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 한국만화사의 숨겨진 대가를 찾아서[무크지 ‘거짓말’ / 0709]

!@#… 작년 하반기에 나왔던 만화 무크지 ‘거짓말’에 실린 글. 원래는 한국만화판 ‘포가튼 실버‘ 혹은 ‘스파이널탭‘ 혹은 ‘무슈 페라이으‘같은 녀석을 목표로 하고 확 써버렸으나, 문제는 사이사이에 숨겨놓은 개그는 고사하고 한국만화의 역사에라도 조금이나마 관심이 있는 사람이 한 100명은 되려나… 결과적으로 도를 넘어서게 매니악한 물건이 되어버렸다. 대중적 개그의 장착이 무척 절실하다. -_-; 여튼 capcold가 추산하는 그 100여명에 자신이 포함된다 생각하는 분들에게는 스크롤의 압박을 선물로 드립니다.

 

발굴! 한국만화사의 숨겨진 대가를 찾아서

김낙호(만화연구가)

사실, 한국 만화의 역사는 파고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수수께끼로 가득하다. 다른 어느 나라의 만화계에서도 겪어보지 못한 다양한 변화의 과정과 세대간 분절이 넘쳐난다. 해방 후 잠깐 있었던 고급 양장본의 히트와 저렴한 대여문화의 좌판 떼기 만화가 공존했던 시절에서 만화방으로 갑자기 판도가 바뀌었고, 만화방의 융성 십 수년 만에 잡지나 신문이 새로운 주류로 들어서고, 만화방 자체도 장편 극화와 무협물 위주로 완전히 세대 교체되어버렸다. 여기에 90년대에 들어서면서 다시금 잡지판, 작가 세대가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이런 상시적 격변의 와중에서 한국의 만화사 연구는 항상 남겨진 자료의 부족에 시달렸다. 단편적인 구술에만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사료 수집 속에서, 중요한 작가들이 종종 현재 그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던 분들의 증언이 부족하다는 이유만으로 저평가 또는 아예 묻혀지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때로는 새로운 발견의 놀라움의 바탕이 되어주기도 한다. 청공만화문화연구소에서 몇 가지 제보를 바탕으로 지난 수년간 전국은 물론 미국, 일본 등을 찾아다닌 결과, 지금까지 알려진 한국만화사의 흐름을 하나로 관통하면서도 완전히 숨겨져 있던 역사적 발견을 하고 말았다. 한국만화의 배후의 스승, 진정한 아버지였던 김자설 화백을 이번에 재발굴하여 본 지면에 간략하게나마 소개하고자 한다.

김자설 화백 전설의 시작

증언에 의하면, 김자설 화백은 아직 십대였던 50년대 초에 좌판 떼기 만화를 통해서 데뷔했다고 한다. 다만 가정 사정 등 여러 문제로 인하여 본명을 사용할 수 없었는데, 최상권의 ‘헨델박사’를 공동 작업하고 여러 서부 모험극을 가명/차명으로 창작했다. 여기에서 얻은 인지도를 바탕으로 만화계의 유명한 실력 있는 작화 조수로 소문나서, 여러 양장판 만화에서 그의 필치를 발휘했다. 그 중에는 유감스럽게도 타국의 만화를 도용한 사례도 있었는데, 큰 히트를 기록한 ‘밀림의 왕자’가 대표적인 사례다.

김자설 화백은 한국전쟁 직후에는 미군 카투사 복무 경험을 바탕으로, 당시 황금기를 맞이하고 있던 미국만화의 다양한 표현기법을 소화해냈다. 특히 슈퍼히어로물의 기법을 차용함에 있어서 적극적이었는데, 평소 친분이 있던 김산호 화백에게 한국형 히어로를 창작해볼 것을 자주 제안하였다고 한다. 이는 ‘라이파이’라는 작품으로 결실을 맺었는데, 본인의 고사로 인하여 공동창작 명의표시가 제외되었다. 어째서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데뷔하지 않았는가 하는 수수께끼에 대한 대답은 명확하지 않지만, 김자설 화백의 단편적 노트를 보면 미국식의 4색 신문컬러인쇄가 불가능했던 한국 현실보다는 본격적인 미국진출을 동경하고 있음을 추론해볼 수 있었다.

만화방 시대와 이민

하지만 김자설 화백의 운명은 순탄하지 못했다. 미국 진출을 위한 여러 준비가 느려지는 와중에서, 그는 생계를 위해 계속 한국에서 배후의 만화작업을 해야 했다. 하지만 출판시장의 사정이 좋지 않은 50년대말의 시기라서, 그는 좀 더 안정적으로 적은 창작 에너지만으로 많은 만화 작업을 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했다. 그는 좌판의 떼기 만화와 책으로서의 만화 사이의 절충점을 찾고자, 일본의 ‘대본소’를 모방한 한국형 만화대여업소를 자신이 살던 동네에 세웠다. 원래는 그가 작업한 콜렉션을 보다 많은 독자들에게 제공하고 안정적 수입을 올리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 모델이 큰 인기를 끌며 전국으로 퍼졌다. 이 중 그에게 본격적으로 장사를 하자고 접근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후에 합동문화사의 사장이 되는 모 인사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지나친 대본소의 확장에 따른 만화 품질의 저하를 우려한 김자설 화백은 이를 거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본소는 호황을 이루고, 만화 제작이 작품의 품질보다는 원고의 양에 따라서 평가받는 분위기로 급변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서 양장판으로 고품질 원고를 선보였던 여러 작가들이 만화 일선에서 밀려나고, 좀 더 생산력 좋은 새로운 작가군이 그들을 대체했다. 대본소 문화를 탄생시킨 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생계를 여전히 걱정해야 했던 김자설 화백은 많은 품이 드는 극화체를 버리고 카툰적 느낌이 강하고 보다 과장되고 유머러스한 이야기를 강조하는 만화 장르를 도입했다. 이 와중에서 한창 발전을 시작하고 있던 일본만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는데, 특히 데즈카 오사무의 카툰적 그림의 영향이 강했다. 하지만 극화적 장편 이야기에 대한 미련 역시 버리지 못하여 주변의 젊은 작가지망생들을 모아놓고 자주 토로했다고 한다. 특히 권투라는 격투 스포츠를 주요 소재로 민족적 감정과 인간승리 드라마를 그려내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했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직접 그려내지 못하고 미국으로 그리던 이민을 가게 되었다. 대신 그 아이디어는 당시 막 데뷔를 했던 젊은 작가 박기정 선생이 이어받아 ‘도전자’의 모태가 되었다.

해외 생활

결국 60년대 초, 김자설 화백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그 곳에서 그는 막 새롭게 각광받기 시작했던 한 스토리작가와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다. 출판사를 방문했다가 성 때문에 한국계로 착각하고 반가운 마음에 약속을 잡았다가 실제로 만나보고는 유태계 미국인이어서 당황했다는 일화를 남긴 ‘스탠 리’(본명 스탠 리버맨)와의 만남이 그것이다. 새로운 것에 대한 모험심이 강했던 스탠 리와 김자설 화백은 금새 의기투합했고, 김자설 화백이 그간 모은 아이디어들을 같이 논의하곤 했다. 그는 곤충의 모습에서 권법을 창시한 소림사 무술의 개념을 참조하여, 벌레의 능력을 초능력으로 구사하는 초인에 대한 아이디어를 냈는데, 이는 스파이더맨이라는 만화 시리즈의 시발점이 되었다. 나아가 성리학의 이와 기 개념을 도입하여 폭력적인 이중자아를 가진 학자, 거북선에서 모티브를 얻어 강철로 자신을 특수한 장치가 되어 있는 초인적 강철 갑옷으로 감싼 청년, 중국의 십팔사략에 나오는 일화를 바탕으로 온갖 기이한 재능을 지닌 이들을 불러들여 대의를 위한 정예병으로 훈련시키는 이야기 등이 이 창작팀 속에서 교류되었다. 이는 팀워크 속에서 헐크, 아이언맨, 엑스멘 등의 결과로 이어졌고, 미국만화사의 새로운 전성기 ‘실버 에이지’를 장식했다.

그러나 폭포수 같은 아이디어를 구상하기 바빠서 정작 작화 활동을 못함에 불만을 느낀 김자설 화백은, 67년에 새로운 창작 동력을 찾아 일본으로 다시 이민을 갔다. 리얼리즘 극화운동과 주류 잡지의 부흥 속에서 성장을 거듭하던 일본 만화계의 활력이 매력적으로 보였던 것이었다. 그 곳에서 그는 작가주의 만화의 새로운 장으로 막 탄생한 ‘가로’의 극화운동에 처음에 큰 흥미를 느꼈으나 결국 그의 만화적 원류라고 할 수 있는 데즈카 오사무를 찾아갔다. 그리고 친분을 쌓은 후, 가로에 맞설만한 품질의 작가주의 만화잡지로 ‘콤’을 창간하도록 종용했다. 나아가 50년대에 처음 데즈카 오사무가 선을 보였던 ‘불새’ 시리즈를 본격적으로 이 잡지에 진행시키도록 제안했다. 나아가 출중한 실력을 가졌으나 배후에서만 활동해온 자신의 처지와 데즈카 오사무의 의사 경력을 합쳐서, 한 무면허 의사의 이야기를 공동 구상했다. 비록 원안과는 많이 달라졌지만, 이는 ‘블랙잭’이라는 창조물로 탄생하여 일본만화의 품격을 한 단계 높인 것으로 평가된다.

80년대의 풍파와 90년대의 도래

하지만 일본만화 역시 70년대를 보내면서 경직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콤’역시 성공을 지속시키지 못하고 금방 폐간되었다. 이런 와중에 김자설 화백은 그간 만화방 유통망을 독점하고 자신과 좋지 않은 인연이 있던 합동이 몰락한 후 다시금 활력을 되찾고 있는 한국으로 복귀할 것을 결심했다. 그는 만화방 시기 초창기에 이미 겪어본 대량 생산 체제의 약점을 보완하고 미국에서 겪은 체계적 작업관리 방법을 도입하여, 대형 공장제 만화 창작 방식을 시작했다. 문하생 개념으로 신인 지망생들을 도제 형식으로 받아들여 노동을 시켰으며, A팀과 B팀으로 나누어 다양한 수준의 작품을 동시 생산했다. 작가적 자존심은 브랜드화 및 A팀의 인기작들을 통해서 지키며, 양적인 공급을 통한 수익성은 B팀을 위시한 대량생산을 통해서 유지한 것이다. 이를 모방하여 다양한 작가들이 자신들만의 대형 프로덕션을 차려서 유사한 작업 방식을 도입하여 80년대의 주류 모델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참여한 개별 창작자보다 제작사를 중요시하는 미국식 분업 체제의 한국적 변용의 영향은 이야기의 원재료를 다듬는 스토리작가의 역할을 과소평가하게 만드는 폐단 역시 낳았다.

그러나 여전히, 김자설 화백은 운이 없었다. 큰 규모로 판을 열고 활동을 시작한지 약 1년여 만에, 신분을 숨긴 북한의 여성 남파 간첩과 남한 안기부 요원의 연애관계를 묘사했다는 이유로 인하여 국가보안법에 걸려서 작업장을 폐쇄당했다. 그 후 김자설 화백은 한 신문사에서 만화 전문잡지 창간을 시도했다. 그의 구상은 소년소녀 잡지에 만화부록이 붙는 당시의 상황을 뒤집어 전화번호부 두께의 만화 전문 잡지를 만드는 것이었는데, 소녀 취향 순정만화와 소년 취향 모험만화를 고루 배합하여 오락성과 독자층을 최대화하는 것이 목표였다. 보물 같은 만화를 가득 담았다는 의미에서 그는 잡지 제목으로 ‘보물선’을 제안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이 기획은 그의 국보법 전력 때문에 좌절되고 그 기획만 고스란히 다른 출판사로 넘어가서 약간의 변형 후 출간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러한 요인으로 인하여 만화를 접으려고 한 김자설 화백의 앞에, 87년 민주화 운동이 새로운 서광이 되어주었다. 민주화와 올림픽의 붐 등까지 겹치며 대중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지펴지고 있었으며, 미숙하나마 정권교체 속에서 국보법 전력 역시 다소 제약이 약해졌다. 이를 틈타 그는 청소년을 주요 타겟으로 하며 묘사와 오락성을 한층 강화한 잡지를 다시금 기획했다. 하지만 기본 모델은 일본이었으며, ‘소년점프’라는 일본잡지의 이름을 빌려 오고 아직 만화의 비교육성에 민감한 한국의 현실을 고려하여 ‘아이큐점프’라는 제목을 제안했다. 게다가 일본의 인기 만화를 직접 연재물에 포함시키자는 급진적 제안까지 하는 등, 한국만화의 판을 크게 바꾸고 싶다는 의지를 보였다. 하지만 정작 그의 기획이 잡지로 실현된 후, 그는 잡지에서 연재 지면을 얻지 못했다. 경쟁지와의 경쟁, 일본만화의 오락성에 익숙해진 독자층의 변화에 따라서 작가진 역시 완전히 새로운 세대로 물갈이되고 있던 것이다. 그 와중에서 이전 세대의 작가들은 새로운 취향에 적응하지 못하고 하나씩 떨어져갔다. 그런 시대에 원로급에 속하는 김자설 화백이 끼어들어갈 틈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90년대 중반 만화 시장의 급격한 확산 속에서도 많은 중견 이상 작가들이 잡지 연재에서 멀어져갔다.

하지만 또 다른 기회가 왔다. 90년대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일부 대학들을 중심으로 만화학과 창설 붐이 일어난 것이다. 비록 역사의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으나 업계인들에게는 이미 전설적 존재이기에, 김자설 화백에게는 거의 1순위로 교수직 제안이 들어왔다. 김 화백 역시 미국 생활 당시 작업을 하면서 틈틈이 한 명문 사립대에서 미술사학 석/박사 학위를 받아놓은 바 있다고 알려졌기에 더욱 메리트가 있었고, 그 결과 94년에 모 학교 만화학과에 임용되었다. 하지만 지나친 출세는 독이 된다고, 각광 속에 96년에 파격적으로 학장 선거에 출마했으나, 후보 검증 과정에서 미국에서 받은 학위가 전부 가짜였다는 점이 들통나버렸다. 작업만으로도 충분히 명성을 쌓았던 한 명사가, 학력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저지른 과오였던 것이다. 결국 학장 후보에서 밀려남은 물론, 교수직 자체에서 파면 당하게 되었지만, 사회적 물의를 염려하여 모든 과정은 학교 내부에서 조용히 처리되어 언론 지면을 타지 않았다.

폐인문화의 발명과 만화인생의 종극

이후, 김자설 화백은 자택에 은거하며 또다시 새로운 만화를 꿈꿨다. 종이 잡지에 연재하고 종이 책으로 묶여 나오는 만화판에서 밀려난 그가 선택한 새 방식이란, 바로 컴퓨터 화면으로 보는 만화였다. 당시 꽃피던 PC통신을 즐겨 사용하던 그는, 여기에서 오히려 수십년전 자신이 꿈꿔왔던 범세계적 감수성의 컬러 만화에 대한 가능성을 재발견했다. 그는 미국의 만화계 친구들을 통해서 만화의 온라인화에 대해 구상중이었던 만화가 겸 만화이론가 스콧 맥클라우드를 소개받아 교류를 즐겼다. 하지만 기존 종이만화의 문법을 최대한 그대로 가지고 오는 독서법이 중심이 되도록 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인터페이스를 실험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많은 토론 끝에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2000년대 초에 떠오르던 인터넷 게시판과 폐인문화의 만화 활용에 큰 관심을 기울이며, 여러 가명으로 폐인문화를 풍자하는 짧은 개그 만화들을 실험적으로 올렸다. 자신의 현재 삶의 모습을 바탕으로 하여, 라면으로 식생활을 때우고 대부분의 시간을 화면 앞에 보내며 시시한 농담따먹기로 소일하는 ‘폐인’ 개념을 정리한 것이다. 하지만 마우스 작업에 익숙하지 못했던 그의 작품들은 그다지 널리 퍼지지 않았고, 단지 일부 작가들이 그 천재적 발상을 알아차리고 그 컨셉을 이어받아 ‘폐인의 세계’ 등 히트작을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유산

파란만장한 만화 일생을 보내다가 은둔하여 살며 PC 하나로 세상과 가명으로 교류하던 그의 나날은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의 와중에서, 그는 노환과 심장마비로 결국 아무도 모르게 운명을 달리했다. 락 밴드 스파이널탭의 광팬이었을 정도로 정신적으로 항상 젊은이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호주의 원로영화인 콜린 맥킨지가 만든 초기 컬러 유성 영화들에 눈물을 흘릴 정도로 고풍스러운 취향을 가진 한 선구자가 그렇게 질곡 많았던 만화인생을 마감했던 것이다.

한 시대의 전설은 사라졌다. 하지만 최근의 자료를 바탕으로, 한국은 물론 세계 만화계에 배후에서 큰 영향을 행사했던 그의 세계를 재조명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새롭게 대두되고 있다. 최근 미국 뉴욕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위치한 네셔널카툰뮤지엄의 ‘동방의 신비: KJS’ 전시회를 열어서 폭발적인 호응을 얻은 바 있다. 한국에서도 이 선구자를 재조명하고, 이번 기회에 한국 만화 역사의 보다 세밀하고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내어 보다 입체적으로 이 나라의 문화사를 그려낼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까지 이런 말도 안 되는 새빨간 구라를 읽느라 시간을 낭비한 독자들의 분노를 조금은 누그러뜨릴 수 있게 되기를. 그래야 비로소 한국 만화사 연구의 보다 풍요로운 내일이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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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thoughts on “발굴! 한국만화사의 숨겨진 대가를 찾아서[무크지 ‘거짓말’ / 0709]

Comments


  1. 이 분의 작품들은 뉴질랜드의 작은 마을 힉스빌에서도 널리 읽히고 있다고 하죠.

  2. 음..이 명문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명문인것 같음.

    아무래도 이거 진짜로 믿는 사람들이 천명이상으로 늘어나서 UPC 로 해당 게시물을 번성시킬것 같다는 두려움이 드네용. 한국은 여러해전에 지나간 인물이 또 나와서 똑같은 농담을 해도 ‘본좌’라고 별명을 붙여주는가 하면, 씨도 안먹히는데다 우습지도 않은 뻥(외계와 송수신을 한다는)을 쳐도 인기인물로 등극시키는 일이 , 일본TV실컷 베껴서 리얼리티쇼라고 거짓말을 해대도 시청률1위를 차지하다못해서 비판적인 기사를 쓰는 기자를 극성맞게 온라인테러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때라.

    이런 글은…진짜로 믿는 분이 의외로 너무 많……………………아 맞다.한국 만화 역사는 관심들 없지요?

  3. !@#… Dreamlord님/ 아아 언젠가 한번 꼭 방문해보고 싶은 곳 1순위. 추가 자료 조사차 그곳 도서관에 반드시 들려봐야겠군요.

    미고자라드님/ 한국만화사, 아니 세계만화사의 기인이죠.

    nomodem님/ 100명쯤 관심 있겠죠. 그 중 여기 벌써 몇 분이 오셨군요.

  4. 나중에 힉스빌을 방문하실 기회가 있으면 절대로 Dick Burger의 이름을 언급해서는 안된다는걸 잊지마시고, 도서관뿐만 아니라 등대에도 꼭 들르시길. 김자설 화백은 New Yorker에 실리는 한컷 만화에는 별로 관심이 없으셨던것 같군요. 만약 관심이 있었다면 Kalo라는 필명을 썼던 잭 캘러웨이의 작품에서도 영향을 받으셨을듯. 어쨌든 미국의 유명 만화평론가 시드니 멜론이 칭송할 정도로 김자설 화백의 작품세계는 다시한번 주목을 받고 있죠.

  5. !@#… Dreamlord님/ 그것 참 흥미로운 이야기군요. 아직 아이스헤이븐에 거주하고 있을 만화평론가 해리 네이버스씨한테도 한번 같이 조사해보자고 제안해봐야겠습니다.

  6. 우하하하하하 아직 4월도 아닌데 이 무슨!! 미묘하게 (정말로 미묘하게) 시대를 앞서가 타이밍이 안 좋았던 김화백이셨군요. 만약 그에 반발해 시류에 맞춰 돈 잘벌겠다고 각오해 다른 길로 나간 손자가 바로 또다른 김화백이었다는 후일담이 있을지도…(퍽퍽)
    사실 개인적으로 흥미가 있는 것이 바로 초기 한국만화가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본만화를 봤느냐는 것인데 말이죠. 예컨데 일본만화의 큰 줄기에 영향을 끼친 데즈카 오사무나 시라토 산페이의 작풍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는지, 내지는 그에 영향을 받은 다른 일본작가들 만화가 한국만화가들이 본 것인지 말입니다. 순정만화 쪽은 그에 비해 일본 영향론이 좀 구체적인 것 같습니다만 (적어도 70년대는…) 대체적으로는 알기 어려워서…해적판도 중요한 역사적 자료인데 말입니다.

  7. !@#… 시바우치님/ 초기를 어느 정도로 잡을지에 따라 다르기는 하겠지만, 구술 기록들에 의하면 확고한 밀수루트로 읽고 베끼는 관행이야 꽤 오래전부터의 일이고 데즈카 오사무, 치바데츠야, 요코야마 미츠테루 등은 붙박이 중의 붙박이죠.

    쥬에르노님/ 그 분함, 4월 1일까지 고이 간직하시길 :-)

  8. !@#… 모과님/ 저도 곳곳에 가명과 이니셜로 있던 그 정체들이 바로 이 한 분이라는 것을 알게되고 얼마나 감격에 겨웠던지…;;; 상대적으로 문화권간 교류가 빈약했던 세계만화역사에 우뚝선 귀인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