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 합체, 절대적 힘, 선택의 문제 [팝툰 11호]

!@#… 팝툰에서 부천판타스틱차 방한했던 나가이 고 특집. 인터뷰 들어가고, 다카이 오사무라는 일본 필자의 정신분석적 접근, 작품세계 소개 등이 있다. 그런데 역시 그 분의 분석은 좀 난이도가 있는지라, 좀 더 친절한 이야기를 한 꼭지 넣도록 임무 부여. 별호가 ‘친절’인 capcold 출동.

변신, 합체, 절대적 힘, 선택의 문제

김낙호(만화연구가)

나가이 고 만화의 매력은, 마징가제트라는 거대로봇에 대한 향수로 그칠 만한 것이 아니다. 일본만화에서 나가이 고라는 작가는 선악의 경계를 무너트리고, 성장이라는 소년만화적 모티브를 완전히 새로운 경지로 이끌며 로봇물의 주제의식과 초인 전투의 컨셉을 근본부터 뒤바꿔 놓은 괴인이다.

그의 작품세계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등장하는 주제는 절대적인 힘이다. 사실 원래부터 많은 오락작품들이 결국 힘에 대한 것이지만, 나가이 고가 이야기하는 힘은 성과 폭력의 형태로 발현되는 원초적이고 절대적인 무력이다. 이러한 절대적 힘 앞에는 선악의 구분 따위는 의미 없다. 그래서 마치 악으로 악을 때려잡는 것처럼 보여도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가이 고의 만화를 아동용 TV애니메이션으로 만든 버전에서는 항상 크게 바뀌곤 하는 부분이 바로 박애정신 넘치는 정의의 주인공이라는 개념의 도입이다.

주인공들이 힘을 확보하는 방법은 변신과 합체다. 이것은 결국 성장의 이미지로, 나츠메 후사노스케 등 일본의 만화평론가들이 원래 말했듯 일본에서 소년만화 일반의 원형적 주제이기도 하다. 데빌맨의 주인공은 초월적 생물로 변신한다. 데빌 종족들은 다른 개체들과 융합을 하면서 능력을 얻는다. 마징가는 주인공이 머리에 합체하고, 날개와 합체하여 자기 능력의 연장이 된다. 나가이 고가 이야기하는 변신과 합체는 지극히 급격한 힘의 업그레이드다. 노력을 해서 하나씩 얻어나가는 수련의 힘이라기보다, 갑자기 주어진 거대한 힘, 또는 처음부터 그냥 있던 힘이다.

그 엄청난 힘은 필연적으로 선택을 강요한다. 마징가 제트에서 말하듯, “신이 될지 악마가 될지는 지 맘대로”인 것이다. 그런데 그의 힘은 도구라기보다는 주인공의 정체성 그 자체다. 예를 들어 이전 세대에서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철인28호’에서도 철인은 리모콘의 소유주에 따라서 악의 도구로 오용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나쁜 자의 잘못이지 주인공이나 철인의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나가이 고 만화에서는 주인공 자신이 바로 악이 될 수도, 선이 될 수도 있다. 주어진 힘은 온전히 그의 것이며, 선택 역시 직접 내려야 한다.

그런데 선택은 무척이나 어렵고, 과정에서 많은 고통이 뒤따른다. 바로 여기에서 나가이 고라는 작가의 가장 큰 특기가 나오는데, 바로 주인공에게 가장 효과적이고 잔인하게 끝없는 고통을 주는 것. 그냥 나쁜 놈은 나쁘고, 고통을 견디며 정의를 위해 싸우면 훌륭한 사람이라는 식의 교훈을 완전히 벗어나는 세계관이 매력이다. 주인공은 끝없이 자신이 보호하고자 하는 이들에게까지도 고통을 당하며, 심지어는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도 계속 보게 된다. 그렇다면 오히려 그 거대한 힘을 멸망의 방향으로 사용하는 것이 정당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을 선택하는 것이라면, 선의 기준은 무엇이고 어떤 가치가 있는가. 그 뒤에 하는 선택이란 무엇인가. 혹은 악을 택해도 상관없지 않을까. 주인공에게 고통을 준 세상이 그 죄과로 인하여 멸망하는 것도 나름대로 강력한 카타르시스다. 정의에 어긋나는, 궁극의 정의일수도 있다. 그만큼 선악의 선택이란 주관적이고, 복합적이다. 이러한 선악의 선택, 고통의 부여는 작가 자신이 사회와 싸우는 자세이기도 한데, ‘ 파렴치학원’ 연재에 들어온 학부모단체의 항의에 대응하여, 아예 위악적으로 작품 속을 완벽한 지옥도를 만들어버린 사례는 워낙 유명하다.

나가이 고는 일반적인 의미의 권선징악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굳이 그런 것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의 괴로움 자체에 대해서 집중할 따름이다. 극단적인 상상력과 폭력적 묘사 속에 담겨있는 그 리얼한 처절함이 바로 이 작가를 대가의 경지로 끌어올려주는 요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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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thoughts on “변신, 합체, 절대적 힘, 선택의 문제 [팝툰 11호]

Comments


  1. 나츠메 후사노스케?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싶어서 책장을 뒤져 보니, ‘망가 세계 전략’이라는 책이 구석 한 켠에서 조용히 잠들어 있더군요. 아니, 그런데 번역자 명단 중에 capcold님의 존함이! 아무도 모르는 사이 생활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계셨군요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