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긍정 – 죽음 (디럭스 에디션) [기획회의 355호]

!@#… 무척 supercalifragilisticexpialidocious한 누님의 만화.

 

삶의 긍정 – [죽음 (디럭스 에디션)]

김낙호(만화연구가)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온다는 격언은 있지만, 개개인에게 닥치는 죽음의 함의에 사회적 평등이 존재하는 일은 없고, 죽음을 이해하는 방식 역시 각자의 처지와 문화적 맥락 등에 따라서 매우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평한 측면이 있다면, 그저 누구에게나 결국 죽음이 찾아오기는 오고, 누구라도 너무 무리한 희생을 치러야하는 것만 아니라면 죽지 않고 싶어한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죽음이라는 무자비한 자연현상에 관해, 사람이 대화와 협상을 시도할 수 있는 무언가로 치환하는 상상력의 이야기들이 어찌보면 이야기의 역사와 늘 함께 했다.

[죽음: 디럭스 에디션](닐 게이먼 글, 데이브 맥킨 외 다수 그림 / 시공코믹스)은 90년대 미국 판타지장르의 큰 획을 그은 만화시리즈 [샌드맨] 연작의 스핀오프(주: 특정 작품의 캐릭터 또는 연관 스토리라인을 바탕으로 자매 시리즈를 만드는 방식) 가운데 하나다. [샌드맨]에는 영원의 일족들이라는 일곱 남매가 등장하는데, 이들은 초능력자도 신도 아니라 어떤 거대한 관념의 구현화다. 우주의 탄생과 함께 순서대로 탄생한 운명, 죽음, 꿈, 파괴, 욕망, 절망, 희망(시대가 흐르며 ‘분열’로 변함)이 그들이다. [샌드맨]은 제목이 꿈의 요정을 칭하는 애칭이고 작품 자체가 우리 문명을 이뤄내는 수많은 이야기들에 관한 이야기라서 주인공이 ‘꿈’이었는데, 당시에 시리즈가 진행되면서 주인공과 비등하거나 그 이상의 인기를 끌었던 캐릭터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모든 관념 가운데 두 번째로 일찍 탄생한, ‘죽음’이다. 존재가 시작되었기에 그 존재가 걸어나가는 궤적인 ‘운명’이 가장 먼저 나오고, 그리고 운명이 있는 모든 것은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 디럭스 에디션]은, 죽음이라는 관념의 현신인 ‘죽음’이라는 캐릭터가 자신의 역할을 하는 와중에 벌어지는 사람들의 군상극을 담아내는 몇 가지 단편작품들과 여러 설정집을 묶어 출간한 양장본이다.

죽음의 영역으로 인도하는 불청객에 대한 상상력이 동아시아 민담에서는 관료적으로 운영되는 저승 사회의 하급 관료인 ‘사신’이라는 형태로 흔히 나타났다면, 서양 민담에서는 무감각하게 생명을 추수해가는 해골 또는 해골에 가까운 크고 창백한 검은 외투의 존재로 그려지곤 했다. 그런데 저승의 인도자 정도의 직급이 아니라 아예 죽음이라는 개념 그 자체인 이 작품의 ‘죽음’은, 전혀 다른 모습이다. 고스(Goth)풍 흑백 패션을 하고 있는 발랄하고 쾌활한 젊은 누님인 것이다. 기계적인 관료도 으스스한 허무함도 아니라, 가장 생기가 넘치는 모습으로 자신의 손을 잡게 될(즉 죽게 될) 사람을 마지막 순간까지 대해준다. 죽음이라는 누님은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매사에 능란하고, 모두에게 공평하고 따듯하게 대해주며, 무엇보다 낙천적이다. 거대한 환상의 왕국을 만드는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항상 혼자만의 세계에 침작하고 우울한 표정을 짓는 동생 ‘꿈’과 정반대로, 농담을 즐기며 삶을 긍정한다. 심지어 삶을 상징하는 이집트 기호인 앙크를 목걸이로 항상 걸고 다닐 정도다. 죽음의 필연성 앞에 삶을 돌아볼 것을 격려하는 실로 무적의 누님이다.

책에 수록된 첫 번째 작품인 ‘그녀의 날개 소리’는 샌드맨 연작에서 죽음이 처음 등장하는 대목을 단편으로 수록한 것이다. 오랜 기간 인간 마법사에게 감금되었다가 갖은 신화적 노력으로 지옥까지 오가며 힘을 회복했으나 이미 변해 있는 인간 세상의 모습에 우울해하는 동생 ‘꿈’에게, ‘죽음’이 살아가는 것의 즐거움을 설파한다. 꿈의 좌절, 죽음을 돌아보며 오히려 긍정하게 되는 삶 등, 더 깊게 생각해볼수록 절묘한 상징들로 가득한 내용인데, 겉으로는 그냥 동네 공원에서 밝은 누나가 우울한 남동생 격려하는 이야기라는 묘한 재미가 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약간 더 긴 미니시리즈 ‘죽음: 삶의 비싼 대가’다. ‘죽음’은 사람들의 마음과 행동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한 세기에 한 번 유한한 인간의 몸으로 현신하여 삶의 과정을 체험하는 습관이 있다. 디디라는 가명 하에, ‘죽음’은 십대 친구들을 사귀게 되고 수백살 먹은 홈리스 노파가 심장을 되돌려 받는 모험에 함께 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사랑, 삶, 죽음을 돌아보게 만드는 여러 사건과 사연들이 스쳐지난다.

그 다음 미니시리즈 ‘죽음: 인생 최고의 순간’은 한 여성 신예 락 스타가 자신의 성적 정체성 공개를 고민하던 와중에 오래 마음을 함께 했던 동성연인이 죽음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아내고자 하는 사연이 펼쳐진다. 죽음이라는 현상을 매개로 어떻게 사람들이 진심을 확인하고 또 새로운 길을 찾아나서고자 하는가, ‘죽음’이 그 군상극을 슬그머니 바라본다. 이외에도 ‘파사드’, ‘죽음과 베네치아’ 등 샌드맨 연작의 일부로 여기저기 등장했던 단편들이 함께 수록되어 비슷한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바라보는 죽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액면 그대로 보자면 [죽음: 디럭스 에디션]은 ‘죽음’이라는 캐릭터의 큰 인기를 재활용하는 팬북 같은 모양새다. 미소녀, 누님 속성, 밝은 성격, 특별한 악세서리 아이템, 뛰어난 패션 코드 등 캐릭터로서의 매력이 그만큼 뛰어나다. 하지만 죽음과 관련된 어떤 역할을 하는 것도 아니라 아예 죽음 그 자체이기에, 모든 상황과 대사에 상징과 성찰의 면면들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간다. 모아놓은 단편들은 길이도, 내용 전개 방식도, 그리고 (미국 주류 만화생산 방식과도 연관이 있지만) 그림체도 완전히 다르다. 재미라는 측면에서의 완성도도 꽤 기복이 있다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모든 내용에서 일관적으로 흐르는 것은 삶에 대한 긍정이다. 죽지 않는 상태라는 의미의 생명이 아니라, 잘 풀이는 순간도 험난한 순간도 있지만 여하튼 이왕 살아있는 동안 더 즐거운 무언가를 추구하고 노력한다는 의미의 삶이다. 그래서 자신이 예상하던 순간이든 아니든 ‘죽음’이 방문해올 때, 후회보다는 만족감의 미소로 손을 잡을 수 있도록 말이다. 주마등 마냥 삶을 돌려보게 만드는 식의 교훈이 아니라, 낙천적인 ‘죽음’의 모습 앞에 스스로 무언가를 떠올리게 한다.

반면, 작가가 [샌드맨 연작] 본편에서 장편 스토리를 통해서 보여준 수준의 밀도 높은 신화적 모티브의 융합, 커다란 위협의 기발한 해소 과정 같은 것을 기대하고 책을 펼치는 독자들은 다소 기대를 충족받지 못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소품 모음집이기에, 무려 죽음 그 자체가 주인공이지만 세상의 근간을 파헤치거나 뒤흔드는 거대한 이야기들과는 모두 거리가 멀다. 또한 다양하고 복잡한 방식의 욕망과 이해관계들이 뒤섞이기보다는, 죽음을 매개로 한 삶 예찬이라는 하나의 테마가 계속 반복될 따름이다. 그런 한계는 꽤 명확하지만, 솔직히 샌드맨 연작을 읽으며 여타 주요 캐릭터들보다 훨씬 멋있는 ‘죽음’ 누님을 주인공으로 하는 더 많은 이야기들을 읽고 싶다고 생각한 수많은 독자들에게는 좋은 선물이 되어준다.

죽음 디럭스 에디션
닐 게이먼 외 지음, 이수현 옮김/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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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 트윈스피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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