가 49제동안 겪는 평가의 과정을 현대적 모습과 적절한 유머감각으로 결합하며 큰 인기를 끈 작품이다. 과로로 사망한 샐러리맨 김자홍씨는 크게 드러내고 착하지도, 대단히 잘못하면서 살지도 않은 평범하고 굴곡 없이 살다 간 사람이다. 그런 그를 여러 지옥의 엄중한 심사관들로부터 방어해내서 결국 환생의 길로 이끌어야 하는 것이 바로 저승의 변호사다. 그런데 대단히 착한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니기에 국선변호사가 붙는데, 의외의 실력으로 상황을 해쳐나간다. 그 과정에서 하나씩 우리 모두가 일상적으로 현대사회에서 일상적으로 저지르는 죄들을 독자들과 함께 반추하며, 그저 하나의 상상된 이야기임에도 “착하게 살아야겠다”는 감동을 남긴다.

죽음을 통제하기

죽음에 대한 공포에 대한 반대급부의 상상력이 만들어내는 방향 가운데 하나는, 죽음을 통제하는 것이다. 죽음을 조절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가장 궁극적인 공포에 대한 통제력을 가진, 그야말로 신에 가까운 존재가 되는 셈이기 때문이다(실제로 많은 신화들에서 신들의 기본 속성이 바로 죽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살인범을 다루는 모든 만화를 죽음을 소재로 한다고 칭하는 것은 곤란하고, 살인의 기술이 아니라 죽음 그 자체를 가져올 수 있는 정도는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00년대 후반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끈 [데스노트](오바타 타케시, 오오바 쓰구미)를 한번 다시 펼쳐볼 가치가 있다.

이 작품의 핵심 소재는 상대방의 이름을 적으면 사망하게 되는 공책인데, 염라대왕의 살생부라는 전통적 판타지의 현대적 재해석이다. 어떤 상대에게든 흔적 없이 죽음을 부여할 수 있는 권력을 확보했을 때, 무엇을 할 것인가. 이야기의 주인공인 천재소년 라이토는, 죽음의 공포를 매개로 하는 권선징악의 정의로운 세계를 만들어 그런 곳을 가능하게 하는 신적 존재가 되고자 한다. 그런데 그것을 위해 처음에는 흉악범들을 제거하지만 갈수록 자신의 의지에 위해가 되는 모든 이들에게 죽음을 내리기 시작한다. 죽음이라는 힘 역시 여느 힘과 마찬가지로, 절대적이 될수록 부패를 낳고 만 것이다.

타인에게 죽음을 가져다주는 능력 만큼이나, 자신에게 올 죽음을 막는 능력도 오랜 상상력의 소재다. 삼라만상의 가장 중요한 개념들을 영원한 존재라는 범주로 인격화시켜서, 각종 신화와 대중문화의 상상력을 한데 버무린 걸작 [샌드맨](닐 게이먼, 데이브 맥킨 외)에 등장하는 여러 에피소드 가운데 포함된 연작 스토리 하나가 그 내용을 적절하게 다뤄내고 있다. 중세 유럽의 청년 홉 개들링은, 한 술집에서 자신이 죽지 않는다면 영원히 후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고 공언한다. 때마침 그곳에는 ‘꿈’이라는 개념이 인격화된 존재인 모피어스와 그의 누나인 ‘죽음’이 인간세상을 거닐고 있었는데, 홉의 이야기에 흥미가 동한 모피어스가 그와 술을 나누며, 누나로 하여금 그를 절대 데려가지 말도록 이야기한다. 그 후 수백년 동안 홉은 실제로 늙지도 죽지도 않으며 계속 살아간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한번씩, 모피어스와 만나서 아직도 삶을 후회하지 않는지 맥주 한 잔에 이야기를 나누며 다음 만남을 기약할 따름이다.

모피어스는 크나큰 절망의 순간마다 이제는 영생을 후회하지 않는지 묻지만, 그래도 홉은 아직 살 만하다고 공언한다. 그리고 어느덧 모피어스, 즉 ‘꿈’과 평생의 친구가 되어 있다. 꿈과 함께 하는 한, 아직 죽음을 맞이하지 않을 의미가 있는 셈이다. 상상된 이야기처럼 영생을 누리는 것은 아닐지라도, 현실에서 역시 죽음의 품격을 통제하는 것은 결국 부패하는 생사여탈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자신의 자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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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학교도서관저널. 특정 컨셉 아래 청소년들에게 추천하는 책들을 묶는 내용으로, 만화를 진득하게 즐기는 것의 즐거움과 세상사에 대한 관심을 적당히 배합해보자는 취지.)

Copyleft 2013 by capcold. 이동자유/수정불가/영리불가 —    [부디 이것까지 같이 퍼가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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