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답지않게 꽤 자의적인 감상이기는 하지만, 하기야 워낙 주관적으로 보지 않기 힘든 작품이니까.
성장을 인정하는 순간 – 『바이바이 베스파』
김낙호(만화연구가)
베스파는 스쿠터의 기종 가운데 하나로, 꽤 올망졸망 귀여운 종류다. 그런데 스쿠터는 상당히 어중간한 탈것이다. 자전거보다는 좀 더 본격적으로 이동거리를 늘려주고, 그렇다고 오토바이처럼 아예 질주할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스쿠터로 도심 질주를 하는 동네 중국집 배달원들 같은 특수한 사례들은 논외로 치자). 게다가 탑승도 그렇다. 좁게 앉아서 한 명 정도 더 태울 수 있을텐데, 그것도 밀착 정도가 심지어 오토바이보다 더 좁기 때문에 웬만한 사이가 아니라면 좀 민망해지기 십상이다. 만약 본격적으로 누군가와 함께하게 된다면, 혹은 무언가를 짊어지고 돌아다녀야 한다면 스쿠터는 곤란하다. 그런데 결국 사람은 더 이동거리가 늘어나고,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더 데리고 다니게 된다. 그럴 때 스쿠터는 ‘졸업’할 수밖에 없게 된다. 나름대로 자유롭게 달리는 것을 꿈꾸지만 과장되지 않은 섬세한 삶의 방식으로 선택했던 스쿠터는 계속 함께 할 수 없는, 한시적인 것이 된다. 스쿠터는 소년시절을 닮았다.
『바이바이 베스파』(박형동/ 애니북스)는 스쿠터를 매개로 한, 성장에 대한 짧은 이야기들의 모음이다. 비록 한 때 요술공주 밍키였던 여인의 성장을 다룬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감성적인 소년의 시각에서 성장을 다루고 있다. 한 때는 좀 더 로맨스에 빠지는 것 같아 보이면서도 훨씬 빠르고 능동적으로 현실의 냉엄함에 적응하곤 하는 소녀들의 성장과 달리, 또는 힘을 과시하며 경쟁하고 승리로서 성장을 이야기하는 활기찬 소년들과도 달리, 감성적 소년들은 끝없이 아쉬워하고 돌아본다. 이 단편집의 작품들을 지배하는 것은 성장의 과정에서 오는 아픔이 아니다. 사실은 이미 성장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고 마지막 여운을 느끼고 싶은 정서다. 아마도 그 여운이 끝날 때, 혹은 그 여운을 끝까지 즐길 수 없다는 것을 납득할 때 성장이 완결될 것이다. 마치 자명종은 울리지만 단잠에서 깨어나고 싶어 하지 않는 아침의 풍경처럼, 스쿠터를 타고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일 여행을 다닌다.
나름대로 연인이 되어 여관에서 첫날밤을 보내는 톰과 제리의 이야기가 있다. 현실은 그 곳에 있고, 명랑함보다 아릿한 기억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난관을 극복하고 업그레이드를 이룩하는 통과의례라기보다, 이미 현실적 관계에 대해서 알고 있는 두 사람이 그것을 확인하는 절차일 뿐이다. 자신을 요술공주 밍키라고 소개하는 여인의 이야기가 있다. 주인공 청년이 바라보는 그 여인은 사실은 보기보다 더 오래되었지만, 소녀의 역할을 계속 강요받았던 자신의 과거 때문에 아직 그 다음 단계의 성장을 밟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던 소녀성을 온전히 받아들인 후, 비로소 자신의 실체에 걸맞는 성장을 한다. 그리고 남자주인공, 아마도 어릴 적 요술공주 밍키의 모험을 보아온 적이 있었을 그는 그런 밍키를 즐겁게 받아들인다. 이 작품집의 표제작이자, 많은 당대의 육체적 또는 정신적 소년들에게 강력한 기억으로 남았던 12페이지짜리 단편 ‘바이바이 베스파’는 더욱 이런 정서를 농축해낸다. 오래된 유원지의 미키를 만나러 온 소년은, 자신이 이제 베스파를 버릴 것임을 이야기해준다. 이제 끈을 놓고, 어른이 되겠다는 것. 어쩔 수 없지만, 그것은 그렇게 대단히 슬픈 것도 아픈 것도 아니다. 그저 아쉬울 뿐. 그리고 이 아쉬움을 간직하며 어른이 될 수 있기를 살짝 바랄 뿐이다. 미련을 놓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결심할 때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이미 어른이 되어 있다는 것을. 베스파를 타고 마지막으로 유년의 추억에, 청소년의 꿈에 작별을 고하는 것은 일종의 확인 작업에 불과하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이 작품들이 이야기하는 성장이다.
이런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쉽지 않다. 자칫하면 감정의 과잉에 빠지거나, 공감보다 객관화를 시키는 시니컬함의 길로 떨어지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는 현실과 환상의 모호한 경계를 끌어오되, 그 모호함을 소년기의 아이콘들로 채운다. 여관의 연인들은 톰과 제리가 되고, 베스파 소년을 맞이하는 친구는 미키마우스이며, 신비한 여인은 밍키다. 덕분에 때로는 차가운 현실, 때로는 꿈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항상 동시에 펼쳐진다. 나아가 뾰족한 선으로 거칠지 않은 둥근 형상을 만들어내는 필체, 오래 동안 서로 알고 지내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듯한 함축적 대사, 극적이지 않은 느린 템포를 만들어내는 칸 연출 등 만만치 않은 연출력을 자랑하고 있다. 꿈 많은 소년의 습작 같은 감수성을 표방한다고 착각하기 쉽겠지만, 그것을 제대로 뒷받침하는 것은 장인의 솜씨다.
박형동 작가는 90년대 후반에는 주로 전위적 성향의 작품으로 알려진 바 있다. 성인순정만화 잡지 『나인』에 간간히 연재한 『천사의 쪽지』시리즈라든지, 인디 만화잡지 『히스테리』의 『멸공소년 새돌이』같은 부조리하며 과격하고 유머러스한 이야기 말이다. 동시에 다른 쪽으로는 애니메이션 『바리공주』 제작팀에서 디자인을 하며 선보인 유려한 서정적 그림들, 그리고 어쩌다가 한번 씩 선보이는 깜짝 놀랄 만큼 서정적인 작품들이 있었다. 그런 다방면의 종잡을 수 없는 분방함으로 여겨지던 작가가, 언젠가부터 주로 성장을 모티브로 하는 소설의 커버 일러스트레이터로 부각되고 띄엄띄엄 발표하는 단편들 역시 서정적인 성장물로 집중되었다. 마치 기타와 베스파를 버리고 어른이 되기로 한 그 주인공 소년 같은 느낌이랄까. 세상과 타협해서 모든 것을 갑자기 버렸다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특정 관심사와 성향에 맞추어 숙련되어가는 과정을 마치 결국 인정하고 몰입하기로 한 듯한 느낌이다. 다만 그 성장의 결과는 『바이바이베스파』단편의 청명하지만 막막한 길이라기보다는 『밍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소녀』 단편의 좀 더 모든 것을 납득한 듯한 길에 가깝다.
여하튼 2002년 비교적 마이너한 성향의 잡지에서 발표된 한 편의 짧은 단편에 대한 기억이, 6년 후에 책으로 나와 그 때 감동하고 그간 성장했을 독자들에게 다시 선보였다. 『바이바이 베스파』는 소년 시절의 추억에 잠기게 만들거나 성장의 아픔을 곱씹는 만화가 아니다. 어쩌면 지금도 무언가 자신이 또 한 단계 더 멀리 간 것을 이미 알고 있지만 아직 미련과 아쉬움, 그 아련함에 머뭇거리는 자신을 돌아보는 마음을 위한 만화다. 만약 그 감성적 소년의 씨앗이 마음 속에 있다면, 한번쯤 펼쳐볼만한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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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바이바이 베스파 박형동 지음/애니북스 |
— Copyleft 2008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2002 년 이후 언제나 한국만화계를 바라보는 저의 시선 한켠에는 ‘박형동은 지금 어디서 뭘 또 그렸을까’ 라는 의문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가장 마지막의 기억으로, 보사노바를 테마로 그린 경쾌한 채색만화를 본 뒤로 다시 만화는 그리지 않고 있다는 소식에 잠시 탄식하였고 그리고 여러해가 또 지나서 나온 ‘바이 바이 베스파 단편집’을 봤을때 참 반가웠죠.
책을 집어들기전에는 ‘바이 바이 베스파를 능가하는 단편이 또 있을까. 보사노바 다이어리가 들어가 있으면 좋을텐데’ 하는 바람이 있었는데.
막상 책을 뜯고 보니, 베스파를 비롯한 스쿠터를 활용 제대로 구성한 기획력있는 앨범..아니 단편집이었구요. 자다가 일어난다는 스토리의 딱 한편을 제외하곤 베스파 못지 않은 스토리와 그림연출 그리고 카타르시스가 있어서 참 다행이었습니다. 밍키는 정말 훌륭했어요…
평에 동감합니다. 이건 장인의 솜씨
!@#… nomodem님/ 하지만 정사에 따르면, 밍키는 성장해서 네오지온의 총수가 되었다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